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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락 한방현숙 Jul 24. 2018

오빠! 안녕.

흠뻑 사랑하고 맘껏 안아줄 세월을 잃었기에

남은 사람들-유족
 ‘법원, 사고 국가 책임……. 위자료 지급 판결’, ‘국가배상, 유족들 상처 치유되길…….’

 하루 종일(2018.07.20) 실검에 오르내리며 전하는 것은 지금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충격적인, 전 국민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건에 대한 법원 판결 내용이다. 기사 아래 달린 댓글에는 서로의 감정과 주장들을 드러내는 다양한 의견들이 모여 있었다. 돈과 관련된 언급이 있다 보니 물질만능주의의 잣대로만 보아 여전히 유족들 가슴에 상처를 주는 날카로운 말들도 많았다. 이제 4년의 시간이 겨우 흘렀는데…….

사랑하는 이를 잃었을 때

 사랑하는 이를 잃은 아픈 상처는 영원하겠지만 그래도 언제쯤 마음을 가눌 수 있을까?

 ‘나는 20여 년의 세월이 걸리더라…….’

 그래도 조금은 예견했던, 점점 가늘어지고 잦아드는 일상을 함께 하다 맞닥뜨린 엄마의 죽음도 감당할 수 없어 계속 휘청거리고 있는데 전혀 생각지 못 한 오빠 죽음의 비통함과 충격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 오빠의 죽음을 입에 올리는 데 15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 남들 앞에 원래는 외동이 아니라 오빠가 있었다고 말하는 데 20년이 걸렸다.
♡ 언제나 시간은 오빠가 살아 있던 1995년 12월 이전과 오빠가 사라진 12월 후로 양분되었다.
♡ 23톤 트럭으로 빚어진 사고이기에 ‘23’ 숫자만 봐도 화들짝 긴장되었다.
♡ 25년 가까이 운전을 하면서도 인천 시외로의 운전을 겁내는 이유이기도 하다.
♡ 식구들이 조금만 늦어도 과도하게 불안해하고 새벽에 전화벨이 울리면 거의 경기를 하는 이유이다.
♡ ‘차’가, ‘운전’이 너무 무섭다.

 뜻하지 않은 젊은이의 죽음은 한 집안을 망가뜨리기에 충분했다. 엄마는 시름시름 앓으며 온갖 병들을 짊어진 채 스러져갔으며, 후회와 안타까움과 원망이 온 집안을 덮어버렸다. 그리고는 온전한 울부짖음조차 토해내지 못 한 채 노모는 그렇게 아들 곁으로 가 버렸다.

추모

 혼자 남은 나는 아침마다 그리운 이들을 생각한다. 아침 출근 시간, 하루를 시작하는 시동을 걸고 운전대가 움직이면 오빠와 엄마에게 인사를 나눈다. 오롯이 나만 있는 공간에서 그리운 이들에게 집중한다.

 더 함께 할 수 있는 시간들이 있을 수 있었기에, 흠뻑 사랑하고 맘껏 안아줄 시간들을 잃었기에 더 애달파한다.

 1960년 생들에게는 흔하지 않은 단 둘의 남매로 자라 온 우리 오누이는 참 우애가 깊었다. 물론 초등학교 때 하도 심부름만 시키는 오빠에게 대들다 아프게 맞은 기억도 있으나 커가면서 오빠는 늘 나를 위해주는 다정한 오라버니였다.

