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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락 한방현숙 Jul 28. 2017

1987 연세 민족/민주의 자리에서 남영동 대공분실까지

전국 국어교사모 답사-이한열의 뜨거운 여름에서 박종철의 그 추운 겨울로!

전국 국어교사 모임  문학 기행

 이글거리는 태양이 정점을 찍는 듯한 순간에 우리는 신촌 연세대 정문에 모여 있었다.

전국 국어 교사 모임 인천지부에서 주최하는 문학 기행 ‘하루愛 전철路’ (윤동주 탄생 100주년, 6월 민주항쟁 30주년 기념 답사)에 참여하는 중이다.

 작열하는 태양 밑에 우리는 녹아릴 듯했으나 오늘의 의미 있는 답사에 대한 기대감으로 꿋꿋하게 땡볕을 물리치고 있었다. 아니 우리는 연세대 정문에 걸려 있는 이한열 열사 30주기 기념 특별 전시회를 알리는 휘장과 그 당시 최루탄으로 피격되었던 장소 위 동판 앞에서 이미 더위 따위는 일상의 사소함으로 물리치고 역사적 엄숙함에 스스로 뜨거워지고 있었다.

연세대 외솔관에서 강의
 연세대 외솔관으로 자리를 옮겨 최현식[인하대 국어교육과 현대시 전공 교수, 87년 당시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학부생] 교수님을 모시고 탄생 100주년을 맞이한 윤동주 시인에 관한 강의를 들었다.

 ‘童心, 순진과 연대의 기원’이라는 제목으로 윤동주의 童詩와 그의 고향 만주, 백석 시인과의 만남 등에 관한 내용이었다. 서울 종로구 청운동에 있는 ‘윤동주 문학관’에서 들은 축구와 바느질도 잘했던 준수한 외모의 윤동주가 다시 떠올랐다.

 연세대 핀슨관 윤동주 기념관

 연세대 핀슨관으로 자리를 옮겨 윤동주 기념관을 둘러보았다. 이 핀슨관은 1922년에 학생 기숙사로 준공되었는데, 당시 연희전문학교 창립 초기에 공이 컸던 핀슨 박사를 기념하기 위해 ‘핀슨홀’로 명명되었다고 한다. 윤동주는 1938년에 입학하여 이 기숙사에서 생활한다. 익숙한 윤동주의 사진들과 작품들, 창작 메모 등이 이 곳에 전시되어 있었는데, 평일에만 개방된다는 것이 아쉬웠다. 부득이 우리가 땡볕 답사를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핀슨관 앞에는 윤동주 시비가 자리하고 있다. 녹음을 뒤로하고 새겨진 서시는 다시금 울려 내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이한열 열사 기념비
198769757922

 녹음 아래 잠시 숨을 고른 뒤 이한열 열사의 기념비가 있는 동산으로 향했다. ‘198769757922’라는 숫자가 커다랗게 다가왔다. ‘1987년 6월 9일에 최루탄을 맞고 7월 5일에 사망했으며 7월 9일에 민주국민장례를 치를 때 향년 22살이었다.’ 그 옆에는 너무나도 잘 알려진 그 날의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1988년 당시 이한열 추모비 제막식에서 박영식 총장은 윤동주가 ‘민족 연세’를 상징한다면, 이한열은 ‘민주 연세’를 상징한다고 말했다 한다. 이 날의 추모비가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금이 가자, 2015년에 다시 세운 것이 지금의 이한열 기념비이다.

 이 동산의 위치는 이한열이 공부했던 백양관(상경대 건물)과 도서관, 집회를 했던 민주광장, 동아리방이 있던 학생회관, 쓰러졌던 정문, 한 달간 누워 있던 병동이 모두 보이는 곳으로 그의 대학 생활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30년 전 6월 9일 그는 전경이 쏜 최루탄에 맞아 쓰러졌다. 그의 죽음은 6월 항쟁의 불씨가 되어 6ㆍ29 선언을 이끌어 냈으며 그 해 겨울에 우리는 16년 만에 대통령을 우리의 손으로 직접 뽑을 수 있게 되었다.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신촌 언저리 어딘가에 있었던 우리의 청춘을 떠올려본다.

