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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태일 Jul 27. 2023

'광고쟁이'가 '영업사원'이 되다

나는 독립꾼입니다. ep.09

뭐부터 하면

될까요?


퇴사 후 2022년 새해를 맞이했다.

나는 창업을 하기로 결정했다. 15년 동안 몸과 마음을 담았던 '광고 대행업'을 바탕으로 '브랜드의 힘'을 만들 수 있는 기획력과 크리에이티브 역량이 뛰어난 회사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상황이 녹록지가 못했다. 사람을 만나서 회사 홍보도 하고, 네트워킹을 좀 해야 했지만 코로나19가 확진자가 20만 명이 넘어가는 게 아닌가. 조심해야 했다. 2월에 태어날 아이를 기다리고 있던 탓에 불특정 상황에서의 대면 미팅을 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얼마 후 딸 '단아'가 세상에 태어났다.


3월의 봄이 시작되었다. 책임감에 어깨가 무거워진 탓일까, 이제는 밖으로 나서야만 했다. 아직은 쌀쌀한 바람이 코끝을 날카롭게 스쳐 지나갔다. 갑자기 멍해진 기분이다.


이제 뭘 하면 되는 거지?


내가 하는 일은 기술보다는 사실, '지식창업'에 가깝다. 물론 데이터 기술을 통해 고객을 관리하고, 광고 매체를 운영하며, 상품을 유통하고 관리하는 여러 방향의 대행사들이 존재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오직, 기획력과 창의력을 통해 브랜드 컨설팅을 해야 하는 직업이었다. 기업 또는 브랜드를 관리하는 담당자들에게 나의 포트폴리오를 소개하고, 기대하는 바가 일치할 경우 '제안, 제작, PT' 등의 '기회'를 얻어야만 했다. 보통은 그랬다. 때문에 퇴사 전에 담당했던 광고주(브랜드)를 사전 영업해서 창업과 동시에 '일'을 맡아서 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안 했다. 전 직장과의 의리였지만, 창업이 결정된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제 갓 태어난 존재감이 없는 '회사 소개서와 명함'을 들고 밖으로 나와보니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 누구도 '나'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리고 '관심'을 두기엔 모두가 바쁘게 자신의 일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 기존의 많은 브랜드들은 내가 아닌 '전 직장'조직을 바라보고 의뢰를 했던 거였다. 당연한 거였지만 씁쓸한 기분은 쉽게 가시지가 않았다.




01.

영업사원 1일 차


일 잘하는 '광고인'의 본캐와 부캐가 필요했다. '영업사원'

사실, 광고업은 '영업'과 비슷한 부분이 많다. 영업은 '좋은 제품, 서비스 등을 팔기 위한 모든 활동'을 의미한다. '광고' 또한 기업의 브랜드 또는 서비스, 제품 등을 명확한 타깃을 구분하여 구매할 수 있도록 인지, 홍보, 판매를 위해 돕는 활동'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결국, '회사의 역량'(제품, 서비스)을 기업 브랜드 담당자들에게 믿음직한 파트너로 인지 시키는 게 가장 우선시되어야 했다.


물론 온라인으로 회사를 홍보해도 되겠지만, 세상이 그리 만만하지 않지 않는가. 일단 휴대폰을 열었다.

카톡 친구 목록을 확인하고, 약 1,600명의 인물 정보를 확인했다. 모든 사람이 영업 대상은 아니다. 1순위는 기존 광고주, 2순위는 브랜드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 3순위는 파트너사, 4순위는 지인 등으로 구분이 되었다. 


그리고 한 명 한 명씩 '카톡'을 보냈다. 창업 소식과 함께 회사 홈페이지를 공유했다. 대부분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실시간 반응보다 시간차를 두고 반응이 왔다. '반응'에 따라 '만나고 싶은 대상'을 정했다.


1순위 카톡을 읽고 궁금해하는 사람

2순위 카톡을 읽고 칭찬과 인사 정도 하는 사람

3순위 카톡을 읽는 사람

4순위 카톡을 꽤 늦게 읽는 사람

5순위 카톡을 읽지 않거나, 아주 나중에 읽는 사람


사실, 1순위 외에는 '영업'의 대상에 포함은 되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당장 만나야 할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부담 갖지 마세요.

물건을 파는 것도 아니고. 커피나 한 잔해요"



02.

