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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락 한방현숙 Jun 11. 2019

기생蟲 - 달리는 '설국열차'를 곧추세웠다.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기생충' 관람

 온갖 스포일러를 가득 안고, 자리에 앉았으나 여전히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었다. 2013년 ‘설국열차’처럼 몇 시간에 걸쳐 이야기를 나눌 만큼 곳곳이 의미 가득했다. 스포일러에 별로 개의치 않는 나는 이미 알고 있는 사건을 확인하는 또 다른 즐거움으로 스크린을 따라갔다.

 20대 딸들은 ‘스포일러’가 주책을 넘어 무례라고 생각하며 예민하게 반응하지만 글쎄 내 친구들하고의 대화에서는 그렇게까지 민감하지 않다. 남의 재미를 앗아가는 민폐가 아니라 정보공유라고 쉽게 생각하는데……. 이러다가 ‘꼰대’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일까? (하지만 절대 싫어하는 이들에겐 정보공유하지 않는다.)

 배우들의 연기, 묵직한 스토리, 실감 나는 공간적 배경, 디테일한 묘사……. 어느 것 하나 소홀하지 않은 영화를 보며 모처럼 기쁨을 누렸다.

영화 제목이 '기생'이 아니고 '기생충'이라니…….

 평범한 내가 기획하는 영화라면 아마 제목을 ‘기생’으로 밀었을 것이다. ‘기생충’은 너무 노골적이고 예술과는 동떨어진 현실적 어감이라며 회의적이었을 텐데, 역시 봉 감독은 대단하다. 영화를 관람하고 나니 역시 영화 제목은 ‘기생충’이었어야 했다.

섬뜩한 경계 ‘선’
 선을 넘지 마라!  

 처음 들어보는 말도 아닌데 이렇게 섬뜩하게 다가오다니……. 물난리 후 반 지하 집 벽에 선명하게 그어진 흔적만큼이나 아팠다. 쉽게 사라지지 않을 수해의 흔적, 뜯어내 도배를 새로 한다한들 어느 때고 다시 들이닥칠 진흙탕물의 습격! 그것이 인디언 모자를 쓰고 어린아이를 기쁘게 해 줄 순수한 아버지의 마음을 가졌을 그 순간에도 예민하게 발끈한다.

“어쭈! 네 선을 지켜! 어디라고 감히……. 내가 오늘 당신 일당과 수당까지 주잖아! 내가 필요한 건 당신의 손발, 노동력뿐이야. 네 생각 따윈 집어치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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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새와 향기

냄새, 그리고 향기……. 단순한 어감의 차이를 넘어 잠시지만 고민해 본다.

‘ 코로 맡을 수 있는 모든 기운이 냄새라면 그중에 향기로운 향내를 향기라고 하겠지.’

 ‘냄새’는 ‘향기’가 될 수 없다, ‘향기’는 ‘냄새’가 될 수 있으나……. 가난의 ‘냄새’는 가능하나 가난의 ‘향기’라고는 쉽게 표현하지 않는다. 비극이라면 ‘냄새’든 ‘향기’든 이 둘이 너무 자유롭게 오간다는  것일까? 인간들이 그렇게나 지키고 싶어 하는 경계를 지켜주지 않는다. 자유롭게, 무방비로, 언제든, 예기치 못하게 훅 들어온다는 것이다.

빈(貧)자와 빈(貧)자의 싸움

 빈자와 부자의 차이를 후각을 비롯한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드러냈지만 빈자와 빈자의 투쟁적 싸움은 육탄전만큼이나 거칠고 무섭고 그리고 슬프다. 없는 사람들끼리 연대하여 이심전심으로 나눈다는 말은 무색하다. 여러 날을 거쳐, 여러 번, 맨손을 넘어 고리와 수석과 칼까지 동원하여 빈자들은 목숨 걸고 싸운다. 그러지 않으면 이곳에 붙어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을 테니까…….

영화의 주인공은 빈(貧) 자

 최후까지 궁금한 인물이 주인공이라면 이 영화의 주인공은 빈(貧) 자였다. 햇빛 아주 좋은 날 벌어진 대정원에서의 참사 이후 부(富)자의 근황은 밝혀지지 않는다. 아마 더 좋은 저택을 구입하여, 저명한 미술심리 치료사에게 의탁하여 막내아들뿐만 아니라 온 가족의 트라우마 극복에 최선을 다하고 있으리라. 단지 달라진 것은 그들이 조금이라도 가졌던 빈자들에 대한 믿음을 철저히 거두고, 그들이 지키려고 했던 울타리를 더 공고히 다지있다는 거 아닐까? 이번엔 어떠한 냄새도 넘어오지 못하도록, 아니 스며드는 것조차 불가능하도록 더 굳건하게!