 신촌역 8번 출구 주변에는 열사의 어머니가 받은 국가 배상금과 시민 성금 등을 모아 2004년에 세워진 이한열 기념관이 있다. 2014년에 사립박물관으로 새롭게 개관하여 이한열 열사의 유품과 1987년 민주항쟁의 기록을 보존, 연구, 전시하며 민주주의의 역사를 교육하고 있다.

남영동 대공분실

 다음 답사지의 일정이 빠듯하여 서둘러 전철을 타고 남영역으로 향했다.

 남영동 대공분실! 듣기만 해도 오싹한 그 이름. 87년 6월 이한열의 뜨거운 여름에서 87년 1월 박종철의 그 추운 겨울로 거꾸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난 그때 고교 졸업을 기다리던 예비대학생이었다.

 남영동 대공분실 경찰청 인권센터라니! 30년의 세월이 훅 지나간 느낌이다. 답사 안내는 김학규 선생님 [박종철 기념사업회 사무국장, 87년 당시 서울대 국사학과 학부생, 열사의 동기생 친구]께서 맡아 주셨다.

강의실에서 요점을 정리한 짧은 강의를 듣는 동안에도 소름이 끼치고 무서움이 몰려왔다. 중ㆍ고등학교 때 인천사태/광주사태라 배우며 자라난 세대이다. 대학에 가서 진실을 알았을 때, 무지의 몽매가 얼마나 죄스러운 것인가를 알았을 때, 행동하는 양심으로 부끄럽지 않게 살기를 결심했을 때……. 우리는 그렇게 청춘을 맞이하고 결연하게 보냈다.

 건물 밖으로 나와 강사님의 설명을 들으며 하나하나 그때를 따라보았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다니던 1호선 남영역 가까이에서 이런 건물을 맞닥뜨릴 수 있었다는 사실이 소름 끼쳤다. 누군가는 무심히 일상을 걷고 있을 때, 누군가는 여기서 참혹한 고문으로 생사를 헤매고 있었다니…….

 공포를 더 공포스럽게 육중한 철문

 일단 민주인사나 학생들이 이곳으로 잡혀오면 육중한 2중 철문(대문)을 통과해 건물로 들어서게 되는데, 이때 특히 안쪽 철문이 움직일 때 들리는 흡사 탱크가 지나가는 듯한 굉음은 이들을 더 공포에 떨게 했다고 한다. 우연이 아니라 건축주의 재능과 아이디어였다면 그 이름 석자를 우리는 어떻게 기억하고 어떻게 반면교사로 삼을 것인가 마음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연행자 전용 출입구와 나선형 철제 계단

 연행된 이들은 중앙 출입문이 아닌 건물 뒤편 연행자 전용 출입문을 이용하게 되는데, 이 입구는 외부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이 문을 통해 연행자들을 5층 조사실로 끌고 가는데 굳이 좁은 나선형 철제 계단을 밟게 한다. 가뜩이나 극심한 공포로 움츠려 있는 연행자들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이 차가운 계단 위에서 느꼈을 그 마음이 상상되어 소름이 끼치고 아팠다. 잠시 눈을 감아 보았으나 3초 이상을 견디기 힘들었다. 눈을 감으니 방향감도 상실되어 바로 어디론가 튕겨 떨어질 것만 같고, 들리는 쇳소리는 더욱더 공포스러워 바로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5층 고문실 509호, 515호

 좁고 어두운 이 계단을 통과해 겨우 5층에 이르니 지그재그로 설계된 조사실들이 보였다. 당시 모든 조사실에는 CCTV가 있었고 고문용 욕조와 침대 변기 등 인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건물 리모델링으로 아쉽게도 많은 것들이 달라졌지만 박종철 군의 역사적 현장인 509호실은 다행히 당시 모습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반면 김근태 의장이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당했던 좀 더 넓은(전기 고문대를 놓기 위해 넓은 곳이 필요했음 ) 515호실에서는 그때 모습을 하나도 찾을 수 었다. 5층 복도 끄트머리 창문으로 오니 바로 남영역 모습이 무심하게 보였다.

