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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락 한방현숙 May 15. 2017

녹음이 우거진 자리 따라 여행

대전 계룡산/장태산과 무주 덕유산/적상산 여행

 드디어 지난해부터 설레던 5월이 되었다.

 황금연휴로 기대되던 올 5월은 장미 대선과 이어져 더 들뜬 분위기를 만들었다. 4월 중순경 오늘의 여행을 계획하였다. 늘 이맘때면 아이들의 시험이 끝난 여유로운 때라 보통 가족여행을 다녀왔었다. 이번 여행은 계룡산과 덕유산 일대로 잡았다. 나에게 있어 여행이 즐거운 이유는 여행 /가족 / 맛난 음식, 이 세 조합 앞에서는 언제나 행복한 미소를 지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에도 늘 그렇듯 온 가족이 북적대는 여행을 그렸으나 모든 일들이 계획대로만 이루어지지는 않듯이 변수가 생겼다.

다섯이 아닌 넷이 하는 여행

 한 달 동안 교육실습을 끝낸 큰 아이가 여행일자와 시험이 맞물려 난색을 드러냈을 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미리 시험공부하고 다 함께 여행을 갈 수 있으리라 예상했건만 결국 큰 아이가 여행에 합류하지 못했다. 여행 내내 마음이 불편했던 것은 시험일 이외에 다른 이유로 큰 아이와 안 좋은 언성이 오간 후 내려진 여행 불참 결과였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다섯이 아닌 넷이 여행을 떠났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뒷자리에 셋이 앉아가는 여행비좁고 불편한 이 된 지는 오래되었지만, 큰 아이가 빠져 뒷자리가 좀 더 여유로운 오늘 여행도  마음이 비좁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계룡산 동학사

 인천을 출발하여 계룡산 동학사에 도착하였다. 동학사 가는 길은 음식점들로 초입부터 매우 부산스러웠다. 한참 동안 식당가들로 이어졌으며, 식당 사람들의 호객 행위로 더 정신이 없고 산만하였다. 대웅전 입구에 도착하니, 어제 석가탄신일 행사의 연등들이 꽃처럼 하늘에 퍼져있고, 화창한 연등 그림자들이 대웅전 마당에 동그라미 패턴을 그리며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언제나 다시 가 본 절을 찾아가면 느끼는 거지만, 항상 옛 모습이 더 좋구나 하는 생각을 이곳 동학사에서도 해 본다. 절 경내를 가볍게 둘러보고, 대웅전에 불공을 드린 후 다시 차를 타고 갑사로 향했다.

동학사에서 바라 본 하늘
석가탄신일 기념 연등이 화려하게 달려있다.
갑사 가는 길

 계룡산의 등줄기는 공주시, 대전시, 계룡시 등 여러 도시에 걸쳐 있는데, 나는 갑사가 좋았다. 우리 세대 모든 고등학생이 배웠던 수필 ‘갑사 가는 길’과 ‘남매탑’을 떠올리며 걷는 갑사 가는 길은 내가 좋아하는 취향의 녹음이 우거진 산책길이었다. 미세먼지로 가득하다는 햇살 좋은 봄날이었지만, 이런 나무들, 풀숲 사이에서는 마음껏 숨 쉬어도 좋을 듯 몸이 상쾌하고 발걸음은 가벼웠다. 갑사 자연 관찰로를 따라 하루 종일이라도 걷고 싶었으나, 취향이 다른 일행 때문에 살짝 맛만 보고 내려가야 했다. 나와 여행 취향이 거의 비슷한 큰아이가 아주 많이 생각나는 길이었다.

갑사 가는 길
소담스런 길이 이어진 갑사 산책로

 아침 일찍부터 하루 종일 걸었더니 엄청 다리가 아팠다. 아이들은 엄마가 또 시험 후 극기 훈련을 시킨다며 매년 그렇듯 웃으며 투덜거렸다. 숙소가 있는 대전으로 돌아가 어서 뜨거운 온천물에 몸을 담그고 싶었다.

