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집으로

by 이정표

다음날 아침, 몸을 일으키는데 온몸이 쑤시고, 어제는 느끼지 못했던 통증이 밀려왔다. 멍은 더 시퍼렇게 짙어졌고, 긁히고 까진 상처는 따끔거렸다. 눈은 퉁퉁 부었는지 실눈밖에 뜨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였는데, 아저씨가 제일 엉망이었다. 멍과 상처로 뒤덮인데다,

팔 여기저기에 물린 자국이 선명했다. 흡사 좀비에게 습격이라도 받은 사람 같았다.

챠키 언니와 나는 아저씨를 보고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아저씨... 약 바르셨어요...?"


내가 조심스럽게 묻자, 아저씨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사람한테 물린 건 뭘 발라야 낫나? 개한테 물리면 파상풍약 먹어야 되는데, 사람도 그런가? 혹시, 파상풍에 걸렸거나 뭐, 그런 건 아니지? 껄껄껄."


아저씨는 어느 때보다 밝고, 활기가 넘쳤다. 하지만 그와 달리, 다른 사람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생각이 많은 얼굴들이었다.

나도 아침이 되자, 몸이 아픈 것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대한 걱정이 물 밀듯이 밀려와서, 마음이 심숭생숭했다.

차에 짐을 모두 싣고 민박집을 떠나기 전, 나는 몽실이와 진짜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녀석도 마지막이란 걸 아는지 평소보다 유난히 짖어댔다.


"잘 지내야 돼. 뭉게와 구름이랑도 사이좋게 지내고."


주인 할머니와도 포옹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할머니, 덕분에 잘 있다 가요. 항상 건강하세요."


"그래. 조심히 가고, 또 와."


할머니께선 처음 왔을 때처럼 문밖까지 배웅을 나오셨다. 그러다 이내 걱정스레 물으셨다.


"근데 몰골이 다들 왜 그래? 어디서 강도라도 맞은 거야? 서로 쌈박질 한건 아니지?"


할머니가 던진 말에 우리는 멋쩍게 웃기만 할 뿐이었다.



기차역으로 향하는 차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다들 골똘히 생각에 잠겨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만신창이인 몰골로.

그때, 갑자기 챠키 언니가 웃음을 터뜨렸다. 언니는 숨넘어갈 듯이 웃어댔다. 그러고는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다들, 푸하하하… 얼굴이 무슨… 잔뜩 찌부러진 호빵 같아! 푸하하하하!”

다들 어리둥절한 눈으로 언니를 쳐다보았다. 그러다 하나둘 서로를 마주 보더니, 풋, 웃음이 새어나왔다. 곧이어 다 같이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기차역에 도착한 우리는 각자 표를 끊었고,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카페에서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각자 음료를 시켰다. 나는 체리가 얹힌 조각 케이크도 같이 시켰다. 아저씨는 신이 나서 혼자 떠들고 있었다.


“그 된장국 맛이 얼마나 기가 막힌지 글쎄, 입에 넣자마자 어릴적 고향 생각이 나더라니까! 우리 어머니가 했던 맛이랑 똑같더라고. 어머니 요리 솜씨가 얼마나 좋으셨냐면...”


아저씨는 눈을 반짝이며, 이미 했던 얘기를 처음 하는 것처럼 또 하고 또 하셨다.

사람들은 말 없이 커피를 홀짝이며 듣고만 있었다. 아저씨 왼편에 앉은 나는 얘기는 듣는 둥 마는 둥, 아저씨의 손목으로만 자꾸 눈길이 갔다. 거기엔 선명한 치아 자국이 있었고, 치열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내 것인 거 같았다. 아저씨 오른편에 앉은 챠키 언니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지, 같은 부위를 계속 힐끔거렸다. 하지만 그건, 아무리 봐도 내 것이었다.


“근데 아저씨, 그날 왜 그렇게 바다에 뛰어들려고 하신 거에요? 아저씨 원래 바다 싫어하잖아요. 물귀신한테 홀리기라도 하신 거에요?”


