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첫 만남
2년 전 봄 어느 날 민재는 본부장으로부터 호출을 받았다.
“네, 본부장님”
“응 그래. 다른 게 아니고 지금 우리 ABC 프로젝트하는 거 알고 있지? 그거 박 차장이 좀 해줬으면 좋겠다.”
“아 네. 제가요? 최 부장이 하고 있는 것 말씀이십니까?”
“응 지금 최 부장이 하고 있는데 뭐 알겠지만 진척이 너무 느려. 처음 시작이야 할지 말지 반반인 상황이기도 했고 최 부장이 지금 고참 부장 중 하나여서 업무적으로 여유가 있으니 맡긴 거지만 이제 사장님이 본격적으로 드라이브를 하고 계시니 스피드 업 해야지.”
“네 알겠습니다”
“그래 진행하면서 특이사항 있으면 알려주고”
“네 보고 드리겠습니다”
민재는 문을 열고 본부장 방을 나왔고 그로부터 2년째 ABC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그런데 이 최 부장이라는 사람, 참 묘하다.
2. 묘한 사람
그는 일을 하는 듯하지 않는 듯한다. 분명 민재와 프로젝트를 같이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하지 않는다. 가령 무슨 일을 할 때는 요새 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이메일과 보고서는 하지 않고 후배에게 말로 한다. 술자리에서 최 부장이 이런 말을 했다. 이제 정년퇴임까지 얼마 안 남았는데 쓸데없는 것에 연관되어 문제가 생기면 안 되니 메일이나 보고서에 자신들의 흔적을 남겨서 엮이면 안 된다고 한다. 말하는 투가 마치 처세의 달인이 대중에게 강연하는 것과 같은 말투다.
그는 투덜이 스머프 같다. 회의를 할 때 그 누구보다도 후배 상사의 말에 동조하고 추임새도 노련하다. 하지만 회의가 끝나자마자 후배들 앞에서 그 상사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회의 때 최부장의 낸 의견이 회의 참석자들에게 호응을 받지 못해 일종의 화풀이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참고로 그때 최부장의 낸 의견은 내가 들어도 좀 현재 시장 상황과 맞지 않고 최근 트렌드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의 의견 같기는 했다. 아무튼 최 부장은 의견이 다를 경우 회의에서 자신의 의견과 근거를 설명하고 참석자들을 설득하려고 하지 않고 회의가 끝나고 나서 자신의 생각이 맞는데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미성숙하고 경험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투덜거린다. 그것도 꽤 오랜 시간 동안. 앞에서 말한 대로 최 부장은 이제 무언가에 쫓겨서 일을 하지 않아 시간이 많고 뒤에서도 이야기하겠지만 본인의 무료함을 달래려 하는 건지 회의를 찾아다니고 심지어 후배들에게 만들어 달라고 하기도 한다. 본인이 직접 회의 소집을 하지 않는 것은 본인의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직접 회의 세팅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얼마 전에도 최 부장이 회의가 끝내고 강 전무가 잘못 판단하고 있다고 몇십 분 동안 투덜대고 있는데 어느 후배가 ‘그럼 회의 때 한번 다시 말씀해 보세요 부장님’라고 말했더니 ‘아니 뭐 그럴 필요는 없고 말이 그렇다는 거지’ 하고 슬그머니 자리로 돌아가 다시 인터넷 뉴스를 보기 시작한다.
그는 무료하다. 부서원 중에서 가장 늦게 출근을 하고 나서 본인이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시스템을 만져본다. 보통 시스템을 보고 실제 실행 부서에 이 상품 재고가 높다, 판매가 저하된 것 같다 등등의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일이 되는데 최 부장은 그러지 않는다. 보통은 무언가 정기적으로 해야 하는 일을 맡고 싶어 하지 않고 회사 내에 이미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은 정해져 있다. 이론적으로 회사 내 시스템을 보는 어떤 사람도 관련 부서에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고 실제로 한적도 있다. 하지만 최 부장의 메일과 의견을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다. 90%는 이미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 알고 있는 내용이고 10% 모르는 내용을 말을 하더라도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할지 2단계 협의를 해야 하는데 최부장은 거기까지 나가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 그의 의견이 실행이 되는 경우는 없다. 그래서 회사 시스템은 그에게 케이블 티브이 채널 중 하나와 다를 것이 없다. 그 아침 루틴 이후에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어느 당 후보가 어쨌네, 회사 식당 밥이 맛이 없네 등등을 혼잣말하듯 반복하며 퇴근 시간을 기다린다.