공주 석장리 구석기 축제

 공주에서 대전으로 서둘러 넘어오는 길에 뜻하지 않은 행사 장소에 내리게 되었는데 바로 ‘ 2017 공주 석장리 구석기 축제’ 행사장이었다. ‘경기 연천 전곡리 충남 공주 석장리 함북 웅기 굴포리~’ 주입식 암기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내가 처음 스스로 공부라는 것을 하게 된 계기가 바로 6학년 때 역사를 배우면서 생겼는데, 그때 한창 유행하던 팝송에 이 가사를 붙여 나름 창의적인 방법으로 외우던 기억이 아직도 기특해서 좋다. 왜냐하면 이때부터 공부를 하고 시험을 보면 점수가 좋게 나온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호피 복장을 한 원시인들이 돌아다니고, 불을 피워 먹거리를 구워 먹는 듯 구석기시대를 재현했는데 현금 자동인출기 옆에서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원시인들이 셀카를 찍고 있다.ㅎㅎ
구석기 시대에도 현금은 필요하다. ㅎㅎ
대전 유성 호텔과 족욕 체험

 100년이나 더 되었다는 유성온천 숙소에 묵었다. 숙소 근처에 우연히 들른 낙지 전문 식당도 깔끔한 손맛 밑반찬과 통통한 낙지로 우리들을 기쁘게 했고, 때마침 일부러 찾아와 피로 해소에 좋다며 여행용 팩과 파스를 건네고 간 지인의 친절함도 우리를 기쁘게 했다.

 아침에 숙소를 나와 지인이 추천해 준 ‘대전 족욕체험장’에 들렀다. 아침에 온천욕을 했기 때문에 별 기대 없이 들른 곳인데 족욕을 마친 후 느끼는 가벼움과 상쾌함이 ‘살고 싶은 대전’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았다. 사계절 무료로 운영되며, 천연 온천수로 수질 관리도 깨끗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장태산 휴양림

 ‘메타세쿼이아 숲으로 유명하다는 ‘장태산 휴양림’은 하루 종일이라도 숲 속에 누워 새소리 들으며 맘껏 늘어지고 싶은 아름다운 숲이었다.

 주차장 작은 모퉁이에서도 정호승 시인의 시가 우리를 반기더니, 휴양림 올라가는 곳곳마다 아름다운 시와 감동적인 글귀들이 산책길에 감동을 더해 주었다. 특히 큰아이에 대한 찜찜한 마음을 되돌아보게 하는 글귀 앞에서는 한참 동안 머물러 있어야 했다.

나를 깨우는 좋은 글귀들

 집집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첫째 아이의 공통된 이야기들이 있다. 부모로서 자식으로서 첫 경험으로 만나 인연을 맺어서 어쩔 수 없는 시행착오 속의 육아가 필수적이기 때문에 늘 미안한 마음이 있으면서도, 사랑 표현이 쉽지 않다. 우리 집 큰아이는 매우 활동적이고 씩씩하면서도, 속마음이 여리고 감수성이 풍부한 아이이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는 끝까지 밀고 가는 성격 때문에 부모랑 자주 부딪힌다. 부모의 기대가 크기 때문에 받는 상처도 크다는 것을 잘 알지만 이상하게 넓은 마음으로 보듬어주지 못했다.

 한참을 화내고 뒤돌아보면 꼭 내 모습을 닮은 딸이 나중에 항상 아프게 느껴진다. 셋째를 낳은 후 많이 반성하고 후회했지만 사소한 것들 앞에서 늘 무너져 난 큰아이에게 보다 까칠하다. 알면서도 져주고 비교육적이지만 한 번쯤은 품어주는 푸근한 사랑을 맘껏 주지 못했다. 전망 좋고 피톤치드가 눈에 보일 것 같은 이 좋은 휴양림 숲에서 이 길을 함께 걷고 싶은 큰아이를 내내 생각했다.

