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

by 이정표

어느 날 하늘이 급격히 흐려지더니, 느닷없이 가느다란 빗줄기가 흩뿌리며 내리기 시작했다. 온 세상이 마치 자욱한 안개 속에 잠긴 듯, 시야가 뿌옇게 흐려져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른 아침 찾아오는 포근한 안개와는 달랐다. 공기엔 습기가 가득해, 가만히 있어도 옷이 꿉꿉하고 피부는 눅눅했다. 기분마저 찝찝했다. 아침부터 시작된 비는 하루 종일 멈추지 않았다. 우중충한 날씨와 쌓인 피로 때문인지, 우리는 낮부터 잠에 골아떨어졌고, 그날 하루는 잠만 자다 지나가버렸다.


장마철은 아직 이르니 곧 그칠 거라 예상했지만, 완전히 빗나갔다. 이슬비가 오락가락 내리며 며칠째 계속됐다. 평소 같았으면 등산이나 운전 연습, 산책을 했을텐데, 꼼짝없이 민박집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죽음으로 향하면서도 각자 일상 속에서 나름의 평온을 누리고 있었지만, 흐린 날이 계속되자 몸은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워지고, 마음은 점점 가라앉았다. 여행을 떠날 때의 설렘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흐린 날은 계속되고, 죽을 날은 그만큼 가까워오고 있었다. 마음이 심숭샘숭해서,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움직일 기운조차 나지 않았다. 다들 나와 마찬가지로 힘없이 축 늘어진 채 시간을 흘려보냈다. 사람들과 섞이기보단 혼자 있는 게 편했다. 말수는 줄고, 표정은 어두워졌으며, 신경은 날카롭게 곤두섰다.

향수 아저씨는 갑자기 무슨 생각을 하신건지, 어느 순간부터 혼자 있으려는 사람들 곁으로 다가가 하나하나 다독이듯 말을 건넸다.


처음으로 말을 건넨 사람은 챠키 언니였다. 언니는 마루 끝에 앉아 기둥에 몸을 기대고, 먼 산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저씨는 그런 언니에게 달래는 투로 가볍게 말을 건넸다.

“이봐, 챠키. 다시 생각해봐. 남겨질 가족들 생각도 해야지. 딸도 아직은 엄마 손이 필요할 나이잖아.”

아저씨의 의도와는 달리, 그 말을 들은 언니는 참았던 푸념을 쏟아내듯 말하기 시작했다.

“해도 해도 끝이 없어요. 뭐가 그렇게 다 마음에 안 든대요. 전 늘 못난 엄마, 못난 아내, 못난 며느리죠. 이젠 착한 딸 노릇까지 지긋지긋해요.

전업주부는 아무리 애써도 밖에서 돈 버는 사람 발끝에도 못 미쳐요. 그저 죄인이에요. 뭐 하나 맘에 안 들면, 다 제 탓이죠.”

언니의 말은 어딘가 낯설지 않게 들렸다. 나도 어디선가 들어본 말들이었다.

“그만하고 싶어요, 저도.‘가족’이란 말만 들어도 이젠 치가 떨려요. 이 지긋지긋한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죽어서라도...”

“그럼 그냥 이혼을 하면 되잖아. 왜 꼭 죽으려고 해?”

“...그게 그렇게 쉬웠으면, 제가 이러고 있었겠어요?”

“그래도 죽는 것보단 낫잖아. 안 그래?”

챠키 언니는 원망스럽다는 듯 아저씨를 한번 바라보더니, 다시 먼 산으로 시선을 돌리고 침묵으로 답했다.

평소에도 가족 흉을 가끔 보긴 했지만, 대부분 농담 섞인 말투로 가벼운 분위기 속에서였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말투도, 분위기도 너무 진지했다. 밝고 활기찬 모습만 보이던 언니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건 처음이었다. 나도 놀랐지만, 아저씨 역시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다음 차례는 바로 나였다. 나는 마루 끝에 걸터앉아, 빗방울과 빗소리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빗줄기가 잦아지며 안개가 좀 걷혔고, 그 사이 해가 잠깐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처마 끝에서 똑, 똑 떨어지는 빗방울은 햇빛을 받아 영롱하게 빛이 나고, 크기가 다른 장독대 위로 툭, 톡 떨어지는 빗줄기는 서로 다른 음을 내고 있었다. 내 무릎 위에는 몽실이가 몸을 둥글게 말고 앉아 있었다. 나는 그런 몽실이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산책을 못 나가서 갑갑한지, 몽실이는 자꾸만 낑낑거렸다. 그때, 아저씨가 터벅터벅 다가와 내 옆에 털썩 주저앉더니 말을 건넸다.

