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재는 최근 회사의 파워게임에서 밀렸다. 민재가 더 어렸을 때 그런 사람들을 보면 좀 잘하지 왜 밀렸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민재 스스로가 그런 위치로 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민재는 그런 생각을 한 자신에 대한 일종의 벌이라고도 생각했다.
인생에 밸런스라는 것이 있듯이 파워게임에 밀린 만큼 한편으론 업무가 줄어 회사에 있는 동안 개인시간이 늘었다. 불과 지난달까지 하루에 4~5개의 회의로 출근부터 퇴근까지 시간이 눈깜박할 사이에 지났었는데 지금은 회의는 일주일에 한 번정도 하는 부서 전체 회의 빼고는 민재를 찾는 회의는 없었다.
오후 3시가 되면 민재가 그날 해야할 왠만한 일은 다 끝났다. 주 52시간제도 있고 상사들 눈치가 있어서 6시까지는 있어야 하는데 일을 달라고 해도 주지 않으니 이것도 민재에게 참 곤욕이었다.
그래서 민재가 생각해 낸 것이 산책이었다. 사무실에서 멍하니 모니터를 보는 것도 한계가 있었고 의자에 오래 앉아 있으면 허리도 아팠다. 민재는 평소에 절대 가지 않던 회사의 이곳 저곳을 갔는데 몇 십년을 일했어도 회사에 이런 곳이 있으리라고는 상상을 못했을 정도로 의외의 장소들이 많았다.
건물 사이의 아담한 벤치와 통로 사이 경관이 좋은 창이 있는 복도, 그리고 평소 엘리베이터엘 이용하느라 보지못했던 계단들도 민재에게는 새로웠다. 이런 시간이 하루, 이틀, 일주일, 한달이 지났다.
오늘도 오후가 되자 민재는 의자를 밀어 놓고 걷기 시작했다. 정원, 복도, 계단 벌써 익숙해진 곳들을 천천히 보면서 걸었다. 그리고 그 남자도 만났다. 머리가 약간 벗겨지고 안경을 쓴 착한 인상의 남자였다. 민재보다는 나이가 조금 더 많은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남자는 민재가 가끔 다른 시간에 산책을 할때도 10번 중에 6~7번은 만났다. 그리고 어느날 생각해 보니 예전에도 미팅을 위해 다른 곳으로 이동하다가 본적이 있는 것 같았다. 멀리서 그 남자를 보면 민재는 고개를 숙이고 빨리 지나갔다. 왠지 그 남자가 민재에게 인사를 걸것만 같아 불안했다. 민재나 그 남자나 이 회사에서 Main stream이 아닌 아웃 사이더지만 민재보다 훨씬 더 기간이 길었던 그 남자와 민재는 더 가까워 지고 싶지 않았다. 왠지 민재는 그 남자에게 인사를 하고 가까워지면 아웃사이더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 것 같았다. 민재는 아웃사이더를 벗어날 꿈을 아직 버리지 않았다. Main stream으로 다시 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민재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그 사내에게 미안했고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언젠가는 이런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있을까, 떨쳐 버리지 못해도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있을까’
문득 걸어오던 복도를 돌아보니 복도에는 그 사내와 민재외에도 6~7명 정도 되는 남자와 여자가 민재와 같이 고개를 숙이고 걷고 있었다. 그리고 문득 민재는 깨달았다. 그 사람들도 일주일에 세네번씩은 비슷한 시간 비슷한 장소에서 마주치고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