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 아빠의 살림연습
나이는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복리이자이다. 나만 늙어가는 게 아니란 말이다. 매일 TV에서 바라봤던 연예인, 화려한 조명 아래 춤을 추고, 랩을 했던 Super star들도 나이를 먹더라. 연예인과 비교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그저 영원히 화려한 솔로이길 바랐던 것일지도 모를 연예인들이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연기처럼 인기는 사라지고 TV에서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나이 듦에 자연스러운 과정일지도 모른다.
너무나 옛날 얘기스럽다. 잊힐 줄 알았던 연예인들이 말도 안 되는 프로그램에 출연하기 시작했다. 동치미, 살림남, 슈퍼맨이 돌아왔다, 동상이몽 등이 대표적이다. 평소에는 잘 보지 않았던 프로그램들이다. 결혼에 대한 꼰대들의 이야기, 안쓰러운 남편들의 고군분투, 경쟁하듯이 자신의 대궐 같은 집을 공개하며 잘 사는 모습을 양념으로 뿌리고, 일주일에 하루 이틀 아기를 돌보는 좋은 아빠의 모습까지 보여주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혼'은 나에게 최대한 미루고 싶었던 과제였다. 물론, 풀려고 노력을 하지 않았다. 자유롭게 일하고, 일상을 즐기고, 취향대로 사는 재미가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다.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고, 결혼의 환상과 함께 완전히 다른 세계관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아이'를 갖는다는 것 역시 결코 '계획하지 않았다.' 아내와 나는 아이를 피했다. 둘만 있어도 너무 행복했고, 불안하고 어지러운 세상에 대한 작은 시위였다.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사랑하는 아내와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의 딸, '단아'가 생긴 것이다.
결혼을 하고, 부부가 되었다. 그리고 아내의 뱃속에 '태아'가 잘 크고 있단다. 소파에 앉아 있다 보면 리모컨을 들고 채널을 돌린다. 그리고 살림남, 동치미, 동상이몽, 슈퍼맨이 돌아왔다를 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연예인들이 어느새 나이를 먹고, 나와 똑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을 하지 않았으면 절대 이해하지 못하고, 공감대 제로였을 것 같은 이야기들인데 지금은 애청자가 된 나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대한민국 대표 아빠들의 간헐적 육아 분투기라고 소개가 되어있는 연예인 아빠들의 육아를 하며 일어나는 일들을 리얼하게 보여주는 장수 프로그램이다. 도경완, 이휘재, 송일국, 추성훈, 타블로, 개리 등 아나운서, 배우, 가수, 격투기 등 '일'만 해온 불량 아빠들이 어설픈 육아 현장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얻게 되는 긍정적인 이미지는 '슈퍼맨'이었다.
아이들에게 부모는 우주예요
- 오은영 박사 -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까? 나도 슈퍼맨이 될 수 있을까? 아내가 임신을 하고 나도 생각이 많아졌다. 다소 늦은 나이게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며, 고군분투하는 남자 연예인들을 보며 공감대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심을 하게 되었다. 부모는 우주라는데, 우주 안에서 만나게 될 영웅인 '슈퍼맨'이 되어보기로 말이다.
언젠가 아내에게 어렴풋이, 다소 어설프게 말을 건넸다. '손에 물 한 방울 묻히게 하지 않겠다' 지금? 수 없이 손에 물을 묻히는 아내였다. 퇴근하는 나를 위해 식사를 준비하고, 설거지를 했다. 화장실 청소도 했다. 슈퍼맨이 되기로 마음먹음과 동시에 모든 일상을 바꿔 보기로 했다. '아이'를 가진 아내가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뭐부터 해볼까? 설거지부터 시작을 하자!
밥을 먹고, 바로 치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내보다 빠르게 주방으로 가서 앞치마를 멘다. 핫핑크 마미손 고무장갑을 양손에 장착한다. 서둘러 잘 말려진 수세미에 주방세제를 네-다섯 번의 펌핑을 한다. 아차! 보일러를 켜야 했다. 따뜻한 물로 설거지를 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깨끗한 결과물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서둘러 보일러 온수를 켜고, 다시 주방으로 돌아와 설거지를 시작한다. 아내는 본인이 해도 된다고 했지만, 결코 허락하고 싶지 않았다. 뱃속에 아이까지 있는데! 이까짓 거 내가 해야지라고 화답했다. 말 한마디에 괜히 우쭐해진다. 잘했다 싶다.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인 그릇들 위로 하얗게 몽글몽글한 거품들이 쌓이니 기분마저 좋아졌다. 온 사방에 내가 '설거지를 하는 남편이오~'하듯이 거품이 튀고, 헹굼물이 튄다. 앞치마는 이내 젖어 축축했다. 슈퍼맨이 되어가는 듯했다. 설거지하는 예비 아빠란 이런 걸까?
조금 더 고난도의 살림을 찾았다. '식사 준비'를 해보자!
간헐적으로는 아내도 바쁠 수도 있고, 컨디션이 좋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에 식사 준비를 종종 해왔다. 정확히는 조금 도왔다는 게 맞겠지만, 이번엔 본격적으로 해보고 싶었다. 밀키트나, 냉동식품 등 쉽게 구입할 수 있고 나름 죄책감을 덜 수 있는 형태의 요리들로 시작했다. 몇 개월 동안 시도해본 결과 크게 우리 둘 그리고 태아에겐 만족스럽진 못했던 거 같다. 대형마트를 가보면 죄다 빨간 음식이 즐비했기 때문이다.