내 물음에 아저씨가 껄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는 너희들이야말로 대체 뭐에 씌인 거냐? 돌발 행동을 한 건 내가 아니라 너희들이지. 어쩜 막판에 싹 다 마음을 바꾸냐?


기차 시간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는 아쉬움 가득한 눈길로 서로를 바라보다가, 그동안 미처 꺼내지 못한 진심을 마음껏 털어놓았다. 따뜻한 응원과 축복의 말들이 쏟아졌다.

아저씨가 건넨 말을 듣고, 칼은 참아왔던 눈물을 터뜨리며 아저씨 품에 안겨 서럽게 눈물을 쏟아냈다. 우리는 그런 그의 등을 가만히 토닥여주었다.

떠나기 직전, 한 사람씩 돌아가며 뜨겁고 힘차게 꼭 안아주었다. 그 포옹 속엔 말로 다 하지 못한 격려와 애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잘 살아.”

“계속 연락하자.”


그 말을 끝으로 우린 각자 길을 나섰다.

뒤돌아 손을 흔들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다가, 이내 힘차게 내딛었다.

하나같이 지친 얼굴들이었지만, 잔잔한 평화가 어렸고 눈빛은 조용히 반짝였다.



열차에 탄 나는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바라보며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지난 여정이 머리를 스치며, 마치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집에만 있었을 땐, 상상조차 못해본 일들이었다. 내가 겪은 일이라는게 새삼 믿기지 않았다. 마치 꿈을 꾼 것만 같았다.

돌아보니, 계획대로 된 일이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죽음조차도.

당시에 심각했던 일들도 이제와서 보니,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장면이 하나하나 지나갈 때마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인생이란 게 꼭, 한바탕 울고 웃다 끝나는, 광대놀음 같이 느껴졌다. 그래, 이게 바로 인생이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던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집으로 향하는 내내, 머릿속에선 필름처럼 기억이 돌아가고, 입가에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지하철 안에서도 혼자 회상에 빠져 조용히 웃고 있는데, 왠지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 않고 활짝 미소 지었다.


마주치는 사람들이 이제는 다르게 보였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무표정한 얼굴에, 바쁜 걸음으로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저 사람들도 각자 짊어진 삶의 무게가 있겠지.


한때는 나만 빼고 모두가 행복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제는, 한사람 한사람 저마다 견디는 고충과 애환이 스치듯 보였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묘한 동지애 또한 느껴졌다.

그들에게 속으로 힘찬 박수를 보내주고 싶었다. 잘하고 있어, 힘내!


결국,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죽은 것도 아니고, 삶의 문제가 해결된 것도 아니었다. 몸은 만신창이, 마음은 허탈했고 고생스럽고 창피한 기억만 한 아름 안고 다시 돌아가는 중이었다. 세상도 그대로였다. 딱히 이전보다 친절해지지도 돌아온 나를 반겨주지도 않았다.

하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내 시선만큼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죽음을 포기한 여행자들은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했어요.

과거나라도, 죽음나라도, 헌나라도, 새나라도 그들이 진짜 원하는 곳은 아니었거든요.


그러다 알게 되었어요. 바로, ‘내나라’라는 곳을요.


그곳은 '나의, 나에 의한, 나를 위한'나라였어요.

잘 살고 못 살고의 기준을 내가 정하고,

그 기준조차 나를 해친다면 기꺼이 버리는 곳이었죠.


그렇다고 제멋대로 살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어요.

오히려 나를 존중하며 생긴 여유가,

타인을 더 깊이 존중하고 배려할 수 있게 해주었거든요.


‘내나라’는 '진짜나'가 되어야만 갈 수 있는 곳이었어요.

그리고 오직, 자기 자신만이 찾을 수 있었죠.


여행자들은 서로의 앞날을 응원하며 헤어졌어요.

그리고 각자의 ‘내나라’를 향해 다시 힘찬 발걸음을 내디뎠답니다.


