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화와 수채화를 통해 확실해진 것들
내게 시간이 주어진다면,
으로 시작하는 류의 질문은 너무 귀찮다.
9 to 6의 별다를 것 없는 직장인이자 엄마인 내게 시간이 주어질 리도 없다 생각했고(이 오만함은 어디에서 왔는지 아직도 의문이다.), 주어진 들 뭘 할 수 있는지 아니 뭘 할 줄 아는지도 의문이었다.
‘절대’라는 수식어는 ‘원래’ 이렇게 절대로 안 올 거라 장담하는 이에게 덥석하고 던져지는 것인가?
어릴 적 내 좋은 할머니는 쉽게 뾰로통해져 ‘싫어! 절대 안 해!‘를 외치는 소녀에게 ’절대로 라는 말은 니가 싫어하는 그걸 부르는 주문이 되어서 더 빨리 하게 만든다‘는 위협 아닌 위협으로 소녀의 과민감성을 잠재웠다. 식견이 조금 생긴 성인이 되자 그때 할머니의 말씀은 ’ 경계를 강하게 두면 무너지기 쉬우니 조금 느슨하게 마음먹고 받아들여라‘로 의역해서 이해하니 한결 조절력 있는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웬걸, 내가 십 년 안에 할머니가 될 수 있는 이 시점이 되어서는 ’ 진짜 부르는 주문인가?‘싶을 때가 많다. 이제는 할머니께 그 이야기가 무슨 의미였는지 물어볼 수도 없는데 말이다.
회복기는 단어에 녹아 있는 의미대로 기간이고, 기간은 말 그대로 시간이 이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내게 시간이 주어진다면’이라는 가정문에 코웃음을 쳤던 내게, 절대 그럴 일이 있겠냐 했던 오만함을 호통치듯 시간이 주어졌다. 이어진 시간이.
짧게 자투리시간을 운용하는데 익숙해져 있지만 시간의 힘을 알기에 ‘절대주문’으로 도달한 이 시간의 연속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여차하면 아이스크림 포장용 드라이아이스처럼 아련한 기류를 풍기며 보란 듯이 순식간에 증발해 버린다는 것을 알기에 마음이 초조해졌다.
몸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판화칼로 나무나 지우개를 깎아본 것은 너무 오래되었기에 ‘도장’으로만 인식되던 판화프로그램에 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행운이 주어졌다. 몇 해 전 진천을 지나다 발견한 판화미술관에 들러 김철수작가의 판화작품과 작업과정전시를 관람한 적이 있었다. 작가는 주로 숲을 멋들어지게 표현했는데 작품이 나오기까지 판이 얼마나 많고 다양한지 경이로울 정도였다. 미술의 영역은 공간이 허락되어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으로 돌아섰던 기억이 어렴풋하다.
선생님께 설명을 듣고 밑그림을 그리는데만 2시간이 훌쩍 넘어가고 프레스기를 이용한 찍기 작업에 들어가면 하루 주어진 3시간은 빠듯하다.
시간은 잘 간다. 그러나 함정은 ‘밑그림’이었다.
구상,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은 ‘인벤치오네’, 이를 실제로 그린 것을 ‘디세뇨’라고 한다.
시간을 죽이기보다는 그래도 뭐라도 하며 움직여보는 게 낫다는 생각이었지만, 나는 인벤치오네도 디세뇨도 모두 하찮다는 것을 수업을 들으면서 다시금 깨닫는다.
그렇게 몇 주째 이어가고 있다.
더위가 사그라 들지 않던 어느 날 덜컥 고개를 들어보니 어머나! 이게 무슨 일이람? 수채화까지 하고 있다.
그렇다. 한번 휩쓸리니 도무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수업을 통해 확실해진 것은 ‘역시 미술은 내 길이 아님’인데..어째서 이러고 있는지 도통 모르겠다.
인생은 언제나 제 멋대로다.
시간운운 말고 미술관에 다녀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