임신을 하면서 아내의 입맛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일단 '빨간 음식'은 입에 대려고 하질 않는다. 맵고, 자극적이어서 그런지 힘들어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나는 매운 음식을 그렇게 찾았다. 아이러니한 식탁의 변화였다. 어쨌든 매일 두 번의 식사를 위해서는 새로운 시도를 해야 했다. '식자재'가 필요했다.
잘 몰랐는데, 오늘 뭐 먹지? 고민을 하면 막막할 때가 많았다. 매일 똑같은 걸 먹을 수가 없었고, 할 줄 아는 음식도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하루, 이틀, 사흘... 여러 식사를 준비하다 보니 장을 볼 기회가 많았는데 주부들이 많이 찾는 게 '식자재'였다는 걸 알았다.
야호! 호박, 오이, 양파, 감자, 새송이 버섯, 당근, 깻잎, 파프리카 등 식자재만 적당히 챙기면 다양한 요리를 할 수 있다는 걸 발견했다. 호박요리를 검색하면, 호박찌개, 호박전이 노출되고, 감자요리를 검색하면 감자탕, 된장찌개, 에어프라이어 감자칩 등 연관 요리까지 다양하게 노출되었다. 모든 음식을 다 할 순 없지만 최소한 식자재만 있으면 세상에 훌륭한 슈퍼우먼들이 레시피를 잘 정리해놓은 덕분에 식사 준비를 할 수가 있게 되었다.
최근엔 '콩나물'에 푹 빠져있다. 아내는 내가 만들어준 '콩나물 국'을 잘 먹었다. 맵지도 않고, 깔끔하면서도 지극히 평범한 그런 국물요리였다. 유기농 콩나물을 깔끔하게 씻고, 콩나물 세 줌과 과 멸치 육수 알 두 개를 끓는 물에 넣는다. 다진 마늘과 국간장, 약간의 소금으로 간을 맞춘다. 그리고 궁극의 맛은 '시간'이다. 끓일수록 깊은 맛이 더해주기 때문인데 모든 요리가 그렇더라.
가장 자신 있는 음식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미역국과 차돌박이 된장찌개'다. 두 음식 모두 시간과 정성이 맛을 완성시켜주는 대표적인 음식이다. 약간의 올리브유에 미역이 부드러워지도록 계속 저어주며 볶는다. 참기름 조금, 국간장 조금, 소금으로 간을 하고 시간이 허락된다면 '소고기나 황태'를 볶아서 넣어주면 그대로 맛있는 '소고기 미역국, 황태 미역국'이 된다.
된장찌개, 계란말이, 프라이, 황태 미역국, 콩나물국, 떡국, 동그랑땡, 호박전, 두부부침, 시금치 무침, 청경채 소고기 볶음, 버섯볶음, 감자조림, 간장 두부조림, 콩나물 돼지불고기... 다 기억나진 않지만 최근 임신 후 수개월간 만들어오고 있는 음식들이다. 무엇보다 요리하는 재미가 있었고, 내가 만든 요리를 배가 불러오는 임산부인 아내와 뱃속에 있는 딸 '단아'가 잘 먹어주는 게 정말 보람찼다. 이게 엄마의 마음인가? 아니, 슈퍼맨의 간헐적 고군분투 이야기가 될 수 있을까?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저녁식사'를 고민하고 있다. 뭘 해먹을지 말이다. 아내에게 고맙다는 말을 꼭 하고 싶다. 고군분투 중인 남편을 위해 그리고 우리 가족을 위해 여전히 음식과 설거지 그리고 빨래, 청소까지 살림을 같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보야 임산부는 '손에 물 묻히지 말랬잖아'
뱃속에 아이가 생기면서 아내는 변하기 시작했다. 배가 생각보다 많이 부르기 시작했고, 움직임도 느려져갔다. 골반도 아프고, 숨이 가빠지기도 했다. 감정의 변화는 더 크다. 기분이 오락가락하고, 갑작스럽게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아이가 태어날 기쁨도 있지만, 주체할 수 없는 두려움과 외로움 또한 공존했다. 남편으로서 뭔가를 해야 했다. 살림이었다. 단순히 설거지, 빨래, 청소 그리고 식사 준비를 하는 게 다가 아니었다. 살림의 뜻을 찾아보니 솔루션이 담겨 있었다. 집안을 이루어 살아가는 일.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임산부가 있는 집이라면 보통의 하루를 보낸다고 한다. 집안 살림을 적극적으로 함께하고, 아내의 변화에 민감하기보다 늘 그랬던 것처럼 사랑하고, 대화해야 한다고 말이다. 사실, 아이가 생기면서 조금은 오버했다. 괜히 설거지도 더 많이 하고, 청소도 더 오래 하고, 요리도 창작하려고 말이다. 지금은 어떠냐면, 수개월이 지나면서 이젠 익숙해졌고, 늘 그랬던 것처럼 묵묵히 할 뿐이라고 말하고 싶다. 세상이 변했고, 아내는 임신했고 여전히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소중한 뱃속의 딸을 위해 돕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한 집안을 이루어 살아가겠다고 다짐을 해보게 된다.
풀리지 않는 의문 하나. 분명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하는데, 습진이 자주 생긴다. 장모님과 똑같은 현상이다. 그래도 기분은 좋다. 살림남이라는 '증표'가 아닐까. 인정받고 싶은 예비 슈퍼맨은 오늘도 살림을 이어간다. 세상의 모든 임산부를 위하여 남자들이여 앞치마를 둘러메자.
왕태일DREAM
왕조시대 Jr. 단아를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