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날이 어느덧 내일로 다가왔다. 어떻게 죽을지 정하자고 했던 바로 그날이었다.
죽음이 하루 앞으로 다가오자, 처음과 달리 다들 진지한 태도로 적극적으로 의견을 냈다.
치열한 토론까지 벌어졌고, 옥신각신 다투기까지 했다. 시간까지 정해두고 의논했지만, 예상 시간 100분을 훌쩍 넘기고도 모두가 흡족할만한 방법은 나오지 않았다.
방법은 다양했지만, 막상 한 가지를 고르자니 어느 것도 성에 차지 않았다. 너무 아프거나 느리거나 피해를 주거나 실패하기 쉬워 보였다. 떠나는 나도 생각해야 하지만, 남겨진 이들도 생각해야 했다. 생각보다 죽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래서 우리나라도 스위스나 이런데 처럼 안락사를 허용해야돼."
향수 아저씨가 말했다.
"그럼 남아있는 사람들이 하나도 없을 걸요?"
내가 말했다.
"스위스 같은 나라들도 안락사 함부로 안 시켜줘요. 까다로운 심사과정을 통과해야 돼요. 그게 몇 년씩 걸릴 수도 있어요. 비용도 꽤 들고요."
한점이 꼭 집어 말했다.
“아, 맞다.”
챠키 언니가 갑자기 생각난듯, 못내 아쉬워하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바다를 안 들어갔네. 수영복도 챙겨왔는데.."
그 때, 내 머릿속에 무언가 번쩍하고 떠올랐다.
"바다에 빠지는 건 어때요?"
내가 툭 던지듯 말했다.
순간, 침묵이 흘렀다. 요란하게 울어대는 매미 소리만 들렸다.
"낭만적이긴 한데.. 너무 스케일이 큰 거 아닌가.. 그리고 난 물귀신 되기 싫어."
물을 싫어하는 향수 아저씨가 투덜거리듯 말했다.
"용왕이나 인어가 될 수도 있잖아요."
한점이 말했다.
"남들 눈에 안 띄려면 밤에 뛰어들어야 할텐데, 밤바다 많이 추워."
챠키 언니가 말했다.
"어차피 죽을건데 추운 게 상관있나요?"
내가 반문하자, 챠키 언니가 내 말에 반박했다.
"그렇게 따지면, 다른 방법들도 아픈게 다 상관없지."
"자, 그 날이 바로 내일이에요.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라고요.
지금까지 나온 것들 중에 그냥 하나 고르죠. 이러다 날 샐 순 없잖아요. 마지막 날을 고민만 하다 보낼 건 아니시죠? 어차피 죽고나면 다 똑같아요."
칼이 말했다. 죽음이 다가오자, 신기하게 그는 점점 더 활기를 되찾아갔다. 이제는 전처럼 진행을 도맡아 볼 정도였다.
그렇게 어떻게 죽을지를 두고 토너먼트 대회가 열렸고, 치열한 예선과 본선을 거쳐 최종우승은, 내가 제안한 '바다에 빠지기'가 거머쥐었다.
다들 부러운 눈빛으로 축하해줬고, 나는 괜히 으쓱해졌다. 하지만 그 기분도 잠시였다. 방법을 정하고 나면 마음이 홀가분해질 줄 알았는데, 되레 더 심란해졌다. 허무함이 마음을 점점 잠식해왔다.
그날은 각자 시간을 갖다가, 저녁 때 우리만의 조촐한 파티를 성대하게 열기로 했다. 마을 주민들도 초대하고 마지막 밤을 신나게 보내볼 작정이었다.
어느덧 저녁이 되었고, 동네슈퍼 앞 마을회관에서 전처럼 마을잔치가 또 열렸다. 이번엔 우리가 호스트, 마을 어르신들이 게스트가 되었다. 뭉게와 구름이, 몽실이도 있었다. 녀석들은 신이 나서 술래잡기 하듯 뛰어놀았고, 나는 그 모습을 오래도록 눈에 담았다.