“싱어, 넌 취업만 하면 되잖아. 꼭 그런 선택을 해야겠어?”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으니까요... 저도 나름대로 애써봤어요.

근데... 다들 제가 필요 없대잖아요. 이 사회는, 저 같은 사람한테는 발톱의 때만큼도 자리를 내어줄 마음이 없나봐요.”

나는 애꿎은 몽실이의 털만 만지작 거리며, 잔뜩 풀이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 아직 젊잖아. 계속 도전해봐.”

“안 젊어요. 사회에선 절대로. 아저씨 눈에만 젊어 보이나 봐요. 나이는 많고, 경력은 짧대요.

동네 알바 면접만 가도, 실실 웃으며 온갖꼬투리를 잡아요. 알바가 아니라 무슨 대기업 공채라도 뽑는 줄 알았다니까요.

그럴 거면 공개채용을 하던가요.‘학력무관, 경력무관’ 같은 말은 왜 갖다 붙이나요.

애초에 면접 보러 오라고 하지나 말던가.

그러고보면 세상엔 참 불쌍한 인간들이 많아요. 무슨 자격지심이 있길래, 굳이 시간 내서, 저 같은 사람 불러다 앉혀놓고 화풀이를 하는지, 원...”

그동안 면접을 다니며 쌓였던 상처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자, 속에 눌러 담은 말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아저씨는 다시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래도 가족을 생각해봐. 부모님이 얼마나 슬퍼하시겠어.”

“자식도 자식 나름이죠. 부모님도, 언니도 저 같은 자식, 동생 둔 거 엄청 싫어할걸요. 내심 제가 없어지길 바라고 있을지도 몰라요...”

끓어오르는 울분을 주체 못하고 나오는 대로 말을 내뱉었지만, 나조차도 진심인지 아닌지 헷갈렸다. 그저... 엄마 얼굴이 떠오르자, 코끝이 시큰해졌다.

“전 이제 정말 지쳤어요. 제 방에서만 7년을 버텼어요. 무려 7년이요. 시체처럼, 죽은 듯이 누워서. 어느 날은 하루 종일 잠만 자고, 또 어느 날은 게임만 했어요. 시간이 흐르는 줄도, 계절이 바뀌는 것도 모르고요. 화장실 갈 때조차 가족들 마주칠까 봐 눈치 보며 슬금슬금 다녔어요.

전... 이미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에요.”

내가 애써 울음을 삼키며 남은 말을 마저 쏟아냈다. 아저씨는 아무 말 없이 어깨를 토닥여주고는, 조용히 일어나 자리를 떠났다.


그 다음은 한점이었다. 창문도, 방문도 활짝 열어둔 방 안에서, 한점은 벽에 기대어 조용히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아저씨는 다정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가, 곁에 나란히 벽에 기대어 앉았다.

“한점, 자네는 왜 꼭 죽으려고 하는거야? 요즘 방송 보니까, 게이들도 많이 나오고 유쾌하고 당당하게 잘들 살던데, 자네도...”

“주변에서, 저 같은 게이 본 적 있으세요?”

아저씨가 생각해서 꺼낸 말이, 한점의 아픈 속을 건드려 버렸다.

“그야... 그렇게 흔한 건 아니니까...”

한점의 날 선 반응에 당황한 아저씨가 수습하려 했지만, 한점이 던진 매서운 말에 가로막혀 버렸다.

“아뇨. 생각보다 훨씬 흔해요. 근데, 왜 내 주변에선 찾아보기 힘들까요?”

아저씨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한점이 토해내는 열변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사람들은 쉽게들 말하죠. 이젠 전보다 살기 좋아졌으니, 만족하고 살라고요.

우린 이상한 사람들이니, 이 정도에 감사하라고요.

그리고, 우리는 왜 늘 유쾌하고 당당해야 하죠? 일반 사람들은 성격도 다양하잖아요.

우리도 그냥 똑같은 사람일 뿐인데...

만약에 말이에요. 아저씨 아드님이 저와 같은 입장이였다면, 그렇게 쉽게 말씀 못하셨을 거에요... 저희 부모님처럼요.”

“나는 그냥 안타까워서 한 말인데... 미안하네.”

