[무엇이 다양성과 포용성을 가로막는가] 토론이 익숙하지 않은 한국 문화
글로벌 회사에 다니고 있는 나는, 종종 해외교육에 참여할 일이 생긴다. 미팅, 컨퍼런스와 같은 출장에 비해 교육은 잠시나마 업무 현장에서 벗어날 수 있는 데다 역량 개발을 할 수 있는 기회인 만큼 나를 설레게 한다.
물론 모든 해외교육이 좋았던 것은 아니다. 나의 첫 해외교육은 긴장감에 숨이 턱 막히고 도망치고 싶었던 하루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해 오던 나는, 미국 교육에 대한 일종의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무언가를 배우고 싶어, 국내 저명한 교수, 강사의 강연을 들으러 가면, 그들은 으레 미국의 핫한 리더십, 심리학, 경영 관련 도서 및 논문의 내용부터 소개했다. 그런 나에게 미국 강사가 직접 강의하는 교육이라니! 설레지 않을 수 없었다.
‘글로벌 강사는 어떤 인사이트를 줄까?
교재는 한 두 권 더 받아서 집에서도 보고 팀장님께도 드려야지.
강사가 전문적인 내용을 몇 시간씩 설명할 텐데, 분명 놓치는 부분이 많을 거야. 녹음을 해 두는 게 낫겠어.’
나는 강사가 제공해 줄 많은 양의 전문지식과 정보를 놓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삼색 볼펜, 형광펜, 회사 로고가 박힌 두꺼운 노트를 캐리어에 챙겨 담았다.
그런데 교육 현장의 모습은 내 예상과 달랐다. 교재나 강사용 PPT 슬라이드는 따로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대신, 팀마다 큰 이젤패드와 색색의 포스트잇이 놓여 있었고, 교육장 벽면은 칼라풀한 이미지들로 채워져 있었다.
교육 진행 방식 또한 처음 겪어보는 토론식 교육이었다. 강사는 주제를 하나 던진 후, 모든 교육생에게 의견을 물었는데, 특별한 의견이 없다고 말하거나 앞서 다른 사람이 언급한 내용과 같은 생각이라고 대답하면, 유사한 질문을 계속 던지며 사고를 확장시켜 무슨 이야기든 하게 만들었다. 정보를 제공해 주는 트레이너(Trainer)형 강사에게 익숙한 나에게, 계속해서 "당신의 의견은 어떤가요?"라고 묻는 퍼실리테이터(Facilitator)형 강사는 그야말로 눈 마주치는 것조차 부담스러운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일대일 질문 외에도 팀별로 교육 주제와 연관된 활동들을 수행한 후, 해당 결과를 이젤패드에 정리하여 발표하고, 다른 팀의 의견에 반박하거나 새로운 의견을 덧붙여야 했다. 거침없이 타인의 의견을 반박하는 서양인들을 보면서, 한국에서 챙겨 와야 할 건, 형광펜이나 두꺼운 노트가 아닌,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근거로 상대를 설득하는 힘’임을 깨달았다.
오후 교육은, 오전에 논의했던 내용 중 자신에게 가장 의미 있었던 내용을 정리하여, 모든 교육생 앞에서 그 내용을 가르쳐 보는 실습 형태로 진행되었다.
미국의 유명한 임상심리학자 윌리엄 글래서(Willam Glasser)에 따르면, 인간의 기억력은 학습 방법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데, 단순히 읽는 것은 10%, 듣는 것은 20%를 기억하게 한다면, 학습한 내용을 타인에게 가르쳐 볼 경우 그 정보의 95%를 기억할 수 있다고 한다.
맙소사. 오전 내내 내 의견을 말하는 것도 버거웠는데, 이제 남을 가르치는 역할까지 해야 한다니...
그 날 나는, 그 좋은 호텔의 음식과 풍광을 즐길 여유도 없이 허겁지겁 점심을 먹은 후, 오후 실습을 준비하러 교육장으로 뛰어갔었다.
