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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락 한방현숙 Aug 10. 2016

위로는 남이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받는 것이다.

지쳐 쓰러져 가던 그 시간들

가까이 사는 외삼촌이 카톡으로 양파와 감자를 가져가라 신다. 시골에 사는 막내 이모집에 다녀오신 모양이다. 퇴근길에 주차장에서 바로 상자만 받아 집에 왔다. 집에 도착해 서둘러 차 트렁크를 여니 상자마다 ‘소담이네’가 큰 글씨로 쓰여 있다. 이모부가 적으신 모양이다.

     

 작년 김장 때는 김포에 사는 큰 이모가 김치를 가져가라고 연락을 주셨다. 쏠랑 해놓은 김장 김치만 가져가는 얄미운 시누이 얼굴을 하고, 이모 집에 가니 김장하느라 애쓴 이모 며느리들이 웃으며 한 소리씩 한다. 이모 당신 며느리는 뒷전이고, 조카 김치통만 챙긴다고, 그러니 형님 이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하면서들 야단들이었다.

     

 내가 어디 가서 이런 호사를 누려 볼 수 있단 말인가? 엄마 가신 지 이제 2년이 다가온다. 엄마가 계실 때는 그래도 외삼촌, 이모들이 엄마 뵈러 가끔 오셔서 얼굴이라도 뵐 수 있었는데, 이제는 거의 집에 오시지 않는다. 몇 번 집안 행사에서 뵐 때마다 엄마 얼굴이 겹쳐 마구 흐르는 눈물 때문에 난감했었다.

     

 이 세상에 나 혼자구나 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모두 하늘에 있을 나의 원가족을 떠올릴 때마다 허해지는 마음은 나날이 커져만 갔다. 엄마 생각에 외롭고 슬플 조카를 생각하면서, 이종 사촌 누나를 생각하면서 보여준 마음들이 나를 따스하게 감싸 왔다.

 상자 위에 적혀 있는 사소한 글씨에 한 없이 따스함을 느끼며 외로움을 떨칠 수 있었다. 김치통에 김장 김치를 꾹꾹 눌러주면서 보이는 따스한 웃음에 엄마 잃은 슬픔을 떨칠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사실 그분들은 모를 것이다. 내가 얼마나 위안을 얻었는지 말이다. 위로는 작정하고 해야지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상대를 위한 진실한 마음을 자연스럽게 전달을 하면, 상대는 그것을 또 자연스럽게 따스한 위로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가 그날 얼마나 사랑받고 있다는 생각에 삶의 기력을 회복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흐뭇하기만 하다. 위로는 남이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엄마의 갑작스러운 암 진단은 우리 가족의 삶 전체를 흔들었다. 이미 두 아이를 10년 동안 

키워주셨고, 셋째까지 맡으마 하셨던 엄마였다. 엄마랑 한 번도 다른 공간에서 살아 본 적이 없는 나에게 엄마의 흔들림은 우주 전체를 잃는 것과 같았다. 엄마는 나의 하늘이고 기둥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지난한 12년이 이어졌다. 위암 수술과 뇌수술에 이어, 두 번의 고관절 수술까지 수차례 대학 병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중환자실과 병실을 오가며 엄마의 몸은 차례차례 무너져 내렸다. 머리칼은 짧게 잘렸고, 거동은 불편해졌으며, 배의 큰 칼자국을 남기고 만신창이가 된 채로 침대 생활이 이어졌다.

     

 모든 것이 엄마의 지휘 아래 돌아가던 우리 가정은 홀로서기에 힘을 얻기도 전에, 병든 엄마 수발에 모든 것이 뒤엉켜져 버렸다. 돌도 안 된 셋째는 어린이 집에 맡겨야 했다.

     

 세 아이 키우기와 집안 살림, 그리고 직장 생활은 버겁고 힘든 생활이었다. 여기다가 아픈 엄마의 병수발은 나를 지칠 대로 지치게 했다. 환자 식사 챙기고, 목욕시키고 갖은 육체적 수발도 힘들었지만, 무엇보다도 나를 힘들게 한 것은 엄마의 정신적 스트레스였다.

     

 자존심 강한 엄마는 당신이 무너지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들을 잃은 상처도 아직 퍼렇게 살아있는데 여기에다 당신의 억울한 인생까지 도저히 납득을 하지 못 했다. 날이면 날마다 당신의 억울한 인생 한풀이로 나를 흔들었다. 마지막까지 자식 앞에서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던 엄마의 몸부림을 그때 나는 끌어안을 여유가 없었다.

     

 엄마와 나의 애증의 세월이 시작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이이면서도 엄마와 나는 지겹도록 싸웠다. 난 엄마가 온전히 나에게 기대기를 원했고, 엄마는 아직도 당신이 살아 있음을 보이고 싶어 했다. 난 엄마를 끝까지 책임질 생각이었는데, 엄마는 의심하고 서둘러 날 판단하며 당신의 불안감을 이겨내려 했다. 난 독립된 어른으로 내 생활의 결정자가 되고 싶어 했는데, 엄마는 당신의 할 일이 없어졌다고 섭섭해했다. 난 내 남편과 아이들을 가족으로 여겼는데, 엄마는 오로지 당신만이 나의 가족이길 원했다. 억울하다고 안아달라고 소리치는 엄마한테, 난 그것도 당신 인생이라며 야멸치게 투정 부린다 생각했다. 엄마는 나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해서 그런다 하고, 난 그것을 집착과 간섭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것은 여유 없음이 죄였다. 돌아보면 너무 힘든 시간이었다. 그때는 힘들다는 사실조차 인식 못 한 채 그저 동동거리며 하루를 살아내야 했다. 9살, 5살, 1살의 어린아이들은 손이 많이 가는 나이였고, 집안 살림은 늘 막 이사 가는 집처럼 흩어져 있었으며, 학교 일은 학교 일대로 버거웠고, 편두통은 늘 나를 죽도록 괴롭혔으며, 시시 때때 찾아오는 엄마의 병원 생활은 간이침대에서 느끼는 차가운 병원 찬 바닥처럼 날 춥게 했고, 엄마는 나를 누르는, 내가 감당해야만 하는 커다란 숙제였다.