한점이 저렇듯 격하게 말을 쏟아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건 칼뿐이었다. 칼은 며칠째 굳게 닫힌 방 안에 홀로 누워,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식사조차 거르기 일쑤였다. 닫힌 문 앞에 잠시 멈춰 서서 문을 바라보던 아저씨는, 마침내 조용히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칼의 곁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귓가에 대고 가만가만 말을 건넸다.

“칼, 힘든 건 알겠는데... 한창 좋은 나이에 이게 뭐하는 거야. 이대로 죽기엔 너무 아깝잖아."

"저는, 좋은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반쯤 열린 방문 사이로 둘의 낮고 작은 대화 소리가 간간이 흘러나왔고, 기운 없이 팔을 베고 옆으로 누운 칼의 모습도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깨끗이 잊고 새 출발 해. 내 주변에도 이혼하고 잘사는 사람들 많이 있어.”

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문 가까이 다가가 안을 들여다보았다. 칼은 멍한 표정으로 힘 없이 웅얼거리고 있었다.

"첫사랑인데... 어떻게 잊겠어요... 전 그냥... 이대로 가는 게 나아요...

살려면 아저씨나... 아니, 아저씨는 꼭 사세요... 제 몫까지요... 전 됐어요..."

말을 마친 그가 천천히 몸을 돌리자, 고개 너머로 눈가에 맺힌 눈물이 잠깐 반짝였다.

“에휴 참... 아니, 다들 이럴 거야 정말? 맘대로들 해, 그럼.”

칼을 마지막으로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난 아저씨는, 쏟아지는 빗속에 대고 화풀이인지 하소연인지 모를 말을 퍼부었다.

“아니, 이놈의 비는 왜 이렇게 찔끔찔끔 오는거야. 내릴 거면 시원하게 확 쏟아붓든가, 천둥도 쾅쾅 치고 좀. 에휴, 참...”

아저씨의 설득은, 결국 스스로의 포기로 끝이났다.



비가 그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날이 화창하게 개었다. 해는 쨍쨍하게 내리쬐고, 풀벌레는 합창을 시작했다. 우리도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마을 일손을 도와, 논에 난 잡초를 뽑으러 가기로 했다.

출발하기 전, 작업복으로 갈아입었다. 작업복이라 해봐야 별거 없었다. 꽃무늬 몸빼 바지에, 고무장화, 목에 감을 수건, 그리고 챙이 넓은 모자.

준비를 마친 뒤, 경운기에 올라 논두렁으로 향했다. 달달거리는 소리와 함께 울퉁불퉁한 길 위를 덜컹이며 천천히 나아갔다. 몸빼를 입은 한점이 너무 웃겨서, 아까부터 입을 꾹 다문 채 웃음을 참고 있었다. 하지만 옷을 갈아입고 어색하게 걸어나오는 모습이 자꾸 눈에 어른거렸다. 그를 보지 않으려 시선을 돌리다, 이번엔 몸빼 차림으로 시무룩하게 앉아 있는 칼이 보였고, 그 순간 웃음이 빵, 터졌다. 다행히 고개를 재빨리 돌려, 내 웃음소리는 시끄러운 경운기 소리에 묻혔다.

논물은 정강이까지 차올라 찰랑거렸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질퍽한 진흙은 장화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잡초를 맨손으로 뽑느라 양손은 진흙투성이가 되었고, 손톱 밑까지 시커멓게 물들었다. 논물에선 고약한 냄새가 올라왔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조차 자연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두꺼비 울음소리는 일하는 내내 귓가를 맴돌았다. 뜨거운 뙤약볕 아래, 허리를 숙이고 일하려니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가끔씩 허리를 펼 때면, 신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그날 저녁, 마을 사람들은 평소와 달리 날이 저물도록 슈퍼 앞 평상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이 더운 날씨에 논일 도와줘서 고맙구만유. 수박 한 조각씩 하시우, 시원허니 좋수다.”

일손을 거들어줘 고맙다며, 어르신들은 우리에게 잘 익은 큼지막한 수박을 썰어 내주셨다. 속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고, 단물이 흐를 듯 촉촉했다.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노동으로 땀을 쭉 빼고 나서, 대충 씻고 편한 차림으로 앉아 먹는 수박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수박 국물이 입가와 손에 묻어 끈적였고, 옷에도 흘러 자국을 남겼지만, 나는 해맑은 아이처럼 게걸스럽게 수박을 먹어치웠다.

평상에 둘러앉아 수박을 나눠 먹고 수다를 떨며, 웃음꽃이 피워났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작은 벌레 떼가 모여들고, 풀벌레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그 밤, 여름은 조용히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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