아찔했던 그 날의 경험 이후, 해외교육을 갈 일이 생기면, 나는 며칠 전부터 어떤 주제가 논의될지 예상해 보고 나의 경험과 관련 지식을 토대로, 어떻게 내 의견을 전달할지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해 본다. 사전과제(Pre-work)로 제공된 이러닝을 보고, 궁금한 사항도 메모해 둔다. 최근 한국 교육 현장에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플립드 러닝(Flipped learning, 온라인을 통한 선행학습 후, 오프라인 교육을 통해 강사와 토론식 강의를 진행하는 역진행 수업 방식으로 현장에서는 강의보다는 학생과의 상호작용을 중요시한다)을 남들보다 일찍 경험해 볼 수 있었던 것은 개인적으로 값진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여전히 나는, 앉아서 강의를 듣고 중요한 내용을 메모해 나가는 일방향의 교육이 편하다. 한 가지 위안이 되는 부분이 있다면, 나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한국 사람이 그렇다는 것이다. 한 번은 해외교육 중, 마치 미드의 어느 파티장처럼, 와인을 마시며 한 시간 동안 스텐딩 네트워킹을 하는 시간이 주어졌는데, 십 여분이 지났을까, 어느덧 한국 사람들끼리만 삼삼오오 모이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휴, 이제야 숨통이 트이네요."
"미국 사람들 대단하네요. 주제가 계속 바뀌는데도, 어쩜 저렇게 하고 싶은 말들이 많은지."
"저 혼자 딱히 할 이야기도 없고 멍하니 서 있는 게 어색해서 죽는 줄 알았어요.”
한국 사람들에게 토론이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자신만의 답을 찾는 교육이 아니라 정답만을 요구해 온 교육제도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도 서양 사람들처럼, 어린 시절부터 사유하고 비판하는 방법을 배웠다면 어땠을까? 학창 시절 선생님이,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으니 무엇이든 뒤집어서 생각해보세요.”라고 말하며, 답을 알려주기 전에 스스로 충분히 생각하고 판단하는 시간을 제공해 주었다면, 아마도 성인이 되어서는 타인 앞에서 내 의견을 밝히는 것이 어색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우리의 조직으로 돌아가 보자. 철학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은 “진실은 사람들 간의 논쟁을 통해 나온다.”며 격의 없는 대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리더는 구성원들이 자신의 생각이나 아이디어를 소신 있게 말하며 논쟁할 수 있는 개방적 커뮤니케이션 분위기를 조성해야 창의적이며 다양한 아이디어가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활발하게 토론해 봅시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토론식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구성원들이 갑자기 열성적으로 의견을 낼 리 없다.
필요하다면 리더가 적극 개입해 토론을 이끌어 내야 한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세계 시장을 정복한 인텔 전 회장인 앤디 그로브(Andy Grove)는 조직 내 열린 대화 풍토를 조성하기 위해 ‘건설적인 반박(Constructive Confrontation)’이라는 토론 방식을 도입했다. 이는 팀원들이 상대방의 의견을 의도적으로 반박해 보도록 하는 것인데, 심지어 직속 상사가 진행하는 프로젝트라도 거침없이 그 효과성과 방향성에 대해 의견을 제시해야 한다. 이러한 토론을 통해 팀원들은 격의 없이 의견을 교류하고, 보다 나은 의사결정을 내리게 된다.
이렇듯, 아직 조직 내 토론 및 자유로운 대화 풍토가 조성되어 있지 않다고 판단된다면, 리더가 직원들에게 정당한 참여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부터 시작해 보길 바란다. ‘모두가 의견을 말해야 되는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해당 이슈에 대한 관심과 학습으로 이어지고, 프로젝트 이해도를 높임으로써 빠르게 과업을 수행하는 부가적인 효과까지 얻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