빈부격차 -소설 '난쏘공'

 이것이 나날이 벌어지기만 하는 빈부격차의 현실일 것이다. 공교롭게도 요즘 아이들과 소설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배우고 있다. 1970년대 산업화, 도시화로 인해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도시빈민으로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 난쟁이 가족의 비참한 현실을 다룬 유명한 소설을 아이들과 이야기하면서 내 마음이 편치 않음은 아직도 이 이야기가 진행 중이기 때문이리라.

교과서에 일부 실린 조세희 작품 '난쏘공'

 40여 년이 지나도 ‘난쏘공’은 사라지지 않고 이렇게 2019년에 ‘기생충’으로 다시 살아난다. 교과서에 실린 소설의 일부분에서도 ‘기생충’은 여기저기 흔적을 드러내고 있다. 개봉한 지 열흘도 안 되었는데 벌써 관람한 아이들이 꽤 있다. 흔적에 밑줄을 그으며 ‘소름’이라고 외치는 아이들과 ‘왜? 왜?’ 하며 궁금해하는 아이들, ‘스포는 안돼!’라며 귀를 막는 아이들과 1970년대의 사회상을 이야기해 본다.

'나는 우리 동네에서 풍기는 냄새가 창피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계획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계획을 내놓았다.'
빈부격차-영화 '방울토마토 '

 잠시 영화 ‘방울토마토’ 이야기도 아이들에게 들려준다. 김향기. 신구 주연의 영화인데, 여기서도 ‘기생충’이 보인다. 나는 영화관에서 때때로 이 영화를 떠올리며 ‘기생충’을 관람했다.

부자의 빈집에 들어가 허기를 채운다든지 부자의 정원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라든지, 부잣집 개들과 비교되는 가난한 이들의 이야기라든지, 결국에는 비극으로 치달을 슬픔들이 서로 겹쳐졌다.
모두 철거현장에서, 쓰레기 더미에서, 반 지하에서 외쳐대는 '없는 이'들의 절규였다.
다음 이미지
의외로 돋보이는 가족애

 돈이 많아도 싸우고, 돈이 없어도 싸운다는데 이 반 지하에 사는 가난한 가족들의 관계는 너무 매끄럽고 부드럽다. 돈이 없어서 휴대전화 데이터도 끊긴 판에 이들은 부모를 원망하지 않는다. 교환학생으로 해외로 떠나는 재벌 집 친구가 찾아와도 절대 비교하며 우울해하지 않는다. 자식들은 부모 앞에서 거리낌 없이 감탄사를 욕설로 내뱉고, 부부 사이의 대화가 대부분 무식한 발짓으로 과격하게 그려지는 콩가루 모습을 보이나 이들은 절대 서로 싫어하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교양 있는 부모 밑에서 가정교육을 잘 받은 아이들보다 남매간의 우애는 넘쳐나는 듯 보이고, 부모에 대한 믿음과 걱정과 사랑은 눈물겹도록 진하기만 하다. 기대를 안 하기 때문에, 서로 바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섭섭함이나 원망이 생기지 않은 것일까?
달리는 '설국열차'를 곧추 세웠다.

 칸칸이 나눠져 달리던 ‘설국열차’가 이번에는 곧추 세워져 위아래로 흔들리고 있다. 앞 칸으로 가기 위한 몸부림이 위로 가기 위한 절규로 바뀌고, 뒤 칸에서 싸우던 주인공은 의기소침한 빈자가 되어 아래 칸에 영원히 갇힐 판이 되었다.

 조금만 티를 내면 금세 벌레 蟲이 되어버리는 현실에서 나도 벌레가 아닐까? 나는 무슨 蟲일까? ‘공붓벌레’ 같은 말에 붙여지던 토박이말의 순진함을 이미 잃어버린 지 오래, 우리 인간은 왜 날마다 새로운 벌레가 되어 서로를 경멸하고 혐오하며 진짜 버러지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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