어느덧,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사랑할 줄 아는 '진짜나'가 된 채로요.



"다녀왔습니다."


집에 들어서며, 내가 힘찬 목소리로 인사했다. 하지만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저 왔어요."


여전히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 모두 출근했을 시간이란 사실이 떠올랐다.

게다가 내 방문은 집을 나설 때 그대로, 굳게 닫혀 있었다. 가족들은 내가 집을 비운 사실조차 전혀 모르는 것이다. 어쩐지 마음 한켠이 허전하고 쓸쓸하게 느껴졌다.

오랜만에 집 안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어딘가 새삼 달라 보였다. 익숙한 듯 하면서도 낯설고, 생소하게 느껴졌다. 가구 배치나 물건이 새로 바뀐 것 같다가도, 원래 이랬던가 싶어 헷갈렸다. 구석구석, 가족들의 손때 묻은 흔적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서 그들의 온기가 느껴졌다. 그들이 너무 보고 싶었다.

집에 오자 모든 긴장이 풀리면서, 그동안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내 방으로 가 침대 위로 다이빙하듯 누웠다. 두리번거리며 방을 살펴보았다. 새삼 방이 너무 작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오랜 시간 여기서만 갇혀 지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한때는 날 지켜주는 방공호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산 채로 누워있는 무덤이었다.

눈꺼풀이 점점 무겁게 내려앉았다. 눈이 자꾸만 스르르 감기더니,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

죽음을 달라. 죽음을 달라.

우리에게 죽음을 달라!


피켓을 들고 시위하는 사람들이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고 있었다. 경찰들이 방패를 들고 양 옆에 죽 나열해 있었다. 경찰과 시위대 사이에 신경전이 오갔다. 그때, 하늘에서 종이가루가 쏟아지며 허공에 흩날렸고, 이내 바닥을 뒤덮었다. 사람들은 그 가루를 잡으려고 펄쩍펄쩍 뛰어다녔고, 옆사람과 실랑이를 하다 격렬한 몸싸움까지 벌였다.


향수 아저씨가 거대한 커피 잔을 타고 기어오르고 있었다. 커피 잔 안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뜨거운 커피가 담겨 있었다. 사람들이 다 같이 아저씨를 말리느라 한바탕 실랑이가 벌어졌다. 나는 아저씨의 다리를 꽉 붙잡고 당기다, 발길질에 나동그라졌다. 그러나 다시 매달렸고, 이번엔 다리를 꽉 깨물었다. 그때, 누군가의 신고를 받은 듯, 조각 케이크에 꽂힌 숟가락과 포크가 사이렌을 울리며 출동했다. 케이크 위 체리가 번쩍번쩍, 경광등처럼 깜빡였다. 그러자 향수 아저씨는 그 자리에 주저앉더니, 갑자기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암석이 지구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암석을 폭파하고 지구를 지키라는 미션을 부여받은 우리는, 우주선이 발사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5, 4, 3, 2 ,1.”

그렇게 힘차게 쏘아올려져 우주를 향해 날아가는데, 난데없이 딸깍딸깍 마우스 클릭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더니 갑자기 좌석이 뒤로 눕혀지며 우주선의 천장이 열렸고, 눈앞에 쏟아질 것만 같은 무수한 별들이 나타났다.


우리의 몸이 모두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그러다 하늘 위로 두둥실 떠올랐다. 바람이 잔뜩 들어간 몸은 옷이 꽉 조이고, 꼭 터질 것만 같았다. 그 모습이 너무 웃겨 우린 서로를 보고,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러다, 칼의 몸이 빠르게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본 우린 눈물까지 흘리며 자지러졌다. 특히 챠키 언니는 꽉 조이는 노란 원피스를 입고, 숨 넘어갈 듯이 웃고 있었다.