 박종철 기념관

4층에는 박종철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그 시대의 사회적 모습과 ‘박종철 군고 문치 사사건 (1987.01.14.)’이 어떻게 은폐, 사건 축소되고, 기적적으로 알려졌는지가 잘 전시되어 있었다. 1981년 대통령 취임을 축하하는 대기업들의 신문 축하 광고를 보면 그 시대가 얼마나 반민주적이고 정경이 유착된 독재시대였는지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친일 그리고 독재의 역사

 우리는 올라갈 때와는 달리 그때도 있었던 멀쩡한 계단을 밟고 건물 마당으로 내려왔다. 마당에서 올려다본 옛 대공분실은 7층짜리 건물인데, 유독 조사실이 있는 5층 유리창만 기이하게 매우 좁게 달려 있어 우리의 마음을 더 아프게 부끄럽게 하였다.

고문실 5층의 각 창들은 절대로 자신이 어디 있는지 모르도록, 고문의 잔인함이 절대로 밖으로 새지 않도록 오로지 고문자 편의에 맞춰 세심하고 세밀하게 설계되어 있었다.

강사님의 말씀대로 이 곳은 고문의 역사, 친일과 독재의 역사가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 그것이 국민들에게 어떠한 고통과 아픔을 주었는지 또는 현재까지 주고 있는지, 우리는 무엇을 깨닫고 실천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교육의 현장이었다.
 김수근, 김치열, 이근안, 노덕술, 박처원, 강민창까지 유취만년(遺臭萬年)으로 오래 욕될 이름들을 거론해 본다.
건축에 대한 뛰어난 재능을 온전히 사악한 이들의 입맛에 맞게 활용하여 대공분실을 설계한 건축가.
친일파 행적으로 처벌받기는커녕 다시 미군정이나 이승만 정권에 빌붙어 간첩 관련 사건을 조작 (유럽거점 대규모 간첩단을 적발 발표, 서울대 김종길 교수를 간첩으로 몰아 죽게 함)하며 승승장구하다 내무부장관이 되어 이 건물 定礎 표지에 이름을 올린 군사정권 앞잡이.
일제 시대 독립 운동가를 때려잡던 고문 기술을 대물림하며 유신독재와 군사정권을 옹호하는 하수인이 된 고문 기술자들.
역사를 바로 세우라!

 각 분야의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 하나 그것의 사용과 활용에 있어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한다는 것은 죽어 마땅한 잘못이다. 하물며 알면서도, 자신의 부귀영달을 위해 그러했다면, 그러한 인간이 살아갈 수 있도록 허용한 사회였다면 ……. 억울함과 분함이 끓어올랐다.

 이들이 과거 가정과 교실에서 ‘공부만 잘하는 괴물’들로 길러진 것이 아니었나 부모인 나는, 교사인 나는 반성해 본다. 오늘도 신문과 방송을 장식하는 그 똑똑한 이들이 왜 결국 쇠고랑을 차고 오명으로 고개 숙이는지를 우리는 정신 차리고 보아야 한다. 도덕적 품성과 인문학적 소양(인권과 민주주의) 위에 쌓아진 능력만이 더불어 사는 사회, 민주시민으로 사는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아직도 친일과 독재의 대가로 이득을 자손만대 누리며 사는 이들이 대한민국에 있어 우리를 분노하게 한다.    

 아름답게 스러져간, 영원한 우리 민족의 횃불로 타오를 세 청춘들의 이름을 다시 가슴에 새겨 본다.
윤동주, 이한열, 박종철

 미안하고 안타깝고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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