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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락 한방현숙 Jun 01. 2018

공부 못하는 아이

온갖 생명체가 살아 숨 쉬는 세상!

 국어 수업 시간에 아이들과 공부한 수필 한 편이 계속 떠올랐다. ‘윤구병’ 작가의 ‘제비의 속도와 날벌레의 속도’라는 글이다. 얼핏 조합된 단어들만 보면 과학책에 실릴 만한 내용으로 짐작될 수도 있으나 ‘삶의 속도를 늦추고 여유로운 삶을 지향하자.’는 주제를 담고 있는 수필이다.

 작가의 삶을 돌아보니 ‘무한 경쟁과 속도가 지배하는 사회’를 안타까워하며, ‘온갖 생명체가 살아 숨 쉬는 세계’를 꿈꾸는 작가의 이상이 더 진정성을 띠며 다가왔다.

윤구병 농부 철학자 -다음 이미지
 농부 철학자 / 철학과 교수
뿌리 깊은 나무/보리출판사(주 30시간 근무 실천)
변산공동체 / 문턱 없는 밥집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 잡초는 없다.
 돈은 분과 초 단위로 온 세상을 하루에도 몇십 바퀴, 몇백 바퀴 휘젓고 다닌다. 무한 경쟁이 무한 속도를 동경하게 만든다. 제비와 날벌레의 예에서 보듯이, 속력이 빠른 놈은 느린 놈을 꼼짝 못 하게 잡아서 먹이로 삼을 수 있다. ‘얼른 따라잡고, 얼른 먹어 치우고, 다른 놈이 나를 따라잡아 먹어 치우지 못하게 성큼 앞장서자.’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 듯싶다.

 등질화하면 질의 차이가 없기 때문에 양만이 문제가 된다. 그리고 양은 모두 헤아릴 수 있다. 그래서 잘사는 사람, 있는 사람은 돈 많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되고, 못하는 사람, 없는 사람은 돈에 쪼들리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 행복과 불행은 모두 돈에 매인다.

 그러나 생명체의 특성은 움직임에 있다. 서로 질이 다른 움직임이 서로 다른 생명체의 특성을 이룬다. 생명의 세계를 기계의 세계로 바꾸고 그 기계의 동원력을 독점하려는 사람들이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사람과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생명계가 기계화된 세상에서 아무도, 심지어 세계 지배를 꿈꾸는 사람마저 살아남을 수 없다.

윤구병 <제비의 속도와 날벌레의 속도>
윤구병 씨의 첫째 형 이름은 윤일병! 그럼 윤구병씨는 몇 째?
각자 생긴 대로 행복하게

 제비는 제비대로, 날벌레는 날벌레대로 그저 생긴 대로 살아야, 빠른 녀석도 느린 녀석도 나름대로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빠름만 재촉하고 빠름만 중시한다면, 더 빠른 독수리가 나타나면 행복했던 제비도 결국 불행한, 실패한 녀석이 되고 만다.

 우리 모두 각자 생긴 대로 존중받으며 살 수 있어야 ‘기쁨’이 생기고, ‘고마움’이 생기는 행복한 삶이 된다는 것이다.

 학력 위주, 학벌 위주의 대한민국에서 ‘공부를 잘한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에 해당하고, 그런 아이를 자식으로 둔 부모의 기쁨은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커다란 행복일 것이다. 공부를 잘할 뿐만 아니라 알아서 스스로 척척 자기 주도 학습까지 가능한 아이를 가졌다면, 아마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행복을 누리는 학부모가 되지 않을까?

막강 학벌주의 사회

 여기저기서 학력향상 성공 사례들에 솔깃하고, 다른 집 아이의 명문학교 진학을 부러워하고, 사교육비에 허덕이면서도 참아내고, 조여 오는 허리띠에 등골이 휘어져도 우리 부모라는 사람들이 참아내는 이유는 바로 이 사회가 학력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지불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열린사회로 바뀌고, 다양성의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우리 부모는 자식이 독수리처럼 빠르게 날기를 바라고 있다.

 날벌레처럼 날아서는 충분한 먹이도, 마음껏 날만한 공간도, 자신의 불편을 호소할 권리도 확보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연예인에게조차 서울대 학벌이 막강한 뒷배가 되고, 경쟁과 물질만능 세상이 싫어 스스로 시골과 검소와 자연을 선택한 이들에게조차도 명문대 출신이라면 이들의 선택에 설득력이 더 실리는 세상이다.

 가수의 어머니로도 유명한 어느 여성학자가 한 말이 떠오른다. 학자의 세 아들들이 얼마나 예의 바른 지, 얼마나 고운 심성을 지녔는지 아무리 얘기해도 시큰둥하던 이들도 세 아들들이 모두 서울대 출신이라고 말하면 바로 태도가 바뀌며 온갖 칭찬과 인정과 부러움을 호들갑스럽게 늘어놓는다는 것이다.

