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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락 한방현숙 Mar 20. 2017

5. 내 안에 흐르는 역사의 현장

1987년과 2017년

1987년과 2017년

30년 사이로 역사적 두 사건 앞에 마주했다.

 

 우리의 시간이 곧 역사이고, 역사와 더불어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운명일지라도, 때로는 지극히 개인적으로, 개인의 행복만을 추구하며 살고 싶은 절실함이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행복들이 모여, 사회적 행복이 되기를 소망한다. 최소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둘려 삶 전체가 흔들리는 그런 역사적 인물은 되고 싶지 않은 소심한 마음이 있다.

 

 나는 1967년 11월에 태어났다. 과거 시대에 걸맞게 주민등록 번호는 2년이나 어린 1969년 2월로 시작한다. 10살이 되어도 취학통지서가 나오지 않자 부모님은 나를 빠른 69로 입학시켜 68년생들과 함께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67에 태어나 호적상 69의 나이로 68 아이들과 학교를 다닌 것이다. 복잡하다.

 

 단기 4350년 중에 50년의 세월을 살아 함께 했다. 역사적인 2017년 봄을 맞이하여 불현 듯 우리 사회와 함께 한 나의 역사를 돌아보고 싶었다. 어떤 영향을 받아, 어떻게 성장하고, 어떻게 이 시대 중년의 모습이 되었는지 돌아보는 것도 개인적이지만 나름 의미 있을 것이다.

 

1. 나의 조국 / 국민교육헌장 – 초등(국민)학교 4학년 때 (1978년 즈음)

 내가 기억하는 첫 번째 역사적 장면들은 노래와 함께 떠오른다. 텔레비전만 틀면 애국가와 함께 흘러나오는 노래가 있었다. 대통령이 작사, 작곡을 한 노래란다. 당연히 훌륭한 노래라고 생각했다. 아무 생각 없이 들리는 대로 흥얼거리며 다닌 기억이 난다.

 여자아이들은 고무줄놀이를 즐겨했고, 남자아이들은 고무줄을 끊으러 다니며 놀던 때이다. 즐겨하던 고무줄놀이 노래 가사가 불현 듯 떠오른다.

[ 우리나라 좋은 나라~ 고마우신 우리 대통령~~, 박○○ 대통령~] 우상화에 얼룩진 동심의 세계가 그 시대 모습이었다.

 

 4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 ‘국민교육헌장’을 외워서 검사 받았다. 모범학생이라면 당연히 외워야 덕목이었다. 못 외우는 친구들이 선생님께 혼나는 장면은 그 친구들이 게으르거나 기억력이 나빠서 일뿐 역시 아무 생각 없이 외우고 다녔다.

 10살 남짓한 아이들에게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이 아이들을 책임진 부모님들 대부분은 시간이 흘러 광화문에서 ‘태극기’집회에 참여하게 된다.

 

 2. 10. 26 대통령 서거 - 초등(국민)학교 5학년 때 (1979년)

 세상에 하루아침에 세상이 바뀌었다. 대통령이 죽었단다. 어른들 표정과 신문에서 난리가 났다. 목 놓아 우는 할머니들을 보며 나라에 큰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했다. 어린 마음에 우리도 따라 울었다. 어머니도 잃고, 아버지도 잃고 청와대를 떠나는 3남매는 온 국민을 측은지심에 빠지게 했다. 나도 따라 그들이 불쌍해 보였다.

 

 3. 5. 18 광주 민주화 운동 - 초등(국민)학교 6학년 때 (1980년)

 대통령이 바뀌었다. 원래 대통령은 그렇게 체육관에 모여서 일부 사람들이 뽑는 거로 알았다.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말을 사회 시간에 들었지만 역시 아무 생각이 없었다.

 

 우리는 내내 ‘광주 사태’라는 명칭으로 교육 받았다. 광주에서 불순분자들이 폭동을 일으켜, 임산부들까지 죽이고 아주 난리가 났단다. 도시 전체가 엉망이 되어서 공수부대들이 정리하고 있단다.

 그러나 광주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오빠 친구에게 들은 말은 신문과는 다른 내용이었다. 대학에 입학한 후에야 비밀리에 본 비디오테이프에서 그 진실을 확인하고 경악했다. 광주 시민 시위와 계엄군의 무차별 진압 – 계엄군의 발포와 광주시민 학살 – 광주시민 항쟁으로 이어지는 신군부의 만행은 아직까지도 살아 역사의 뼈아픈 흔적으로 남아 있다.

 반민주주의와 야만적인 군사 독재에 목숨으로 맞선 광주시민들은 민주주의를 세계에 알리고 민주주의의 씨앗을 심었으며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으로 명명되게 하였다. 2011년 5월 영국 멘체스터에서 열린 제 10차 세계기록유산 국제 자문 위원회에서는 ‘ 5.18 민주화 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최종 등재시켰다. 이 날은 5.18 민주화 운동이 광주와 대한민국을 넘어서 국제 사회가 인정하는 역사적 사건이 되는 의미 있는 날이었다.