큰 불판 위에서 소고기가 쉴새없이 익어가며, 냄새를 풍기고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장님이 가져다주신 불판 위에 고기는 읍내에 나가 사온 특 등급 한우를 잔뜩 올렸다. 어르신들은 한우를 보고선 갑자기 웬 한우냐며 눈이 휘둥그레지셨지만, 여행 마지막 날을 맘껏 즐기고 싶어 한다고만 생각하셨다. 막걸리 한두 잔에 흥이 오른 어르신들은 노래방 기계의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보는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해주었다. 다들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드느라 조용한 시골동네가 시끌벅적했다. 밤의 합창단조차도 그 소리에 파묻혔다.
원래 술은 입에도 데지 않는 나였지만, 처음 맛본 막걸리 맛에 반해서 한 병을 다 비워버렸다. 이제 내 인생에 '나중에', '언젠가'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헤롱대는 나를 본 어르신들께서 평상 위에 누우라며 자리를 마련해주셨고, 나는 누웠다. 아니 뻗어버렸다. 배는 고기로 한껏 채우고 머리는 술로 채우니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흥이 오른 향수 아저씨가 한껏 가다듬은 목소리로 향수를 부르기 시작했고, 청중은 박자에 맞춰 박수를 쳤다. 노래 소리, 박수 소리, 웃음 소리가 한데 뒤섞인 왁자지껄했다. 그 소리를 어르신들의 굽은 등 뒤에서 취기가 오른 상태로 누워서 듣고 있자니, 가까운 듯 먼 듯 귀에 둥둥 울려 퍼졌다. 맨다리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지더니, 슬리퍼를 신은 발이 간지러웠다. 세 녀석들은 이제 내 발 밑에서 뛰놀고 있었다. 걱정 없이 해맑기만 한 그들의 모습에 흐뭇하면서도 부러웠다. 어느새 한점이 내 옆에 누웠다. 아니, 그 또한 막걸리에 잔뜩 취해서 내 옆자리로 보내진 것이었다. 고급와인만 즐기는 그가 막걸리를 잔뜩 마신 것도 신기하고, 취해서 헤롱 대는 모습도 신기했다. 우리는 나란히 누워 머리를 맞대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카만 하늘 가득, 무수한 별들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꼭 우리를 향해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한점이 잔뜩 혀가 꼬인 채로 말했다.
"이렇게 있으니까 꼭 저도, 세상에 속한 기분이 드네요."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어지러웠지만, 함께 있어서 외롭지는 않았다.
다음 날이 밝았다. 대망의 그날이었다. 하루 종일,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아, 그저 밤이 되기만을 조용히 기다렸다. 때가 되자 우리는 바다로 향했다. 가는 길은 익숙했지만, 오늘은 낯설고 멀게만 느껴졌다. 우리는 침묵 속에서 걸었다. 이상하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세상 전체가 숨죽이며 우리를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저 멀리, 깜박이는 네온사인이 눈에 들어왔다.
급커브 구간입니다. 안전운전 하세요.
그 순간, 모든 것이 슬로모션처럼 느려지더니, 네온 불빛이 뿌옇게 번졌다.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세상이 서서히 암흑 속으로 잠겼다. 땅이 푹 꺼졌다. 팔다리를 허우적거렸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을 떴을 땐, 모래사장 위였다. 여러 켤레의 신발들만 흐트러진 채 놓여 있었다. 그 앞에는 무심한 파도만이 잔잔히 물결치고 있었다.
꼬끼오—
닭 울음소리에 눈이 번쩍 떠졌다. 꿈이었다. 식은땀이 온몸을 적셨다. 창호지문 너머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방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아직 날이 완전히 밝기 전이었다. 옆을 보니 챠키 언니는 곤히 자고 있었다. 그런 언니가 부럽고 신기하기만 했다. 자리에 다시 누웠지만 한참을 뒤척이다 어느새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