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그리고 이별여행

지금은 오월광주

by Psyber Koo

사계가 비교적 뚜렷하던 시절엔 각 계절마다 대표하는 음식이 있었다. 지금은 작황에 여러 방도가 생겨 장바구니 계절은 모호해졌다. 그러나 몸은 안다. 바람과 온도가 특정값으로 감지되면 혀의 기억은 되살아나고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어김없이 뇌에 명령을 내린다.

“000을 먹어야겠는데?”

하고 말이다.

먹는 것을 넘어 다양하게 적용되는 감각의 재생.

뇌는 당시 그토록 자잘하고 하찮은 것 같은 경험들도 고이 접어 잘 저장해 두었다가 부지불식간에 툭하고 꺼내준다.

때론 선물 같기도 한 감각의 재생 혹은 생각의 반복 또는 행동 패턴. 이렇게 꺼내진 것을 보고 있자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고 어제의 내가 이해되는 경우가 많다.




5월 20일이 마지막 치료일이었고, 그 이후 추적검사일정이 즐비하지만 그래도 나름은 ‘종결’이니 안녕을 고하고 싶어졌다. 세상에 외칠 깜냥은 안되니 나에게라도 얘기해주고 싶어졌다.

끝났어. 끝났다고!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깊은 산에서 매일 수련하는 어느 자식의 마음처럼 ‘치료만 끝나봐라’를 외치며 칼을 갈고 있었건만 막상 결전의 그날이 오자 영(활동력이) 시원찮았다. 방사선 치료로 인해 상한 피부와 흔한 부작용인 피로감은 회복기가 필요하다며 깊은 메아리로 답하고 있었다.


암에 대응해 수술, 항암화학, 방사선 삼종세트를 부여받아 적극적 치료로 봄을 송두리째 뺏겨버린 터라 치료가 끝나고 열흘 남짓 남은 오월은 너무나도 찬란하게 빛났고 더없이 아까운 봄이 되어버렸다. 청포도가 익어가는 유월이 오기 전인 바로 지금 이 오월에 ’암치료와 이별여행‘을 하자.


“오월, 오월은 광주지. “

부지불식간에 떠오른 말이다. 또 어딘가에 잘 넣어둔 멘트겠지만 이유는 따져 묻고 싶지 않았다.

근현대사를 잘 아는 것도 아니고 제대로 각 잡고 찾아볼 열정도 없고, 지극한 국가의식을 갖춘 것도 아닌 채 별생각 없이 살아온 내가 그저 영화나 다큐멘터리에서 잠깐씩 얻은 정보가 다인 ‘민주화운동 5.18’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아무것도 모른 채 자유민주주의를 누리는(?) 나 자신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책방을 운영할 때 518기념재단의 충청지역 대표서점이었기에 그랬을까? 한강작가님의 ‘소년의 봄’을 읽고 눈물겨워하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소식에 대한 감격이 가시지 않아서일까? 그 언젠가 독서모임에서 광주여행을 다녀온 분의 적극적인 추천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그래 오월이니, 미뤄두었던 오월광주로 떠나자.




아팠다.

겉보기엔 조용하고 아름다운 이 도시가 이런 아픔을 딛고 있었다니!

직접 와보지 않았다면 결코 몰랐을 생생함이 나무에 건물에 도로에 걸려있었다.

뉴욕에 갔을 때, 911 메모리얼파크에 들린 적이 있었는데 그때와는 또 다른 아픔이 존재했다.

내 암치료의 고통을 한대 모아도 이 도시에서는 견줄 곳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이저호가 우주에서 찍은 지구는 ‘창백한 푸른 점’이라 했는데 딱 그랬다. 내 고통은 이 도시에서 ‘점’이었다. 오월이라 붉은 장미가 한창이었는데 꽃덩쿨사이로 내밀어진 총구에 수많은 꽃청춘은 져버렸지만 다시 피어났다. 견줄 수 없는 그 아픔은 노벨평화상과 노벨문학상으로 승화되었기에 더 벅차올랐고 뜻모를 위대함과 건강함이 스며있었다.

평일이고 혼자였으므로 공간을 대하는 마음은 더욱 깊어질 수 있었지만, 몇 달을 누워 지낸 몸은 이내 에너지가 고갈되었고 아쉬움을 뒤로 한채 돌아서야 했다.

언제 다시 꼭 와야지! 꼭!

아쉬움을 남긴다는 것, 미래를 기약해 보는 것이 새삼 소중한 날이다.


KTX를 이용하면 이동에 큰 무리가 없을 거라 여겼는데 역에 도착하자 6개월의 은둔 때문인지 오랜만의 기차여행의 설렘 때문인지 탑승구를 제대로 찾지 못하는 우스운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뚝딱거림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무궁호와의 연결선을 타이트하게 잡아두었는데 아뿔싸! 케이티엑스가 연착되는 불상사가 일어났고, 연결차를 놓치지 않으려면 달리기가 필요하다. 목표를 향한 달리기.

간신히 올라 헐떡거리며 숨 고르기 후 자리를 찾았다.

오! 나 달릴 수 있는 사람이구나?

예전처럼은 아니지만 그래도 달릴 수 있구나!

이렇게 뚝딱거린 이별여행의 광주는 올해가 가기 전 다시 꼭 가보고 싶은 도시가 되었다.

그때는 ‘이’ 빼고 ‘별여행’해야지.

이곳의 빛나는 매력에 빠져보겠어!




2025년 5월 광주 (KTX이용)

- 518민주화운동기록관

- 옛적십자병원(광주서남대병원)광주민주화운동사적지11호

- 전일빌딩245

-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여건상 간단히 주변만 돌아봄)

- 책과생활(동네책방)



518민주화운동기록관 방문자센터, 오월문구점에서 만든 나만의 문구


keyword
이전 02화1화. 그리고 독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