     

 그러고 10년을 버텨왔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참가하게 된 ‘마음 치유, 힐링’ 프로그램에서 난 폭풍 오열로 10년의 막힘을 펑 뚫어 날려 버렸다. 처음에는 서먹한 참가자들 사이에서 난 몰입을 잘 못 했고, 왜 내가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나의 개인적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지, 강사 선생님 말씀에 계속 회의적인 태도로 참가하고 있었다.

     

 그날도 별 기대 없이 간 어느 날 프로그램에서였다. 옆에 앉아 있는 다른 참가자를 향해 각자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을 칭찬하는 부분이었나 보다. 어색한 웃음을 보이며, 옆에 앉은 분을 향해 내 이름 ‘ 현숙아~~’를 부르며 시작하려는데, 난 그만 나도 모르는, 내가 도저히 어찌해 볼 수 없는 서러운 울음이 폭풍이 되어 꺼이꺼이 울고 말았다. 태어나서 그렇게 울어 본 적이 없었다. 그것도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주변 사람도 매우 놀라고, 화장실로 진정하러 간 나는 그곳에서도 주체할 수 없는 울음을 목 놓아 울어댔다. 입술을 씰룩거리며 온 목청을 돋아 서럽게 울어댔다. 시간이 조금 흘러 진정이 되자 누구도 내가 왜 그리 울었는지 묻지 않았다. 다만 그간 얼마나 힘들었으며, 여기서 그 힘듦 모두 다 쏟아 놓고 가라고, 더 울어도 된다고, 내 등을 토닥거리고 따스한 눈빛을 보내 나를 감쌀 뿐이었다. 

     

 눈이 퉁퉁 불어 귀가한 나는 밤새 많은 생각을 했다. 내가 왜 그리 울었는지 정리가 필요했다. 이유를 알 듯하면서 모를 일이기도 했다. 가슴에 맺힌 무엇인가가 분명 사라졌는데, 그것이 무엇일까 찾아내려고 애쓴 기억이 난다. 아마도 진정으로 나를 위로해 주는 나의 목소리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내가 힘든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은 친척은 물론이고 직장에서도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누군가는 나를 위로해 주며, 칭찬해 주며, 고맙다고도 했다. 그들의 위로 보다는 누구보다도 나를 가장 잘 알고 있는 나의 목소리가 나를 불러 줄 때 아마 나는 진정 마음의 문을 열고 위로를 받았는지 모르겠다. 

     

 분명 나만 바뀌었는데, 많은 것들이 같이 바뀌어 갔다. 때마침 운 좋게도 학습연구년에 합격이 되어서 1년 동안 충전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 꿈같은 시간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 어찌 살아낼 수 있을까? 여유로워지고 물렁해진 나는 엄마와 나의 관계를 바꿀 수 있었다. 우리는 예전처럼 다정한 모녀의 모습으로 서로를 걱정하고, 고마워하고, 감사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엄마가 변한 것이 아니라 내가 변한 결과이다.

     

 예전에 툭하면 짜증내고, 그런 짜증을 서로 오해하고, 그러다 결국에는 마음에도 없었던 말로 상처를 주고, 그 상처에 마음 아파하고 그러던 시간들이 이제는 바뀌어 버렸다.

 이렇게 키워 주셔서 감사하다고, 엄마 인생은 절대로 헛되지 않았다고, 우리 아이들 키워주셔서 감사하다고, 엄마 덕분에 나는 꿈을 이루며 살고 있다고, 사랑한다고, 고맙다고, 저를 믿으라고 늘 말씀드렸다.

 그러면 엄마는 미안하다고, 너를 이렇게 힘들게 해서, 사위에게도 볼 면목이 없다고, 고맙다고, 기특하다고, 너를 정말로 사랑하고 또 사랑한다고, 금쪽같은 우리 딸 사랑한다고 그러셨다.

 그러한 시간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 뒤늦은 후회로 몸부림치며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돌아가신 지 이제 2년이 되어 온다. 엄마는 사랑을 남기고 가셨다. 사랑으로 키워 주신 아이들은 잘 자라, 큰 아이는 벌써 대학생이 되었다. 아이들은 늘 할머니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며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나보다 더 큰 효도를 한 남편은 엄마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시부모님까지 행여 내 마음 휑할까 챙겨 주신다. 삼촌과 이모들 마음도 고맙기만 하다. 우리 가족 모두 할머니 부재로 인한 나름의 고통으로 힘든 시간도 있었지만 굳건하게 애도의 시간을 잘 통과하고 있다.

     

 엄마는 하늘나라에서도 엄마를 잃은 이 못난 딸의 마음을, 엄마가 남기고 간 사랑의 사람들로부터 든든한 위로를 받게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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