-


몸이 움찔하더니 눈이 번쩍 떠졌다. 사방은 깜깜했고, 문 밖에선 사람들이 깔깔거리며 웃는 TV 소리가 들려왔다. 비몽사몽한 가운데, 여기가 어딘지 골똘히 생각했다. 처음엔 죽어서 사후세계에라도 온 줄 알았다. 그러다 내 방인 걸 알고 안도했다. 그러다 왜 죽지 않고 지금 내 방에 있는지, 서서히 하나씩 떠올랐다. 마지막 날 바다에 빠져 죽으려다 마음을 돌린 것. 하지만 계속 바다에 뛰어들려던 향수 아저씨, 그리고 말리려다 일어난 몸싸움,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 파출소에서 받던 조사까지.

이른 오후에 잠들었는데, 어느새 늦은 저녁이 되어 있었다. 한참을 잤는데도, 자도 잔 것 같지가 않았다. 뒤죽박죽 섞인 이상한 꿈에 하도 시달려서, 자면서도 끙끙 앓고 계속 뒤척였었다. 머리는 지끈거리고, 온몸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자고 일어나니 삭신이 더 쑤셨다. 이젠 살짝 몸살기까지 있는 듯 했다.

정신이 좀 들고 보니, 이제는 지난 한달 간의 일들이 꿈처럼 느껴졌다. 몸 곳곳의 멍과 자잘한 상처가 꿈이 아니었음을 일깨워주었다. 문득, 다들 집엔 잘 들어갔을지 궁금해졌다. 그들도 지금쯤 실컷 자고 일어나선,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비몽사몽하고 있을게 뻔했다. 얼빠진 그들의 얼굴을 상상하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아까부터 계속 타는 듯한 갈증이 느껴졌다. 이 순간, 시원한 물 한잔이 너무나 간절했다. 방문 밖 거실에선 TV 소리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결국 무거운 몸을 일으켜 부스스 일어나 손잡이를 돌리고, 문 밖으로 나갔다.


거실에선 부모님이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나는 자연스레 그들을 지나쳐 주방으로 향했다. 그들도 심드렁한 표정으로 계속 TV를 봤다. 정수기 버튼을 누르자 경쾌한 효과음이 들리며, 물줄기가 시원하게 컵 안으로 쏟아졌다. 물이 다 차자마자, 곧장 입으로 가져가 벌컥벌컥 들이켰다. 차가운 물이 목구멍을 지나자, 눈과 머리까지 찌릿찌릿 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 이제야 살 것 같다!"


나도 모르게, 탄성이 절로 튀어나왔다. 그 순간, TV를 보던 엄마와 아빠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로 쏠렸다. 그리고는 무슨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입은 떡 벌린 채 나를 쳐다보았다.

시간이 멈춘 듯, 얼마 간 정적이 흘렀다. 웃고 떠드는 TV 소리만 계속 흘러나올 뿐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순간, 속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울컥, 하고 올라오더니, 멈춰 있던 시간이 땡, 하고 풀려버렸다. 엄마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향해 양팔을 뻗으며 다가오는 모습이 슬로우모션 처럼 보였다. 아빠도 곧 엄마 뒤를 따라 일어나셨다. 나도 마시던 컵을 내려놓고, 부모님에게로 향했다. 우리는 주방과 거실 그 중간 어디쯤에서 만났고, 서로를 얼싸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 아빠 죄송해요. 사실 나 너무 무서웠어. 영영 못 돌아올까봐. 너무 보고 싶었어.”


“괜찮아, 이제 다 괜찮아. 잘했다, 잘했어. 내 새끼 어디 얼굴 한번 보자.”


