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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락 한방현숙 Nov 30. 2018

가을愛 남편과 함께 답사-평창, 강릉, 양양

2018.11.03 (토) - 첫째 날

오늘 답사 일정

오대산 월정사(팔각구층석탑, 석조보살좌상, 월정사 부도) ➜
➜상원사 (관대걸이, 동종, 목조 문수동자 좌상)
➜선교장 (활래정, 열화당, 안채, 행랑채)
➜객사문(강릉 임영관 삼문 )
➜신복사지 (삼층 석탑, 석조보살좌상)
➜굴산사지(당간지주, 승탑)
➜진전사지(삼층석탑, 부도)
2018. 이번 가을 답사는 남편과 함께

 이 가을 어김없이 연락이 왔다. 5년째 함께 하고 있는 ‘인천 답사’ 모임이다. 알림 메시지에는 평창, 강릉, 양양, 인제 등 낯익은 지명들이 가득했다. 이번에는 강원도 일대 답사로 휴가 때 한 번쯤 모두 가봄직한 곳이어서 지나친 떨림은 덜했지만, 이 가을 숨통이 트일 만한 기회이니 당연 가리라 마음먹으며 메시지 창을 닫았다.

 그런데 함께 다니던 지인들이 모두 바쁘거나 또는 다른 일정으로 참가를 못 한다는 연락을 받으니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40여 명 속에서 ‘나 홀로’ 여행을 감당할 수 있을까? 자신이 점점 없어지며 이번 답사는 패스할까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왠지 모를 오기가 발동하여 결정이 쉽지 않았다. 답사 진행 5년 동안 한 차례도 빠짐없이 참여했다는 뿌듯함을 지우고 싶지 않은 개근의 열망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다 ‘남편’을 떠올렸다. 처음 답사 제안을 했을 때,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남편의 목소리는 그다지 반가운 기색이 아니었다. ‘교사’ 모임에 ‘교사’가 아닌 사람으로서 끼기가 좀 부담스럽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우리는 모처럼 단 둘만의 여행이라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토요일 아침 기상 알람을 새벽 4시에 맞춰 놓고 금요일 잠자리에 들었다.

 토요일 새벽 6시에 인천대공원 모임 장소로 40여 명의 답사 참가자가 모여들었다. 총무님의 꼼꼼한 준비와 진행으로 그 새벽에 따뜻한 김밥까지 받아 들고 버스에 올라, 건너 띈 아침잠까지 챙기며 첫 목적지에 도착했다.

토요일 새벽 6시 버스 안과 9시 전나무 숲 길
 오대산 월정사

 오대산 전나무 숲길에 들어서자마자 알싸한 아침 공기가 가슴 깊숙이 들어왔다. 머리가 상쾌해지며 아이들 어린 시절 추억이 떠올랐다. 아이들을 걸려서 이 평창 일대에 자주 놀러 오던 기억이 아련한데, 남편은 그마저 기억이 또렷하지 않는단다. 서로의 기억을 상기시키며, 또는 보완 수정하며 우리는 모처럼 아침 전나무 숲길을 걸었다. 어린아이들 셋을 뒷좌석에 가득 태우고, 힘들지만 많이 웃었던  그때가 그리워진다. 아이들 다 키운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돌아보니 좋은 시절이 아닌 것이 없었다.

평창 오대산 월정사 8각 9층 석탑

 월정사하면 9층 석탑이 자동으로 되 뇌일 정도로 모두 알만한 탑이지만 오늘 새롭게 알게 된 내용도 많았다.