♡ 허세작렬 있는 척만 하는 실속 없는 허당 우리 오빠!
♡ 야무진 척하는 동생에게 늘 잔소리(볼링장 함께 갔다가 맘껏 수고비를 남발하는 오빠에게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면박 주던 나는 서른 살이 넘어서도  결혼은 안 하고 취미생활만 한다고) 듣던 우리 오빠!
♡ 어려운 형편에 그 시절 ‘금강’ 구두 한번 신어보고, ‘조이너스’ 외투 한번 걸쳐볼 수 있었던 것도 오빠 사랑 덕분이었다.
♡ 허기진 동생에게 호떡을 구워주고, 볶음밥을 맛나게 만들어 주던 우리 오빠!
♡ 등산을 좋아하고, 축구를 잘하고, 장기를 잘 두던, 잡기에 능한 우리 오빠!
♡ 불안한 가정형편 탓에 학업을 다 마치지 못 한 오빠가 대학생인 동생을 바라보는 마음은 어떠했을까?
♡ 여동생 결혼식장에서 눈물을 참지 못 해 세 번이나 화장실에 다녀왔다는 우리 오빠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 오빠는 전기기사 시험에, 나는 임용고시에 합격하여 서로 얼싸안고 환호성을 지르던 그 겨울밤은 어디로 갔을까?

 80년대 후반 변변한 가족 여행 한번, 제대로 된 외식 한번 못 한 시절을 ‘이다음에는…….’이라고 만회할 수 없음이 얼마나 야속한지…….

 오빠가 결혼을 하고 평범한 중년의 가장으로 지금 살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가 ‘오빠’가 아니고, 듣고 싶은 말이 ‘고모’가 아니었을 텐데……. 시누이, 올케 되어 미운 정, 고운 정 쌓아가며 울다가 웃다가 하고 싶은데…….

그 후로도 한참을

 이 모든 평범하고 일상적인 행복이 날아가버렸다.

 오빠가 그렇게 허망하게 가고 나서도 온전히 슬퍼할 겨를이 없었던 것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엄마 때문이었다. 엄마의 온갖 화냄과 슬픔과 분노를 받아내면서도 첫째 아이를 엄마에게 맡긴 이유이기도 했다. 1년에 두 번, 설과 추석에는 마음이 널뛰기를 하였다. 큰며느리로서 시댁에 명절을 쇠러 가는 마음이 늘 차디찬 얼음방석이었다. 혼자 집에 있을 가여운 엄마 생각에 어느 때는 명절 당일에 다시 인천으로 오기도 하고, 배려해 주는 시댁 어른들의 마음을 온전히 받을 수만은 없어 인천으로 서울로 몇 번을 왕복하기도 하였다. 전화를 안 받으면 바로 못된 상상들이 덮쳐와 엄마 집으로 달려가야만 했다. 아들 집이 아닌 사위 집이라는 사실을 당당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세대의 엄마이기에 사소한 일이지만 서러워하고 오해하고 노여워하였다.

1995년으로부터 23년이 흘러도

서로의 아픔을 보듬으며 눈물 없이 ‘오빠’라는 단어를 언급하는 데 15년이 걸렸다. 기나긴  시간 동안 우리는 마치 굳은 맹세라도 한 듯이 시선을 서로 피하며 슬픔을 모른 척해 주었다. 그것은 서로의 상처를 후비는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리고 차츰 상처 위에 세월을 덮고 나서야 서로를 치유해 갈 수 있었다.

 하물며 어린 아들, 딸들을 잃은 부모의 마음은 천 길 만 길 일 것이다. 그 잃어버린 수많은 가능성의 시간들을 떠올릴 때마다 얼마나 가슴을 쓸어내리고, 숨을 토해내며 통곡하겠는가! 애간장을 끊는 그 고통을 무엇으로 막을 수 있겠는가!

 ‘어제저녁 잘 지냈냐고…….’

 ‘우린 이렇게 지내고 있다고…….’

 ‘미안하다고, 그리고 또 미안하다고…….’

 ‘사랑한다고 그래서 고맙다고…….’

 오늘도 부드럽게 아침 인사를 건넨다.

 출근길 차에서 내리면 다시 분주한 일상으로 들어가 아무렇지 않은 듯 하루를 보내고, 피곤한 저녁과 밤을 보내느라 잠시 잊어버린 듯 사라진 사랑들을 아침이면 다시 살려내 안부를 묻고 소식을 전한다.

 통곡의 밤까지 포함해 이러길 23년을 했더니 이렇게 글도 쓰게 되었다.

오빠!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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