 

4. 교복 자율화와 프로야구 시작 – 중학교 시절 (1980~1983)

 설레는 마음으로 새 교복을 맞춰 입고 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머리는 귀밑 2Cm라는 단발머리를 반드시 해야만 했다. 앞머리는 한 올의 흘림 없이 모두 넘겨 이마를 드러내야했다. 한 반의 64명이 모두 같은 교복에, 같은 머리를 해야 했다. 교복 착용은 참을 만했으나, 단발머리는 정말 싫었다. 그렇게 중학교 1년의 시간을 보내고 다음 해 어느 겨울날 농구잔치를 보고 있는데, 획기적인 자막이 떴다. ‘전국 중고교 교복 및 두발 자율화’ - 학생들에게는 세상이 뒤집힌 날이었다.

 그 당시 야구에 관심 있는 친구들은 한 개인 선수의 타율을 할, 푼, 리까지 동원하여 외울 정도로 프로 야구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우리 인천에서는 삼미 ‘슈퍼 스타즈’라는 프로 야구팀이 창단되었다.

 

 이것들은 모두 신군부 세력의 핵심 인물로 대통령이 된 사람이 내 놓은 국민유화정책의 일종이었다. 야간통행금지도 이 때 해제되었다.

 

5. KBS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과 아웅산 폭파 테러 사건 – 중학교 3학년 (1983)

 중학교 3학년 어느 더운 여름날부터 눈물과 피 맺힌 사연과 한풀이가 뒤엉킨 만남의 장면을 함께 보며 눈물 흘린 적이 있다. 역사책에서나 보던 전쟁이 일어난 지 30년이 흐른 시점이다. 이 기발한 아이디어로 많은 가족들이 말 그대로 눈물의 상봉을 했었다.

 아웅산 묘역 폭파 테러 사건을 기억하는 것은 그 해 고입시험인 ‘연합고사’에 관련 문제가 출제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사건이 테러냐? 쿠테타냐? 라는 문제를 한참 고민하다 결국은 오답을 골랐다. 시험 문제를 틀려서 기억이 나는 사건이다.

 

6. 6월 민주화 항쟁 (6.29 선언) - 대학교 1학년 (1987년)

 서울대생 박종철이 고문사 했을 때 나는 아직 대학입시의 당락을 결정하지 못 한 고교 졸업예정자였다. 신문에서 그 중요한 사건을 봤으나 중고등학교 내내 주입식 교육에 지친 그냥 생각 없는 고등학생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3월에 대학생이 되었다. 학교는 뜨거웠다. 연일 ‘호헌철폐! 직선제!’를 외치며 선배들은 민주주의를 갈망했다. ‘지랄탄’처럼 연일 정부는 지랄을 해대며 탄압했다. 그러다 6월에 연세대생 이한열이 결국 최루탄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독재타도’를 외치는 학생들의 함성에 시민들의 당연한 외침이 보태졌다. 목숨을 건 투쟁 끝에 시민들은 결국 민주주의를 쟁취했다.

 직선제 개헌 등을 담아 민주화 조치 – 6.29 선언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7. 88 서울 올림픽과 야당의 분열로 아쉬움 가득했던 대통령 선거 – 대학교2학년 (1988)

 민주주의의 승리로 기대 가득한 대통령 선거였으나, 야당 단일화의 실패로 다시 ‘보통사람들의 시대’라는 말뿐인 정부가 출범했다.

 응답하라 시리즈 드라마 덕선이처럼 친구들은 다양한 곳에서 성공적인 올림픽 개최를 위해 봉사 활동을 했다. ‘손에 손잡고~’ 노래가 울려 퍼지고, 굴렁쇠 굴리는 그 넓은 운동장의 소년 1명이 인상적인 개막식이었다.

 

 여기까지가 내가 20대 미성숙한 상태로 경험했던 역사의 현장들이다. 돌아보면 역사적 의미와 그 심각성을 제대로 체화하지 못 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부끄러운 순간들도 허다하다. 그리고 결혼을 하고, 30대가 되고, 40대를 거쳐 이제 50대 인생을 시작하려한다.

 

 그 후에도 국가적 대형사고와 IMF – 30대 (1993~ 1997년)로 기억되는 일들로 이어진다.

 

 문민정부가 출범했으나 여러 가지 국가적 대형 사고에 마음이 불안했다. 구포에서 열차가 뒤집어지더니, 성수대교가 끊어지고,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 몇 년 뒤 일어난 씨랜드 화재 사건은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우리 아이들이 한창 유치원 다닐 때였기 때문이다.

 정부 초에 획기적인 ‘금융실명제’로 출발했으나, 전 국민이 장롱 속 금까지 꺼낼 정도로 힘들었던 ‘IMF 구제금융요청’으로 국가부도 위기의 씁쓸한 상황으로 마무리했다. 이 때 여중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경기은행 등이 무너지는 바람에 이 해에 수학여행을 못 가는 아이들이 많았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2017년 3월 10일! 또 크나큰 역사적 현장에 서 있다. 추운 겨울이 물러났다고, 이제야 봄이 왔다고 기뻐하며 들떠 있기도 하지만, 후에 어떤 역사적 내용으로 오늘을 기억할지 걱정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한 마음이 가득하다.

 30년 만에 다시 또 보여준 민주시민들의 힘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모든 국민들이 새로운 건강하고 공정한 마음으로 이 봄날에 아름다운 벚꽃을 피우기를 소망한다.

 파이팅!

 모두들 참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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