 오대산은 침엽수림이 가득한 곳으로 문수보살의 성산이라 불린다.
 월정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창건했다.  중국 유학 중 자장율사가 산서성 오대산 태화지에서 부처님의 사리와 가사를 받으며 문수보살을 친견했는데 그 후 신라에 와서 오대산을 찾았다 한다.
 오대산 월정사 8각 9층 석탑은 다각다층 석탑으로 고려 초기 10세기경 작품이다. (국보 제48호)
 머리장식은 아랫부분은 동으로, 윗부분은 금동으로 고려시대 금속공예 수법을 알 수 있다.  아래층 기단에는 안상이, 탑신에는 감실이, 각 층 귀마다 청동으로 된 풍경이 달려 있었다.
석탑의 상륜부

 아무것도 모르는 나의 눈에도 아름다워 보였다. 새파란 하늘을 이고 있는 머리 장식은 세월의 흐름을 잊은 듯 기품 있는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단단한 균형미를 잃지 않으며 천여 년을 우뚝 서 있는 석탑이 대견하고 자랑스러웠다.

월정사 석조보살좌상

 석탑 앞의 석조보살좌상은 답사 대장님의 말씀처럼 안타까운 마음 가득했다. 원래 보살좌상은 월정사 성보박물관에 자리를 옮겨 놓았고 지금의 것은 나중에 새로 만들어 놓은 것이라는데, 손에 향로를 들고 꿇어앉아 공양하는 모습이었다고 추측한다고 한다. 검색을 통해 본 사진은 오른쪽 무릎을 꿇고 왼쪽 다리를 세워 공양하는 모습으로 오랜 세월의 흔적이 역력했다. 현재 9층 석탑 앞에 있는 좌상과는 느낌이 전혀 달라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석탑 앞에서 볼 수 없어 참 아까웠다.

월정사 석조보살좌상(보물 제 139호)-다음 이미지
석조보살의 뒷모습의 색감과 자태가 많이 다르다.
맑은 가을, 맑은 물
월정사 부도군

 월정사에서 상원사로 가는 길목은 청명한 하늘빛과 투명한 물소리, 전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선한 공기까지 더해져 말 그대로 ‘와! 좋다’가 저절로 되풀이되는 곳이었다. 신선함에 취해 걷다 보니  어느덧 ‘월정사 부도’군에 와 있다.  여기저기 흩어져서 소나무 둘레를 벗 삼아 자태를 드러내는 부도들을 진지함으로 만나 보았다.

승려들의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두는 곳인 부도는 승려의 무덤이라 할 수 있다.
오대산 상원사

 언제나 이쯤에 오면 상원사는 엄두도 못 내고, 월정사만 둘러보고 이동했었는데, 오늘에야 상원사를 오르나 보다. 물론 버스를 타고 이동을 했지만 처음 가보는 발길이라 무척 설렜다.

 신라 성덕왕이 창건했다는 상원사는 세조가 이곳에 행차했다가 문수보살을 배알한 후 고양이 덕분에 자객으로부터 목숨을 건졌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푸른 하늘을 이고 있는 상원사 문수전
세조와 관련된 일화에 나오는 고양이상-답사 대장님의 설명을 들으니 눈에 들어왔다.
방한암 스님의 살신성인과 지혜로 6.25전쟁 때 불타버릴 뻔한 이 절을 지켜냈다고 한다.
상원사 관대걸이

 상원사 가는 길 초입에서 말년에 피부병으로 고생한 세조가 상원사 앞 계곡에서 목욕을 할 때 갓이나 도포, 관대를 벗어서 걸어놓았다는 관대걸이를 보았다. 답사 아닌 혼자 여행이라면 그냥 스쳤을 곳이었다.

 문수보살을 만나 세조의 피부병이 깨끗이 나았다는 이야기가 신비롭고, 세조가 동자에게 “ 임금의 옥체를 씻었다고 말하지 말라.”는 당부에 동자 역시 “ 문수 동자를 만났다고 말하지 말라.”했다는 이야기가 재치로 가득하다.
상원사 동종

 우리나라 동종 중의 가장 오래된 것으로 한국 종의 형식을 고루 갖췄다 한다. 주조기술과 조각기법이 눈에 뜨일 정도로 우수하다는데, 유리창을 통해 빛의 반사와 함께 볼 수밖에 없어서 많이 아쉬웠다.  