그는 사람이 그립다. 먼저 말을 걸지 않으면 그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가끔은 회의를 하고 싶어 한다. 누군가 대화를 하고 싶은 것은 기본적인 것이니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최근 코로나 19 때문에 대면 회의가 사라져서 회의를 하려면 온라인 시스템을 사용해야 하는데 그런 시스템을 다시 배우기는 싫다. 그래서 주변 후배에게 회의를 하자고 구걸(?)을 한다. 이른바 회의 거지로 불려진다. 보직장이 아니기 때문에 지시를 할 수는 없고 서로서로 협의를 하거나 본인이 해야 하는데 본인이 하기 싫은 최부장에게는 남은 방법이 구걸뿐이다. 물론 갓 들어온 신입사원들은 선임부장이 어떤 말을 하면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하지만 회사에 입사한 지 석 달만 지나도 그걸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말이 부장이지 말을 할 때 무안해서 부장님으로 불러주지만 이미 회사 내에서는 모두 님이라고 부르게 된 것도 꽤 오래전 일이다.
그는 자주 잊는다. 상대가 한 말도 자기가 한 말도 회의에서 협의한 내용도 메일을 통해 공유된 내용도. 그래서 주변에 물어보고 또 물어본 사실도 까먹어서 다시 같은 사람에게 같은 내용을 묻기도 한다. 50대부터 생기는 건망증이라고 하기에는 최 부장이 좀 심한 편이긴 하다. 본인도 가끔 머쓱한지 젋었을 때 청춘을 다 회사에 바치고 술을 너무 먹어서 깜박깜박한다고 주변 후배들에게 동정을 구하기도 하지만 막상 그걸 앞에서 당하면 동정심이 잘 생기지 않는다.
그에게 부서는 정말 중요하다. 부서에 속해 있지 않으면 함께 점심을 먹을 상대를 찾기 힘들다. 혼자 밥 먹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여 부서원들 점심 먹으러 갈 때 타이밍을 맞추려고 점심시간 즈음이 되면 가끔씩 고개를 주욱빼고 미어캣처럼 주변을 살핀다. 그리고 부서로 배당되는 회식비로 가끔 부서원들과 고깃집 횟집이라도 갈라치면 며칠 전부터 텐션이 업되어 무엇을 먹겠다, 그 식당은 무슨 음식을 잘한다 등으로 부서원들에게 말을 건다. 희귀하게도 최 부장에게 술 한잔, 밥 한 끼는커녕 커피 한잔도 얻어 마셨다는 후배를 찾을 수가 없다. 예전 최 부장이 저녁을 먹자고 하면 회의비를 통한 회식이었고 출장을 갈 때는 회사에 품의를 쓰기도 했다. 물론 본인은 쓰지 않고 후배 사원에게 써달라고 했지만. 그래서 한 후배 사원이 난 안 먹을 테니 안 쓰겠다 출장을 가지만 하지도 않을 거래선과의 저녁식사를 핑계로 품의를 쓸 수 없다 먹고 싶으면 최 부장이 쓰시라 라고 후배가 흥분하여 목소리가 커져 잠시 사무실이 시끄러워지고 최 부장 얼굴이 벌게진 적이 있었다.
무엇보다 그에게서 가장 큰 특징은 바로 물타기이다. 물타기는 최부장의 유행어이다. 일종의 ‘거시기’, ‘따봉’ 같은 느낌이다. 설명하기 힘들고 기억이 나지 않으면 상대에게 ‘에이 물타기 하지 말고’라고 뜬금없이 말이 넘어간다. 맥락도 없고 앞뒤가 연결되지도 않는다. 그리고 투덜이 스머프와 연결되어 항상 정치인부터 회사 사장, 그리고 동료, 후배에 이르기까지 본인과 마찰이 생기는 사람에게는 ‘물타기 하지 마라’라고 말한다. 안타까운 것은 구체적으로 뭘 반박하거나 설득하지 못하고 ‘물타기 하지 말고’, ‘물타기 하면 안 되지’만 반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최부장의 벌 명은 “프로 서퍼(suffer)”다. 국대 선수처럼 파도를 잘 탄다고.
