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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락 한방현숙 Mar 22. 2018

영화'코코'-사랑과 추억을 동반한 기억만이...

잊히지 않는다.

'죽음'의 이별

 지난 설 때쯤 제자가 ‘만월당’ 모습이라며 톡으로 사진을 보내왔다. ‘만월당’은 우리 엄마가 잠들어 계신 가족 공원 내의 납골당 이름이다. 어머니 산소에 다녀오는 길에 ‘만월당’을 보고 내가 생각나 안부를 묻는다는 것이다. 마흔 가까이 되는 제자에게 ‘어머님이 젊으신데 너무 일찍 돌아가셨구나!’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담고 있는데, 다음 톡 내용이 나의 마음을 더 쿵하게 떨어뜨렸다.

 제자의 어머니가 최근이 아니라 이미 다섯 살 때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를 만났을 열여섯 살에 이미 그 슬픔을……. 많이 미안하고 많이 아팠다.

어떤 마음으로 그곳을 매번 다녀왔을지, 어린 마음이 얼마나 추웠을지 보내온 ‘만월당’ 사진을 계속 바라보게 되었다.     

제자가 보내 온 사진
 추모

‘추모’한다는 것……. 죽은 이를 그리워하고 잊지 않는다는 것! 우리는 그렇게 우리 마음을 다독이며 죽음과 가까이 가는 것일까? 그리하여 결국 죽음으로 죽은 이를 다시 만나 그리움을, 보고픔을 푸는 것일까?    

금잔화와 함께 한 축복만이 다시 돌아갈 수 있다.
차례와 제사

 대한민국에서 ‘차례와 제사’를 모르고 사는 성인(며느리)이 과연 몇이나 될까 싶지만 내가 그렇다. 어릴 적에는 친정아버지가 둘째이기도 했지만, 온전하지 못 한 가정사로 큰집 제사에 참여한 기억이 손으로 꼽을 정도로 드물었고, 결혼해서도 큰며느리이지만, 시아버님이 둘째라 멀리 안동에 있는 시조부모님 기제사에 주도적 역할을 하지 않아도 되었고, 또 시부모님이 80대로 여전히 건강하신 덕분에 이래저래 ‘차례와 제사’를 모르고 그간 살아왔다.

나의 '차례와 제사'

  그러니 엄마가 돌아가시고 맞은 ‘차례와 제사’가 나의 첫 경험일 터이다. 3년 동안 설, 추석, 기제사를 합해 10번의 ‘차례와 제사’를 치른 것 같다.

♡ 우선 좋다는 남원 물푸레 제기 세트를 거하게 장만했다.
♡ 어동육서, 홍동백서 등 인터넷을 보고 제사상 차리기 지식을 총동원했다.
♡ 차려보니 부족한 느낌이 들어 한번은 절에서 모시기도 했다.
♡ 상에서 그대로 냉동실로 갔다가 버려지는 음식을 보고 회의감도 들었다.
♡ 제사에 관한 안동 스타일과 우리(친정) 집 스타일 차이로 남편과 소란스럽기도 했다.
♡ 며느리로서 의무가 아닌 딸의 순수한 마음으로도 돌아가신 후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어 망설이기도 했다.
♡ 과메기, 갈비, 킹크랩 등 평소 좋아하시던 음식을 올리기도 했다.
♡ 퇴근 후 열심히 정성껏 차린 것에 비해 초라한 상을 보고 속상하기도 했다.
♡ 매번 다음 상은 잘 차릴 것을 약속드렸지만 여전히 지키지 못해 죄스럽기도 했다.  

‘차례와 제사’에 대한 아쉬운 마음과 능력 부족을 느끼며 회의감에 젖었을 때 영화 ‘코코’가 나에게 왔다. 마치 찾고 있던 답이라도 주듯이…….

‘기억하지 않으면 잊힌다.’
‘기억해줘- Remember, me!'
온전히 납득되지 않았던 내 안의 ‘차례와 제사’에 대한 의미를 명료하게 전달해 준 것이다, 놀랍게도 '멕시코'가 배경인 '디즈니 픽사'의 영화가 나에게 나름의 해답을 줄 줄이야!   
가족은 원래 그런 것!
‘가족은 원래 그런 거잖아요? 응원해 주는 거!’

