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닝을 처음 시작한 26살에, 나는 5:40 페이스였습니다.
'페이스'란 1km라는 거리를 얼마의 시간 안에 달리는지, 속도를 표현하는 러너들의 표현입니다.
'꽤 잘 달리네.'라는 칭찬을 들으며 5:40 페이스로 달리던 26살의 초보 러너는, 그저 빨리 달리는 것만이 중요했습니다. 5km를 달리든 10km를 달리든 5:40이라는 속도로, 혹은 더 빨리 달리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다 보니 러닝을 하는 동안 시선은 스마트폰 러닝 애플리케이션 화면에만 갇혀있었습니다. 실시간으로 반영되는 거리와 속도, '페이스'를 나타내는 숫자만 바라보며 뛰었습니다. 그 숫자가 5:40보다 1,2초라도 늘어나면 조바심을 내며 발을 빨리 놀렸습니다.
숨이 가빠 복부가 아파오는 것도 무시하고 달리곤, 목표한 거리에 도달하면 그 자리에서 멈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해야 할 일을 마쳤다는 만족감만 가지고요.
그 무렵, 나의 삶도 나의 달리기를 닮아 있었습니다. 얼마나 빨리 일을 해내야 하는지에만 집중했었죠.
오늘 당장 끝내야 하는 일.
이번 주에 해야 할 일.
이번 프로젝트.
그러다 보니 오늘 하루. 이번 주. 이번 프로젝트. 단위로 삶이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오늘의 업무가 잘 풀리지 않으면 하루 종일 속상했고, 프로젝트 결과에 따라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기도 세상이 끝날 것같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 무렵에 이뤄낸 것들이 많습니다. 어디 가서 n연차 마케터라고 부끄럽지 않게 말할 수 있는 역량이 쌓였고, 누구든 들으면 알만한 캠페인들도 몇몇 진행했습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너무도 즐겁고 벅찬 경험들이었지만, 다시 그렇게 하라고 하면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지금, 33살의 나는 6:15 페이스로 달립니다. 이제는 5:40 페이스로는 달릴 수도 없고 달리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 덕분에,
5:40 페이스로 달렸을 때엔 러닝 애플리케이션에만 가둬두던 시선을 거두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게 되었어요. 한강의 물살도 보고 바람결에 흔들리는 나뭇잎도 보고 저 건너편에서 산책하는 강아지와도 눈인사하고.
마찬가지로 일에 있어서도 페이스를 조금 늦춰보니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속도만이 중요했던 '일이라는 트랙'에서 벗어나니, 주변에 시선을 둘 만한 더 중요한 것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얼마나 빨리, 많은 일을 해내는지보다는 일하는 나의 마음을 돌보고, 그동안 무심했던 주변 사람을 챙기고, 업무 외적으로 사이드 프로젝트를 시도하며 새로운 즐거움을 찾습니다.
달리지 않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나태하게 살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속도 말고 다른 것을 보며 달리고 싶어 졌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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