쓸데없는 배려는

하지 말자


톡을 보냈다.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는다. 그리고 은근슬쩍 커피 한 잔 하자고 말을 건넸다. 보통은 일상의 대화로 볼 수 있지만 약간의 '영업'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굉장히 낯간지럽고 어색했다. 분명 상대방이 느꼈을지도 모른다. 특히, 대면 미팅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더욱 경계를 했을지 모른다. 물론, 기존에 알던 사이여서 대화는 잘 되었지만 말이다. 


우리나라 특유의 인사말이 걸림돌이 되었다. ''좋아요. 언제 한 번 밥 먹어요'' ''근처에 올일 있으면 놀러 오세요'' ''저는 강남에 있어요. 만나면 좋겠네요.'' 등이다. 대부분 명확한 일정이 빠진 인사치레였다. 정말 힘들었다. 나의 답변은 보통 ''꼭이요!'' ''좋아요!'' ''놀러 갈게요''였다. 추상적인 대화의 시작과 끝.


쓸데없는 배려였다.

생각을 고쳐 먹어야 했다.


'영업'이란 마음부터 버려야 했다. 모든 사람들에게 '물건을 팔 순 없지 않은가!' 그리고 난 영업사원의 역할을 할 뿐이지 '영업'만 하는 세일즈맨이 아니다. 또 한 가지! 상대방의 상황, 기분, 태도까지 배려해서 '만남'을 갖지 못한 다면 '시작'이 없는 거였다. 쓸데없는 배려였다. 


결국, '나'답게 편하게 다가가자


많은 부분에서 불필요한 감정 소모가 사라졌다. 상대방도 의외로 적극적이고 명확한 일정을 잡는 거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직장인들의 특성상 '미팅'은 대수롭지 않았기 때문일까 싶지만 정말 그랬다. 이후로 사람들을 만나는 건 '조직'의 힘이 아니어도, 이제는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조금의 자신감과 욕심만 내려놓으면 충분했다.


하지만 여전히 회사를 홍보하고, 포트폴리오를 소개하는 B2B의 관계를 만드는 '영업'단계는 여전히 어렵다. 창업 후 수개월이 지난 지금 새로운 영업 루트를 개발해야 했다. 그래도 가장 큰 벽을 허문 느낌.




03.

전설의 판매왕

'빌 포터(Bill Porter,1932-2013)'

빌 포터

미국의 생활용품회사 왓킨스(Watkins)의 전설적인 판매왕 '빌 포터'의 이야기가 있다. 그는 1932년 뇌성마비를 안고 태어났다. 발을 절뚝거렸고, 등이 조금 굽었다. 말투는 어눌했기 때문에 일자리를 쉽게 구하지 못했다. 그러다 끈질긴 구애 끝에 '왓킨스'에 방문 판매원이 되었다. 


저를 가장 힘든 곳으로 보내주세요  


매일 새벽에 기상을 했다. 하루 100가구 이상을 돌며 제품을 소개하고 다녔다. 쉽게 문을 열지도 않았고, 핀잔을 듣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고 한다. 더 좋은 제품을 가져오라는 뜻으로 받아들였고, 내 장애 때문이 아니라 부족한 설득력과 제품 때문이라고 자기 주문을 했다. 


그리고 매일 아침, 반복된 방문, 실망하지 않고 빠른 질문과 제품 제안을 이어갔다. 하늘이 도왔다. 사람들은 조금씩 익숙해진 빌 포터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제품으로, 마음으로, 인간적으로 대했다. 


결국, 입사 24년 만에 '판매왕'이 되었고 55년 간 영업 현장, 방문 판매원으로서 가장 큰 업적을 남겼다.

tv영화 Door to Door

2002년엔 그의 이야기를 담은 tv영화가 개봉했다.



사업과 동시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의 역량을 펼치기 전에 '영업사원'의 활동이 반드시 필요했다. 빌 포터가 그랬듯이 인내와 끈기가 필요한 것 같다. 조건과 상황은 경쟁 업체보다 좋을 수가 없으니까 말이다. 긍정적 태도와 사고방식을 갖춘 광고인 그리고 나는 영업사원이 되었다.


우리는 왕조시대

왕태일 DREAM | MARKETING DIREC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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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독립꾼입니다. Ep. 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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