'상대적'으로만 행복한 우리 사회
 그러나 모든 새들이 독수리처럼 빠르게 날 수 없다. 또한 다양한 생명체들의 가치를 ‘빠르다’라는 잣대 하나만으로 매길 수도 없다. 하나의 잣대를 들이대는 세상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불행한 사회인지 우리 모두는 알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빠르다’는 개념은 늘 상대적이어서 평생 우리는 ‘빠르다’에 목말라야 한다. 평생 상대와 비교하면서 나의 ‘빠름’을 확인하고 쉴 새 없이 달려야만 한다. 그 누구도 ‘빠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지금의 행복에서 안주할 수 없다. 그래서 각자 생긴 대로, 각자 생명체의 특성대로 살아야 독수리도 날벌레도 모두 행복할 수 있음을 알고 있지 않는가?
공부 못하는 아이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대우받은 세상에서 ‘공부 못 하는 아이’들은 부족한 인간이 된다. 잣대가 하나이기 때문에 ‘(인간성 교육이 부족한) 공부 잘하는 아이’와 ‘(인간성 교육을 잘 받아 성장한) 공부 못 하는 아이’와의 구별은 없다. 아니 필요 없다. ‘공부 잘한다’라는 특징이 같아질 때만 그나마 ‘인간성’ 구별이 조금 힘을 받을 뿐이다.

 우리는 누구나 대놓고 이런 세상을 원하지 않는다고 목청을 돋우는데도, 왜 세상은 이렇게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 또한 행복하지 않다고 하는 세상에서 ‘공부 못 하는 아이’들을 저렇게 들러리로 무작정 내몰기만 해야 할까?

 매년 11월 수능 고사장에 나가 시험 감독을 할 때마다 안타까운 장면을 목격한다. 시험 시간 100분 동안 엎드려 자다 지쳐, 다시 고개 들어도 시험이 끝나지 않았음을 찡그린 얼굴로 확인하고, 다시 엎드리는 아이들이 부지기수인 현장에서 어서 그들을 교실 밖으로 내 보내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있다. 나가서 이 긴 시간 동안 뜀박질이든 농구든, 아니면 돌아다니기라도 하든지, 땅이라도 파게 하든지 뭐라도 하게 한다면 최소한 저리 죽은 척 정지된 채로 있지는 않을 것 아닌가? 이 100분의 시간을 위해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을 죽은 체 지내왔을까? 무엇이, 누가 저 아이들을 생긴 대로 살지 못하게 저리 죽여 놓았을까?

 ‘공부 못 하는 아이’들은 초등학교 입학하면서부터 낙인찍힌 채 상처 받으며 자라 왔다. ‘학업성취도 평가’가 전국적으로 기승을 부리던 때, 학교마다 수치화된 서열에서 밀리지 않으려 미도달자 아이들을 달달 볶아야만 할 때 한 아이가 한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특별 보충 수업 대상자라는 말에 아이는

 “ 전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번 남아서 수업했어요. 저 또 남아서 공부해야 해요? 저 정말 집에 가고 싶은데요.”

 라고 말하며 짓던 그 불행한 표정을 잊을 수 없다. 게으름을 피우거나 요행을 바라는 얼굴이 아니었다. 얼마나 시달렸으면 저런 표정이 나올까? 차마 아이에게 강권할 수 없을 정도로 그 힘듦이 전달되었다.

 박완서가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라는 수필로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려한 이유도 우리 사회가 일등 위주의 세상, 성과위주의 세상, 결과 위주의 세상으로 너무 치닫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꼴찌라 하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 포기하지 않는 모습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아름답다.’라고 아무리 가르쳐도 아이들은 곧이듣지 않는다. 마라톤이기에 어쩜 가능한 일이라고 아이들은 이야기한다.

 잘하지 못해서 꼴찌를 하고, 꼴찌를 해서 즐겁지 않은 일에 ‘그래도 참고 최선을 다 해라’는 것은 너무 잔혹한 동화 같은 이야기가 아닐까? ‘공부를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공부를 못 하는 것’에 해당하는 아이들에게는 그저 참고 견디라는 말이 가혹한 ‘노오~력’ 일 수도 있다. 각자의 개성을, 각자의 특기를 학교에서 찾기란 정말 불가능한 일일까? 그림자처럼 앉아 있는 저 아이들에게 기쁜 학교생활을 마련하는 일을 정말 공부에서만 찾아야 할까?

우리 모두 즐거우면 안 될까?

 ‘공부를 못 하는 아이들’은 매 학년, 매 반마다 있다. 그들을 단순히 게으름이나 부적응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교실에서의 모습이 그 아이들이 가진 능력의 전부라고 할 수 없지 않은가? 정말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교실 밖에서도 현저한 능력의 차이를 드러낼까? ‘공부 못 하는 아이’들도 기죽지 않고 다른 분야의 흥미를 찾을 수 있도록 그래서 행복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이 그리 어려운 일일까? ‘나중에 공부보다 훌륭한 너의 장점으로 인해 행복할 수 있을 거야’라고 위로하지 말고, 지금 학교에 함께 행복하면 안 되는 일일까?

 남에게 보여줌으로써 행복을 느끼던 사람들이 내면의 행복에 눈을 돌리고 있다. 사회가 요구하는 일률적인 행복과 성공의 잣대에 지치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 다양한 행복의 조건들에 귀를 기울이고 ‘소확행’이라는 말에 믿음을 보내고 있다. ‘욜로’의 삶조차도 유행처럼 번지다 요즘 그 기세가 꺾이고 있다면 너도 나도 따라 하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은 듯 늘 남을 의식한 선택의 결과가 아닐까 한다. 행복은 다른 이들과의 경쟁이 아니라, 내 안에서 만들어짐을 깨닫고 있지 않은가! 어른들도 한 가지 잣대에 지쳐 이리 힘들다는데, 학교에서 한 가지 잣대로만 치닫는다면 청소년들은 또 얼마나 상처 입고 불행해질까?

 다양한 행복의 잣대들이 사회적으로 열려있고, 내 안의 행복의 모습 또한 다양해야 나날이 더 행복한 사람들이 많아지지 않을까?
 행복해지려고 사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게 사는 것이 먼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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