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독립꾼입니다. ep.10
'광고'업계에서 기획자로 16년 차가 되었다. 세월만큼 다양한 프로젝트를 통해 경험을 쌓았다. 한국타이어, 르꼬끄 스포르티브, CJENM, CJ올리브영, 데상트스포츠재단, SSG PAY, 유니세프, 롯데제과, 빙그레, 까마시아, 광동제약, 보솜이, 지베르니, 휠라, 청정원, 주당비책, 피쉬 프렌즈, 삼양사 어바웃미...
포트폴리오를 꺼내보지 않았지만 뷰티, IT, 소비재, 숙취해소제, 음료, 사회공헌, 공익, 생활용품, 핀테크, 게임 등 분야 가리지 않고 프로젝트를 공부하고, 산업을 이해하면서 광고일을 해왔던 것 같다. 대부분 연간 대행이나 장기적인 파트너십을 맺고 일을 해왔기 때문에 결코 가볍거나 단순한 업무는 아니었다. 4대 매체(TV, 신문, 라디오, 인쇄)부터 최근 10년 동안 디지털(광고, 콘텐츠, 영상, 프로모션, 테크)분야에서 크고 작은 프로젝트를 다루었기 때문이다.
나의 '기록'은 앞으로를 만들어갈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지난 ep.09 '광고쟁이'에서 '영업사원'이 되다 편 https://brunch.co.kr/@theking/37 에서 '영업'에 직면한 이야기를 했다. 이후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대표'라는 타이틀이었다. 굉장히 어색하고 낯간지러운 기분이었다. 한 편으로는 달콤함을 느꼈다. '대표'라는 타이틀은 여러 특징들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대표'이기 때문인지 상대방에게 '신뢰, 전문성, 리더, 존재감' 등 더 나음의 이미지를 갖게 하는 것 같다. 때문에 사업하는 지인들을 만나게 되고,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종종 네트워킹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장에는 나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내가 영업하는 대상의 대부분이 '회사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실무자'였기 때문이다. 결정권자가 아니라는 얘기다. 그래서일까? 실무자 대부분은 '응원의 격려'가 대다수였다.
보통의 기업에서는 천만 원 또는 1억 이상의 프로젝트의 경우 경쟁 비딩을 통해 업체 선정을 하게 된다. 실무자보다는 팀장, 재무팀, 법무팀 등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다. 광고주 팀장 대상으로 영업을 하면 좋겠지만 쉽진 않았다. 실제 프로젝트를 담당했을 때도 대부분 '실무자'와 커뮤니케이션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이땐 알지 못했다. 내가 창업을 할 거라고는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 생각보다 많은 실무자들은 퇴사를 하고 있다. 그 친구도 결국 다른 회사를 가서 '적응기'를 겪고 있을 것이다.
짧았다. 대표라는 달콤한 타이틀. 지금은 '대표'라는 타이틀을 숨겨놓는다. 명함에도 없다. 다만 대표를 만날 땐 '대표'직함을 내놓고, 실무자를 만났을 땐 '실무'직함을 소개하고 있다.
사무실이 생겼다. 디지털 노마드의 삶을 통해 낭만적인 '창업' 이야기를 만들어 가고 싶었지만 결국 사무실을 마련했다. 강남이나 테헤란로 등 널리 알려진 공유 오피스에 둥지를 틀고 싶었지만 점점 심각해지는 코로나19와 육아 병행을 고려해서 집 근처 오피스텔을 계약했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미사 조정경기장이라는 뷰가 생겼고 여유로운 이 동네에서 4계절을 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무실은 8평 남짓한 빌트인 원룸 오피스텔이다. 일을 할 수 있는 책상 한 개와 미팅을 고려해서 작은 원 테이블과 의자 두 개를 배치했다. 경기도에 위치한 5호선 미사역. 그래도 서울과 꽤 근접했기 때문에 여러 차례 광고주, 파트너사, 지인들이 사무실에 방문하기도 했었다.
가장 기분 좋을 땐 '내가 만든 회사 그리고 첫 사무실'이라는 상징성이다. 의미를 부여하고 싶진 않지만 직장에서 벗어나 창업을 했기 때문에 유일한 유형의 부채가 되었다. 주소도 생겼고, 달콤한 나만의 공간이 생긴 것이다. 보통의 창업 선배님들의 피드백은 이랬다.
"좋다, 옛날 생각난다." "나 보다 더 좋은 곳에서 출발하네?"
"다 이렇게 시작하는 거야..."
결국 시작에 불과했다. 과연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첫 사무실이자 마지막 사무실이 될 것인가는 아무도 모른다. 답은 정해져 있지 않지만 매달 월세를 내다보면 가끔은 없애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일이 한 창 바빴을 땐 사무실에 출근을 하지 않았다. 최초에 디지털 노마드의 삶을 선택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굳이 사무실에서 일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을 만나고, 영업을 하고, 새로운 곳에서의 영감을 얻기 위해서는 '밖'의 세상이 더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나만의 슈필라움(나만의 공간, 오롯이 몰입할 수 있는 장소)을 꿈꿨을지 모르겠다. 매달 80만원을 내면서까지 말이다. 미국의 빅 테크 기업들도 기숙사, 창고에서 시작했다고 하던데 큰 꿈을 꾸었던 걸까?
오늘도 사무실에서 글을 쓰고 있다. 산과 물이 흐르는 창밖의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며 조금은 씁쓸한 심정을 기록한다. 창업은 마약과 같다. '창업'이기 때문에, '창업'을 위해서...'창업' 겉과 속이 참 다르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아가고 있다.
우리는 왕조시대
왕태일 DREAM | MARKETING DIREC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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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독립꾼입니다. Ep. 0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