3. 공존의 방법
회사 내에 최 부장과 같이 소위 말하는 고참 부장들은 몇 명 있다. 이 사람들의 나이는 대개 53~58세 사이이고 부장이라는 직함 외에 팀장 같은 조직장이나 프로젝트 리더 같은 보직은 없다. 인사팀에서 매년 출생 연도 몇 년까지는 보직장을 시키지 말라는 가이드가 나온다는 소문도 있기도 하고 그래서 팀장 등 보직장 들은 거의 이 고참부장들 보다 어린 후배들이 맡고 있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현재 그 부장들은 일반 사원들에 비해 현저히 업무량이 적다. 그래서 혹자는 회사에서 노동부 눈치를 보느라 인력들 중 일정 비중을 정년까지 유지하기 위해 그 사람들을 안 건드린다 하기도 하고 개별적으로 누구의 빽이 있어서 그렇게 노터치로 회사를 다니고 있다는 얘기도 있다.
아무튼 민재에게 종종 나이 어린 후배 사원들이 면담을 요청하면서 물어볼 때가 있다.
‘최 부장님은 왜 일을 안 하세요?’,
‘최 부장님은 같은 부서인데 왜 이번 하반기 전략 보고서에 아무 일도 안 하세요?’,
‘최 부장님은 누구 빽이 있으신 거에요?’
민재는 솔직히 어떻게 답을 해주어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응 뭐 그렇지.’, ‘응 그러려니 해’, ‘나도 잘 모르겠다 야’ 등등 후배들에게 그다지 만족스러운 답을 주지 못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메일 하나를 보게 되었다. 정기적으로 공유되는 회사 부서별 인원별 주요 업무가 정리된 파일이었다. 민재는 이 파일을 그다지 자시세 본 적이 없다. 보더라도 같은 본부 내 옆 부서 정도만 보고 그 외에는 사실 관심 밖이었다. 그런데 그 날은 우연히 옆 본부의 sheet를 열었다. 마우스를 잘못 조작해서 열렸는데 그 안에서 익숙한 이름을 보게 된다. ‘강 부장’ 강 부장은 꽤 오래전에 민재와 잠시 업무 때문에 알게 되었는데 대표이사와 동갑이라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연차가 매우 높은 부장이다. 그런데 강 부장의 업무 기술을 보니 중남미에 있는 작은 국가 담당으로 되어 있었다. 물론 부장이라는 직급이 보통 큰 국가를 맡는 게 보통이나 아까 언급한 선임부장 그룹은 그 원칙과는 조금 다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민재는 궁금해서 그 본부에 있는 동기에게 강 부장에게 대해서 물어보았다.
“어, 강 부장님 일은 하지. 국가 담당이 국가가 크던 작던 하는 일은 같잖아. 자잘한 시스템 업무에서 법인 연락 일까지 그런 거 다 강 부장님이 해. 시스템 같은 거 모르면 주변 젊은 후배들에게 물어보시고 잘 못하시면 대신해드리기도 하지만 어쨌든 1차적으로는 본인이 하려고 하시지. 그리고 뭐 작은 국가니까 부수적으로 떨어지는 보고 서니 회의 자료니 이런 건 없으셔서 나름 워라밸도 괜찮으신 것 같고. 그리고 가끔 후배들이 예전에 있었던 일을 물어보기도 하고 또 강 부장님이 후배들이 사달라고 하면 자비로 커피나 맥주 한잔씩 사시기도 하시지. 본인이 먼저 회식하자고는 안 하시고 꼰대 소리 들을까 봐. 아무튼 입은 무겁게 지갑은 가볍게 하시지. 사실 연차 때문에 강 부장님 연봉이 부서장 빼고는 제일 높을 텐데 연봉에 비해서 비즈니스적으로야 충분히 일하고 있다고 하기는 애매한 것도 있지만 그래도 부서원들한테 그렇게 크게 이슈 없이 나름 잘 지내시고 공헌도 하고 계신다고 볼 수 있으니 절반의 성공이라고나 할까”
그러네, 그렇게 살고 계셨네. 시스템과 규정이 완벽할 수 없으니 결국 나머지는 사람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