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뻑 사랑하고 맘껏 안아줄 세월을 잃었기에
남은 사람들-유족
‘법원, 사고 국가 책임……. 위자료 지급 판결’, ‘국가배상, 유족들 상처 치유되길…….’
사랑하는 이를 잃었을 때
‘나는 20여 년의 세월이 걸리더라…….’
♡ 오빠의 죽음을 입에 올리는 데 15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 남들 앞에 원래는 외동이 아니라 오빠가 있었다고 말하는 데 20년이 걸렸다.
♡ 언제나 시간은 오빠가 살아 있던 1995년 12월 이전과 오빠가 사라진 12월 후로 양분되었다.
♡ 23톤 트럭으로 빚어진 사고이기에 ‘23’ 숫자만 봐도 화들짝 긴장되었다.
♡ 25년 가까이 운전을 하면서도 인천 시외로의 운전을 겁내는 이유이기도 하다.
♡ 식구들이 조금만 늦어도 과도하게 불안해하고 새벽에 전화벨이 울리면 거의 경기를 하는 이유이다.
♡ ‘차’가, ‘운전’이 너무 무섭다.
추모
더 함께 할 수 있는 시간들이 있을 수 있었기에, 흠뻑 사랑하고 맘껏 안아줄 시간들을 잃었기에 더 애달파한다.
♡ 허세작렬 있는 척만 하는 실속 없는 허당 우리 오빠!
♡ 야무진 척하는 동생에게 늘 잔소리(볼링장 함께 갔다가 맘껏 수고비를 남발하는 오빠에게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면박 주던 나는 서른 살이 넘어서도 결혼은 안 하고 취미생활만 한다고) 듣던 우리 오빠!
♡ 어려운 형편에 그 시절 ‘금강’ 구두 한번 신어보고, ‘조이너스’ 외투 한번 걸쳐볼 수 있었던 것도 오빠 사랑 덕분이었다.
♡ 허기진 동생에게 호떡을 구워주고, 볶음밥을 맛나게 만들어 주던 우리 오빠!
♡ 등산을 좋아하고, 축구를 잘하고, 장기를 잘 두던, 잡기에 능한 우리 오빠!
♡ 불안한 가정형편 탓에 학업을 다 마치지 못 한 오빠가 대학생인 동생을 바라보는 마음은 어떠했을까?
♡ 여동생 결혼식장에서 눈물을 참지 못 해 세 번이나 화장실에 다녀왔다는 우리 오빠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 오빠는 전기기사 시험에, 나는 임용고시에 합격하여 서로 얼싸안고 환호성을 지르던 그 겨울밤은 어디로 갔을까?
그 후로도 한참을
1995년으로부터 23년이 흘러도
하물며 어린 아들, 딸들을 잃은 부모의 마음은 천 길 만 길 일 것이다. 그 잃어버린 수많은 가능성의 시간들을 떠올릴 때마다 얼마나 가슴을 쓸어내리고, 숨을 토해내며 통곡하겠는가! 애간장을 끊는 그 고통을 무엇으로 막을 수 있겠는가!
오빠!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