 장태산 휴양림의 전망대까지 올라 밑에 펼쳐진 호수의 아름다움까지 감상한 후 무주로 향했다.

길게 호흡하면 산이 다 들어올 것 같다.
아름답다.
장태산 휴양림 전망대에서 바라 본 풍경
무주 도착
김환태 문학관/최북 미술관

 무주에 도착해서 처음 간 곳은 김환태 문학관과 최북 미술관이었다. 무주가 고향인 두 사람은 각각 1930년대 순수 비평문학의 선구자로, 조선 후기 화단의 거장으로 소개되고 있었다. 문학비평가 김환태의 호가 눌인(訥人)이란다. 30년대 문학비평의 꽃을 피웠던 작가의 호가 ‘語訥하다’의 그 訥人이라니! 그 센스가 남달라 보였다. 김환태는 구인회에 가입하여 문학 비평의 독립성을 주장했는데 소설가로는 김유정을, 시인으로는 정지용을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그 시대 천재들이 그랬듯이 30대에 짧은 생을 마감했지만 6여 년의 짧은 활동에도 불구하고 현대 한국 비평 문학 확립에 많은 기여를 한 비평가이다.

 최북은 기이한 행동과 심한 술버릇으로 유명한 일화를 많이 남긴 천재적인 화가란다. 스스로 애꾸눈이 되어 어느 벼슬아치에게 반항한 행동은 화가로서의 자존심이 얼마나 강했나를 보여주는 듯했다. 자신의 이름 北 자를 둘로 쪼개 七七(칠칠이)라고 자를 지었다니 역시 센스가 남달라 보였다. 그 시대 중인 계급으로서 가난과 신분 차별로 고통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그림 세계에 대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니 역시 대단한 예술가이다.

무주 리조트

 둘째 날 숙소는 무주 리조트에서 묵기로 했다. 길가에 늘어진 스키 관련 가게들을 보며 겨울에는 얼마나 스키로 번성한 곳인지 느끼며 웰컴 센터에 차를 대었다.

 멋들어지게 유럽풍으로 지어진 건물과는 달리 친절하지 못한 남자 직원 때문에 기분이 상했다. 예약할 때도 전화를 제 때 받지 않아 불편했었는데, 직접 오니 왜 그랬는지 이해가 되었다. 가끔 보면 절대 서비스 직종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서비스 직종에서 불편을 초래하는 경우를 본다. 고객에게는 물론이고 본인에게도 절대 득이 되지 않는 일이다. 어서 이직을 함이 옳을 것이다. 다음 날 아침 곤돌라를 타기 위해, 체크 아웃을 하며 다시 들른 웰컴 센터에서의 여자 직원분이 아니었다면 아마 이 불쾌한 감정이 오래갔을 것이다. 여자 직원분의 친절하고 성의 있는 안내로 기분이 좀 나아졌다.

가족호텔과 편의점

 우리는 가족호텔의 들국화동에 묵었는데 모처럼 탁 트인 전망 좋은 숙소에서, 먼 곳 산봉우리 아직 잔설이 남아 있는 것까지 보며 탄성을 지를 수 있었다. 우스운 얘기지만 깊은 계곡이나 산속을 여행하면서 느끼는 것은 어디서든 편의점이 우리를 먼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곳곳에 자리 잡은 편의점 C&U를 보며 드는 씁쓸한 웃음이다. 미처 준비하지 못한 삼겹살까지 편의점에서 사며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곳은 한여름에도 에어컨이 필요 없을 정도로 연중 서늘한 곳이어서 아예 에어컨 설치 자체가 없다. 아직은 추운 밤 날씨에 벌벌 떨면서 쏟아지려는 별을 감상했다. 물론 편의점 가기 위해 나선 길에서이다.