 이곳으로 오는 버스 안에서 답사 대장님이 들려준 ‘상원사 동종’의 소리를 현장에서 다시 간절히 듣고 싶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대장님의 설명 속에서 용뉴, 용통, 앙련, 복련, 연화무늬, 당초무늬 등의 단어를 들을 수 있었고, 종의 몸체는 배가 약간 불룩한 타입이라 하여 또 눈여겨보니 비천상 무늬와 당초무늬도 찾을 수 있었다.

신비로움과 신성함이 가득 느껴졌다.
동종을 대신하여 옆에 작은 크기의 모종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평창 상원사 목조 문수동자 좌상

 천진스러운 미소와 양쪽으로 묶은 머리가 동자상이란 이름을 떠올릴만했다. 나무의 질감을 최대한 살려 조각한 것(국보 제221호)이라 하는데 문외한인 나는 얼핏 보아 나무인지 철인지 분간할 재주가 없었다. 이 동자상에서 많은 복장유물(보물 제793호)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다음 이미지

 상원사를 벗어나는 길 또한 너무 아름다워 카메라에 담기 바빴다. 쌀쌀한 날씨와 청명한 하늘이 오전 내내 나를 상쾌하게 만들어 주었다. 강릉 초당순두부로 유명한 맛집에서 점심을 먹고 선교장으로 향했다.

푸르른 가을이라고 해야할까?
강릉 선교장

 선교장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어쩌자고 어느 대통령의 별장이라는 곳을 떠올렸을까?

 선교장(중요 민속자료 제5호)은 강원도 지역에 남아 있는 가장 품위 있는 사대부 가옥으로 배다리 마을(강릉시에서 경포 쪽으로)이라 불리는 곳에 있기에 선교장(집터가 뱃머리를 연상)이라 이름 지었다 한다. 조선 영조 때 효령대군의 후손인 이내번이 지은 집으로 그 후손이 현재에도 살고 있다. 총 건평 300여 평으로 긴 행랑에 둘러싸인 안채, 사랑채, 동별당, 가묘 등이 있고 문 밖에 연못과 활래정이라는 정자까지 갖춘 최고 상류층 가옥이다. 선교장의 사랑채는 열화당이라 이름 지어졌는데, 용비어천가, 고려사 등 수천 권의 책과 글, 그림 등이 소장되어 있다 한다.
어느 때 영화일까?
행랑채 밖, 대단한 연못 위에 활래정이 있다.
활래정 옆 길에서 시를 읊다.
선교장 정원에 판 인공연못 위에 세운 정자 활래정은 주자의 시 (관서유감) 중 "爲有頭源活水來" 에서 땄다고 한다.
답사를 위해 꼼꼼히 준비해 오신 대장님의 자료에 감탄했다.(활래정과 열화당 유래 시구)
열화당이라는 당호는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에서 따왔다고 한다.
오늘의 음악회 준비 중 - 열화당 '고택 음악회 시리즈'
운치 가득하고 아름답다.
아직 대문 안에 들어가기도 전인데...이리 넓다.
아이들은 우물만으로도 흥미로워 한다.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찾던 사람들이 묵으며 시, 서, 화, 풍류 등으로 문화예술활동을 꽃피웠던 선교장
단아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선교장 여기저기!
현재 사는 사람의 흔적이 보인다.
가을 속에 푹 빠진 선교장
엄청 긴 행랑채가 눈에 띈다.
답사 대장님이 주신 선교장 평면도
강릉 객사문(국보 51호)

 고려시대 관아 건물로 공민왕의 친필인 ‘임영관’이라는 현판이 문루에 걸려있다. 우리가 보러 온 객사문은 강릉 객사의 정문으로 오늘날 관련 건물은 모두 없어지고 객사문만이 강릉경찰서 마당에 남아있는데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의 기와건물이다. 이곳 역시 답사가 아니라면 그냥 지나쳤을 곳일 텐데, 답사 대장님의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탐스러운 기둥이며, 단청 없는 고고한 색감들이 눈에 들어와 감탄스러웠다.

