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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환 Jan 13. 2019

허생원과 라보

라보 이야기(1) /목수J 작가K(8회)

“이놈을 폐차시키는 날엔 울지도 몰라.”

J가 자신의 가구운송용 라보에게

갖고 있는 애착은

‘메밀꽃 필 무렵’의 허생원을 연상시킨다.

허생원은 자신의 나귀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끼고 마치 자신의 분신처럼 대하는데,

J가 라보를 대하는 태도가

딱 그랬다.

그렇다고 라보에게 애칭을 붙인다든가

그런 짓은 하지 않았는데

내 생각에 그건

라보가 지금의 이름만으로도

훌륭하게 느껴졌기 때문인 것 같았다.

‘-보’는 실제로 ‘울보’, ‘먹보’에서처럼

특정한 행위의 특성을 가진 사람을 뜻하는 접미사다.

그럼 어떤 행위를 하느냐...

라보는

(labor)을 한다.


J가 ‘라보’라는 이름을

다른 애칭으로 바꾸고 싶었을 리 없다.


인간 아닌 무언가에 이름을 붙인다는 것.

요새는 어른들도 하는 귀여운 짓 정도로 해석되고

너도나도 (아이들을)따라하는 일이 됐지만

시작은 동물에서 온 게 아닌가 싶다.


가축이든 반려동물이든 아이들은 이름을 묻는다

만약 없다면 붙이고 싶어한다.

이것은 아이들이 그들을 만나는 즉시(시점이 중요하다!)

인간과 동등한 지위에

그들을 올려놓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른들의 ‘놀이’와는 차원이 다른 일이다.


J는 반려동물 반대론자다.(‘론자’까지는 아니고, 반대한다.)

가장 큰 이유는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는 사실 때문이다.

“왜 그게 걔네들을 위한 일이라는 거야?

가두는 게? 먹이를 주는 게? 사랑해주는 게?

어처구니가 없지, 정말.”


우리집에선 고양이 두 마리를 키운다...

유기되어 장마철 어느 공장 수로에서 발견된

터키시앙고라 어미와 새끼 한 마리다...

그건 됐고.


J에게 라보는 반려동물보다는 가축에 가깝다.

가축에는 좀처럼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가축에 이름을 붙였다가

불행을 맛보는 아이들의 이야기는 세상에 차고 넘친다.

가축은

인간이 그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주기 위해

데리고 사는 게 아니라,

그저

인간과 함께 산다.


일이 있으면 돕고

가진 걸 나누어 먹으며


행불행을 함께하고

처지를 함께한다.


J에게 라보는 그런 존재인 듯하다.

그는 13년 된 라보가

좀더 오래 버텨주길

그리하여 새것을 사야 하는 부담을 좀더 오래 유예시켜주기를,

또 이제는 더 이상 생산되지 않는 지금 이 모델의 라보,

그동안 자신의 근육과 신경의 연장인 듯

한몸처럼 되어버린 지금의 라보와

더 오랫동안 함께 일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며

하루하루 라보에 올라탄다.

그래서 라보는

허생원의 나귀와 다를 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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