무주 곤돌라 타고 설천봉

 무주 곤돌라를 타려면 아주 많이 기다려야 한다고 하기에 일찍 서둘렀더니 기다림 없이 바로 탑승할 수 있었다. 곤돌라는 겉보기에 많이 낡고 오래되어서 타면서도 살짝 안전이 걱정되기도 했다. 기둥을 지날 때마다 내는 소리에 아이들은 호들갑을 떨며 무섭다고 했지만 대체로 완만한 속도로 편안했다. 왕복 30여분쯤 걸렸다. 산의 정상이라는 곳에는 올라본 적이 없는 내가 덕유산 정상까지 쉽게 오른 것은 순전히 이 곤돌라 덕분이다.

설천봉이 아름답다.
향적봉 정상에서

 곤돌라를 타고 설천봉에 내리니 바람이 강하게 불고, 산 밑과는 기온 차이가 심해 얇은 옷에 오들오들 떨렸다. 향적봉이 바로 눈앞이라고 해도 이 바람을 뚫고 올라가기가 쉽지 않아 잠시 망설였으나, 그래도 아쉬운 마음에 조금씩 나아가다 보니 어느새 정상을 향하는 계단을 밟고 있었다. 계단 사이사이마다 따스한 햇살까지 비추며 언제 그랬나 싶게 아름답고 정겨운 풍경을 보여 주었다. 밑에서만 보고 포기했다면 엄청 후회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이 들며 점점 드는 생각이 ‘이 세상에 장담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것이다. 특별히 좋아하던 것도, 매우 싫어하던 것도 다시 싫어지고 좋아질 수 있다는 것을 점점 느끼며 산다. 눈앞에 지금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저 설천봉에서 몹시 불던 바람이 지금 여기서는 순하고 순한 훈풍이 되었듯이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저 아래 상제루가 아름다운 풍경으로 다가온다.

덕유산 정상 향적봉

 덕유산 정상 향적봉에 올랐다. 역시 정상은 아름다운 곳이다. 해발 1,614m에서 멀리 계룡산, 마이산까지 품어낸다. 사람이 많아 향적봉 이름 앞에서 사진 찍는 데만 한참 걸렸다. 저 아래 설천봉과 상제루가 먼 이야기인 듯 느껴진다. 향적봉 정상도 아름답지만 올라오는 30여분 풍경은 정말 장관이다. 여기에서 백련사까지 이르는 구간이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아름답다는데, 나와 뜻을 같이 할 가족은 없었다. 큰아이가 있었으면 모르지만 말이다.

라제통문

 곤돌라를 타고 다시 내려와 라제통문으로 달렸다. 무주리조트에서 라제통문으로 오는 길이 매우 아름다워 감탄을 하며 왔는데 그 길이 유명한 구천동 계곡 드라이브 길이었다. 1경 라제통문에서 33경 향적봉까지의 무주구천동 33경을 우리는 수심대, 파회, 수성대 등을 거쳐 거꾸로 올라 1경 라제통문에 도착한 것이다. 익히 알듯이 백제와 신라의 국경이었다는 라ㆍ제 통문은 시원한 계곡 소리와 함께 비경을 자랑했다. 김환태 문학관을 들르지 않았으면 그냥 지나칠 뻔한 ‘김환태 문학비’도 거기 있었다. 김환태 수필 중에 ‘적상산의 한 여름밤’이라는 글이 있다는데 이 적상산도 가 볼 요량이 생겼다. 차가 수시로 다니는 길목이지만 우리는 라제통문을 지나며 여기는 백제 땅! 여기는 신라 땅! 하며 실감해 보려 했다. 점심을 먹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니 갈비탕이며 산채 비빔밥 돈가스 등을 파는 식당이 모퉁이 작은 땅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가격에 비해 맛이 별로였다. 하지만 하나밖에 없는 휴게소 및 식당이라 손님들은 끊이지 않고 드나들었다.

반디랜드와 태권도원

 반디랜드와 태권도원을 지나 무주 머루와인동굴을 가 보기로 했다. 곤충 박물관과 천문과학관이 있는 반디랜드는 어린아이들이 있다면 가 볼만 한 곳이나 우리는 내려서 입장권 판매대 주변 마당만 둘러보고 발길을 돌렸다. 태권도원도 주차장까지 갔다가 경기가 없는 썰렁한 분위기만 느끼고 차를 돌려 다시 나왔는데, 그곳에 모노레일이 있어 전망대까지 오를 수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어 많이 아쉬웠다.

