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생명체가 살아 숨 쉬는 세상!
농부 철학자 / 철학과 교수
뿌리 깊은 나무/보리출판사(주 30시간 근무 실천)
변산공동체 / 문턱 없는 밥집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 잡초는 없다.
돈은 분과 초 단위로 온 세상을 하루에도 몇십 바퀴, 몇백 바퀴 휘젓고 다닌다. 무한 경쟁이 무한 속도를 동경하게 만든다. 제비와 날벌레의 예에서 보듯이, 속력이 빠른 놈은 느린 놈을 꼼짝 못 하게 잡아서 먹이로 삼을 수 있다. ‘얼른 따라잡고, 얼른 먹어 치우고, 다른 놈이 나를 따라잡아 먹어 치우지 못하게 성큼 앞장서자.’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 듯싶다.
등질화하면 질의 차이가 없기 때문에 양만이 문제가 된다. 그리고 양은 모두 헤아릴 수 있다. 그래서 잘사는 사람, 있는 사람은 돈 많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되고, 못하는 사람, 없는 사람은 돈에 쪼들리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 행복과 불행은 모두 돈에 매인다.
그러나 생명체의 특성은 움직임에 있다. 서로 질이 다른 움직임이 서로 다른 생명체의 특성을 이룬다. 생명의 세계를 기계의 세계로 바꾸고 그 기계의 동원력을 독점하려는 사람들이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사람과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생명계가 기계화된 세상에서 아무도, 심지어 세계 지배를 꿈꾸는 사람마저 살아남을 수 없다.
윤구병 <제비의 속도와 날벌레의 속도>
각자 생긴 대로 행복하게
우리 모두 각자 생긴 대로 존중받으며 살 수 있어야 ‘기쁨’이 생기고, ‘고마움’이 생기는 행복한 삶이 된다는 것이다.
막강 학벌주의 사회
날벌레처럼 날아서는 충분한 먹이도, 마음껏 날만한 공간도, 자신의 불편을 호소할 권리도 확보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만 행복한 우리 사회
그러나 모든 새들이 독수리처럼 빠르게 날 수 없다. 또한 다양한 생명체들의 가치를 ‘빠르다’라는 잣대 하나만으로 매길 수도 없다. 하나의 잣대를 들이대는 세상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불행한 사회인지 우리 모두는 알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빠르다’는 개념은 늘 상대적이어서 평생 우리는 ‘빠르다’에 목말라야 한다. 평생 상대와 비교하면서 나의 ‘빠름’을 확인하고 쉴 새 없이 달려야만 한다. 그 누구도 ‘빠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지금의 행복에서 안주할 수 없다. 그래서 각자 생긴 대로, 각자 생명체의 특성대로 살아야 독수리도 날벌레도 모두 행복할 수 있음을 알고 있지 않는가?
공부 못하는 아이
우리 모두 즐거우면 안 될까?
다양한 행복의 잣대들이 사회적으로 열려있고, 내 안의 행복의 모습 또한 다양해야 나날이 더 행복한 사람들이 많아지지 않을까?
행복해지려고 사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게 사는 것이 먼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