 원기둥의 배흘림은 우리나라의 현존하는 목조건축물 중 가장 뚜렷한 것으로 기둥 중앙부가 가장 굵고 올라갈수록 기둥 상부가 가장 가늘어 약 4치 이상의 차이를 보인다고 한다.
원기둥의 배흘림
아름답다. 멋스럽다.
신복사지 삼층 석탑

 신복사의 옛 터에 남아있는 탑(보물 제87호)이다.

 신복사는 통일신라 때 범일국사(梵日國師)가 창건한 절이다. 신라의 한 처녀가 우물에 비친 햇빛을 보고 그 물을 마신 후 임신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집안사람들이 아이를 내다 버렸으나, 아이의 주위로 빛이 맴돌아 이상하게 여겨 다시 데려와 길렀다. 그 아이 이름을 범(梵)이라 하였는데 범이 출가하여 승려가 된 후 고향에 돌아와 창건한 절이 신복사와 굴산사(掘山寺)라고 한다.
이 탑은 2층의 기단(基壇)을 쌓고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것으로, 각 부분의 모습들이 특이하다.
드물게 온전히 남이있는 머리 장식.
강릉 신복사지 석조보살좌상

 탑의 앞쪽에는 한쪽 무릎을 세우고, 두 손을 받치듯이 들고 있는 석조보살 좌상(보물 제84호)이 있다.

탑신에는 부처의 사리나 불경 등을 모셔두는데, 1층의 몸돌에 이를 안치하는 방인 감실(龕室)모양의 조각이 있다.
듣고 보고 찍고
상원사 석탑,  그 앞의 불상과 비슷한 구조이다.
석조보살상을 쓰다듬고 있는 어린이의 눈길이 눈에 띈다.
향을 피워 재를 올린다.
굴산사지 당간지주
굴산사는 조선 초기에 폐사돤 것으로 추정된다.
굴산사 당간지주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크다.(보물 제 86호)
절에서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 두는데 깃발을 걸어 두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이라 하여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절집의 영역을 표시하는 당간지주
범일국사의 것으로 추정되는 강릉 굴산사지 승탑(보물 제 85호)-예쁘다.
굴산사지 승탑을 보러 오르고 내리는 길가에 들풀과 꽃들이 무성하다.
진전사지 삼층석탑
 둔전리 마을 서북 편에 솟은 관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진전사지 터에 서있다. 신라식 일반형으로 2층 기단을 갖추고 상륜부는 노반석까지만 남아 있고 그 이상은 없어졌다. 노반석은 탑의 최상부 옥개석 위에 놓아 복발/앙화/상륜 등을 받치는 장식이라고 한다.(국보 제122호)

 당시 진전사의 화려했던 모습이 반영되듯 단아한 자태와 더불어 하층 기단에서부터 차례로 비천상, 팔부신중, 사방불 조각이 보인다.

진전사지 도의선사(부도) 탑
도의선사 묘탑(보물 제 439호) -2단의 4각 기단에 8각형의 탑신
 진전 사는 통일신라시대 때 창건된 사찰로 도의선사가 오랫동안(40년) 은거하던 곳이다. 도의선사는 당나라에서 선종을 공부하고 교종 불교가 절대적이던 신라에 선종을 소개한 스님으로, 신라불교가 교종에서 선종으로 교체되는 시기가 이 진전사 터에서 싹텄다고 한다.
하루 답사를 마치며

 어스름 속에서도 아름다운 부도탑을 마주하는 것을 끝으로 오늘의 답사 일정을 정리했다. 새벽부터 총총히 움직인 하루였다. 피곤이 몰려오듯 오늘의 공부들도 묵직하게 다가왔다. 어둠 속에서 불 밝히며 듣는 이 광경이 오래전 경주 감은사지 석탑에서의 신라의 달밤을 떠올리게 하였다. 장소는 바뀌었으나 여전히 아름답고 충만한 답사 저녁시간이 되었다. 아직도 탑이며, 부도며, 기둥이며 보는 눈은 한없이 부족하나 이 답사를 즐기는 것 자체가 의미 있다 여기며 어스름 폐사지터를 내려오고 있었다.

몇 백년 굴산사를 내려다 보고 있었을 굴산사지 승탑 맞은 편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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