무주 머루 와인 동굴

 적상산 500m 중턱에 위치한 무주 머루 와인 동굴은 들어서자마자 한기가 느껴질 온도로 와인 저장고로는 최적이라고 한다. 원래는 무주 수양 발전소 건설 때 굴착기 작업용 터널로 사용하던 곳이라고 하는데, 무주 특색에 맞게 의미 있고 예쁘게 잘 꾸며 놓았다. 산머루 와인 시음대/판매대와 유료 와인 족욕 체험장이 있다. 동굴 안 양쪽에 늘어진 오크통과 와인병들이 인상적이었다. 6가지 이상의 산머루 와인이 있었는데 우리는 달콤한 맛이 가장 덜한 ‘마지크 무주 와인(2만 원)을 하나 샀다. 집에 와 마셔보니 향과 맛이 더 좋았다. 청정 지역 무주에서 생산된 산머루 와인이 보다 더 많이 알려져 번창하기를 기원한다.

적상산사고, 천일폭포, 안국사

 적상산을 더 타고 올라가니 천일폭포와 적상산사고, 안국사를 만날 수 있었다. ‘하늘 아래 단 하나뿐인 폭포이다’해서 붙여진 이름이 천일폭포라 했는데, 우리가 지나갈 때는 가물어서 그런지 사진처럼 시원한 물줄기는 볼 수 없었다. 적상호를 끼고 도니 그 높은 곳에 ‘안국사’가 있었다. 고려 때 사찰인데, 조선 시대에는 적상산사고를 지키기 위한 승병들의 숙소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적상산사고는 5대 사고 (춘추관, 강화도 마니산, 태백산, 오대산, 적상산) 중 하나로 조선왕조실록(세계기록문화유산)과 선원록(왕들의 족보)을 보관하고 있다. 계단을 올라 들여다보니 적상산사고에 신비감과 위엄이 가득 차 있는 듯했다. 적상산 꼭대기 1,034m에 전망대도 있다는데 우리는 보지 못 하고 귀갓길에 올랐다.

녹음이 지는 자리마다

일찌감치 사전 투표를 마치고 떠난 2박 3일의 대전/무주 여행이었다. 일기예보마다 황사와 미세먼지를 걱정했지만 다행히 나무와 숲이 우거진 곳들만 다녀서 자연 속에 푹 젖다 온 상쾌한 기분이다. 아름다운 곳곳마다 자리 잡은 절을 다니며 개인적인 소망은 물론 국가적인 희망도 함께 빌며 불공을 드렸다.

절 마당마다 환했던 연등처럼 우리의 앞날이 밝았으면 좋겠다. 여행 후 일주일이 지난 지금은 다시 또 우리의 희망과 소망들이 새나라에서 펼쳐지려 한다. 원칙이 바로 서고 상식과 정의가 통하는 그런 나라를 빌어 본다.

 계룡산 갑사로 통하는 길과 덕유산 향적봉에서 백련사로 가는 등산길을 남겨 놓고 왔다. 가지 못한 길이 있어, 함께 하지 못 한 큰아이가 있어 아쉬운 여행이었기에 다시 오겠다는 여행 약속도 해 본다.

 토속 신앙과 불교의 성지 계룡산과 덕을 품어 넉넉하다는 덕유산을 다녀왔다.

그 기운 옳게 받아 한 동안 계룡산의 깃대종처럼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넉넉한 덕을 지닌 덕유산처럼 여유로운 사람으로 살고 싶다.
녹음이 우거진 자리마다!
취음이 가득한 곳곳마다!
우리 삶의 생명이 있음을 느끼고 온 5월의 여행이었다.

 여행할 수 있어서, 함께 할 수 있어서 다시 또 진정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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