오랜만에 본 부모님은, 그새 야위고 흰머리와 주름이 부쩍 늘어나 있었다. 거기엔 내가 크게 한몫했음이 분명했다. 크게만 보였던 엄마는 막상 안아보니, 내 품에 쏙 들어올 만큼 작고 연약했다. 나는 그런 엄마 품에 안겨, 서럽게 울었다.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빠도, 조용히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나는 아빠를 향해서도 팔을 뻗었고, 다가온 아빠까지 힘껏 끌어안았다. 뜨거운 눈물이 쉴 새 없이 내 뺨을 타고 흐르며, 두 분의 어깨를 적셨다. 그 눈물에는 반가움, 미안함, 후회스러움, 서러움, 부끄러움, 그리고 무엇보다 기쁨이 담겨 있었다. 내가 삶으로부터 도망친 긴 시간 동안, 가족들은 나 대신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시간동안 나를 포기하지 않고 기다려줬고, 돌아온 나를 기꺼이 받아주었다. 우린 그저 좀 서툴렀을 뿐, 서로를 향한 마음만은 진심이었던 것이다.

부모님 품에 안겨 아기처럼 울며,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이제 두 번 다시, 삶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겠다고. 이젠 내 삶을 살아보겠다고.

그날 우리는, 마치 이산가족이라도 된 듯, 서로의 품에서 펑펑 눈물을 쏟아냈다.


그렇게 눈물의 상봉이 끝나고, 부모님은 장을 보러 급히 마트로 향하셨다. 장을 보고 돌아온 엄마, 아빠의 양손엔 무거운 짐이 한가득 들려 있었다. 마트에 있는 맛있는 음식이란 음식은 싹 쓸어 오신 것 같았다. 엄마는 지치지도 않는지 곧바로 요리를 시작하셨다. 주방은 이내 칙칙 밥하는 소리, 보글보글 찌개 끓는 소리, 치지직 불 위에 고기 굽는 소리로 가득했다. 엄마의 손과 발은 바쁘게 움직였다.

그때, 도어락 소리가 들렸다. 나는 한달음에 현관 앞으로 마중을 나갔고, 문을 열고 들어서던 언니는 나를 보자 화들짝 놀라더니, 반가움에 짧은 탄성을 질렀다. 우리는 서로를 꼭 껴안았다. 언니는 환하게 웃고 있었지만, 눈가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언니와 내가 엄마를 거들려고 했지만, 엄마는 한사코 마다하셨다. 엄마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고, 얼굴엔 잔잔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엄마는 힘들지 않으신 게 아니라

힘든 줄 모르시는 거였다. 오랜만에 본 딸에게 그동안 못 해준 밥을 직접 해 먹이고 싶으셨던 것이다.


치이익-

어느새 밭솥에서 김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오랜만에 온 가족이 모두 모여 식탁에 둘러 앉았다. 식탁 위에는 푸짐한 상이 차려져 있었다. 세상 모든 고기와 채소는 여기 다 모여 있었다. 이게 집밥인지 임금님 수랏상이지 헷갈릴 정도였다. 엄마는 수랏간 최고상궁에라도 빙의되신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짧은 시간에 이 많은 걸 혼자서 다 요리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거기엔 내가 좋아하는 반찬들도 빠짐없이 놓여 있었다. 엄마는 다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넓은 식탁이 모자랄 만큼 음식이 가득했지만, 엄마는 자꾸만 내 쪽으로 반찬을 밀어주셨다.

내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골라내어, 내 앞에 놓인 반찬들과 자리를 바꿔가며. 아빠는 내 쪽으로 쏠린 반찬들을 보시고선 '네 덕분에 이렇게 잘 먹는다'며 껄껄 웃으셨다. 그러다 젓가락으로 집으려던 반찬마저 내 앞으로 옮겨지자 머쓱해하셨다.

맛있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입에선 군침이 흐르고 배에선 꼬르륵 소리가 났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될지 몰라, 젓가락을 집은 손이 한동안 허공을 배회했다. 어느새 식탁 위에선 젓가락과 숟가락이 그릇과 부딪히는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엄마는 내가 잘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시더니, 이 중에 뭐가 제일 맛있냐는 어려운 질문을 던지셨다. 식사를 하면서 가벼운 이야기가 오가고, 실없는 농담에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그렇게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자, 오랜만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잊고 있던 가족의 온기가 잔잔히, 깊숙이 내 마음을 덥혀주었다. 이제야 비로소, 내가 집에 돌아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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