 ‘미구엘’이 이승의 할머니에게도, 저승의 할머니에게도 도망치며 외쳤던 말이다. 이 험한 세상, 차가운 세상에서 나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힘만이 나의 버팀목이라면, 그 일은 가족이 해야 할 첫 번째 일이 아닐까? 부대끼고, 내쳐지고, 초라한 일상 속에서 나의 꿈만이 나를 온전히 지켜낼 수 있다면, 관심을 가지고 응원해야 하는 것이 가족이 아닐까? 나를 응원하고, 지지하고, 사랑했던 가족들! 내가 살아오며 받은 만큼 내 아이들에게, 남편에게 다시 쏟아내고 있는가? ‘미구엘’의 말이 나를 울렸다.

'미구엘'의 허락 받지 못 한 꿈
죽은 자의 날

  결혼, 가부장, 양성평등, 대리 효도 등등으로 현대/현재에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우리 사회의 제례의식과 통하는 것이 ‘죽은 자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저 먼 ‘멕시코’에도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제단에 사진을 올리고, 죽은 자를 추모할 수 있는 물건을 올려 금잔화를 밟고 오는 조상님들을 기다리는 ‘미구엘’ 가족들의 사랑은 아름다웠다.

 상상만으로 그려왔던 저승세계가 ‘미구엘’의 뜻하지 않은 방문으로 눈앞에 구체적으로 펼쳐졌을 때 그 독창적 생각만으로도 감탄이 절로 나왔다.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결국 모두가 기억하지 못할 때, 아무도 그 사람과의 추억을 떠올리지 못할 때 비로소 소멸한다는 설정이 슬프면서도 아프게 다가왔다.
죽은 자들의 세상
사랑과 추억을 동반해야
죽은 자를 살리는 기억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저승세계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진 이승에서의 기억은 사랑과 추억을 동반해야만 한다. 그래서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의 단순한 언급은 기억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이것이 (아직은 ‘헥터’가 자신의 친할아버지인 줄 모를 때 ) 그저 잊혀가는 것이 안타까워 ‘헥터’를 돕기 위해 ‘미구엘’이 제안한 방법이 ‘헥터’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 이유이다.  

 ‘설 /추석’ 때마다 등장하는 ‘명절증후군’이나 ‘시댁 기피증’이 되바라지거나 예의 없는 며느리라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뵌 적도 없는 시댁 조상님 제사에 거저 참여하는 것만도 어색할 텐데, 온갖 차례 준비 가사노동에 종일토록 시달리고 정작으로 차례의식에서는 배제되는 말도 안 되는 부조리한 일에 계속 노출이 된다면 당연히 나타나는 결과가 아닐까?  

‘헥터’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차례를 준비하는 며느리의 마음이 이리 불편하고, 사랑과 추억을 공유하지 못한 단순 노동에 지나지 않는다면 조상님들한테도 기쁨은커녕 아무 소용없는 차례 상이지 않을까?

기억해줘
 우리는 함께 주고받은 사랑의 대가로 서로를 기억하고, 기억의 대가로 서로에게 잊히지 않는 의미로 자리 잡는다. ‘헥터’와 ‘마마 코코’가 그랬듯이…….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며 ‘미구엘’은 사랑의 기억을 되살리려 애쓴다. 그리고 결국 부녀를 이어준다. 치매로 어둠 속에 빠져 버린 ‘마마 코코’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다가가 젊은 아빠 ‘헥터’가 그랬듯이 사랑을 전하고, 추억을 꺼내와 ‘마마 코코’를 살아나게 만든다. 주름으로 가득한 ‘마마 코코’의 얼굴이 너무나 정겹고 낯익어 나도 ‘미구엘’처럼 마구 울어 버렸다.      

아름다운 선물

 어색하고 서툴렀던 ‘차례와 제사’의 의미가 눈물로 다가왔다. 다 알고 있었던 ‘추모’의 의미가 마음으로 다가왔다. 기억한다는 것, 사랑과 추억으로 그리워한다는 것, 그리하여 서로의 마음속에서 영생한다는 것……. 그것이 이승에 있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물이라는 것을 새삼스레 다시 느꼈다. 아무도 가보지 못한 ‘죽은 자의 세상’에 가장 잘 어울리는 아름다움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Remember  me!

 내가 ‘만월당’을 찾는 이유도, 제자가 ‘그곳’에 다녀온 이유도 모두 이 노래에 담겨 있는 것 같다.      

https://youtu.be/UWXwSu6L81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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