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렬식 독서가의 주의력
사람을 대하는 방식과 책을 대하는 방식이 유사할까?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고, 모든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으로 불행하다." 톨스토이의 대표작 안나 카레니나처럼 펼쳐든 첫 문장에 매료되는 책이 있는가 하면, 문득 펼친 어떤 문단에 폭 빠져들어 책을 고르게 될 때도 있다.
사람마다 각자의 독서스타일이 있기 마련인데 나의 경우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좀 지저분하다. 읽고 있는 순간의 내 심정과 딱 맞는 문장을 만나면 그 즉시 아무렇게나 잡히는 펜으로 줄을 긋고(대부분 삐뚤빼뚤하다) 작가의 세계에서 노닐다 문득 떠오른 생각의 조각을 여백에 기록해두기도 한다(다시 펼쳐보면 무슨 내용인지 연결이 어려운 암호식 기록이 허다하다).
좋게 말하면 손때가 뭍은 책이라 할 수 있는 이 더러워진 책은 누구에게 빌려주기도 어렵고 그 흔한 되팔기도 불가능해 오로지 나에게서 소모되고 만다. 이러한 양상이기에 도서관에서 책을 대여하는 일은 너무 어려운 실천이 되어버렸다. 어찌어찌 노력하여 메모는 그나마 저지가 되는데 지금 딱 내 심금을 건드린 이 문장에 줄 긋기 충동을 참아야 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유혹이므로 내겐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어쩌랴. 사는 수밖에. 공공재로 사용하지 못하는 나를 위해, 책에 폭 빠져 놀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답시고 산다. 막. 막막. 사놓고 읽지 못한 책이 쌓여도 ‘언젠간 읽는다’ 즉, ‘언젠간 (줄) 긋는다’ 싶으니 말이다.
줄 긋기를 한 내용은 다시 노트에 손글씨로 옮겨 적기를 종종 하는데, 날이 갈수록 손글씨가 맘에 들지 않는다. 아직 회복기이니 손에 힘이 다 들어오지 않은 것이라 자위해 보지만 그러기엔 휴대폰을 들고 있는 내 모습이 제법 탄탄해 반기를 든다. 그냥 손글씨가 엉망인 거다.
아니 점점 엉망이 되고 있는 거다.
어려서부터 명필까지는 아니어도 선생님께 혹은 친구들에게 인정 받는 꾀나 예쁜 글씨체를 지녔던 내가 이런 악필이 된 게 한탄스러워 서점에 들러 초등한자 쓰기나 책에 그대로 쓸 수 있는 필사책을 골라 매일 써보기도 했지만 끝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왜일까?
쓰는 나를 관찰해 보니 조금 성급한 모습이 보였다. 문장을 잘라먹고 쓰고 있기도 했다. 생각과 손이 따로 논다는 것이다. 너무 빨리 쓰나?
조금 천천히 써볼까? 싶은데 필사가 아닌 내 생각을 쓸때는 기필코 어느새 휘릭이니 첫 문장은 봐줄만해도 문장이 길어지면 영 꼴이 말이 아니다. 결론은 휘리릭 써도 잘 쓰는 손글씨를 갖고 싶다. 욕심인걸 알지만.
생방송 라디오 게스트로 주 1회씩 책을 고르고 소개하는 코너운영을 약 5년 정도 했다. 지역이기에 가능했겠지만 독서를 좋아하는 내가 고른 책을 나만의 방식으로 소개할 수 있었기에 너무나 큰 행운이었다. 책은 매주 달랐고 그래서 총 약 260여 권을 소개했는데 개인적으로는 독서활동에 활성화버튼이 되어준 것 같아 감사하다. 매주 다른 책 소개하겠다는 혼자만의 다짐덕에 개편 때마다 살아남는 행운(?)을 누렸는데 프로그램 자체가 폐지되면서 자연스레 나도 방송국출입을 끊었다. 장기게스트다 보니 몇 번이나 진행자가 바뀌었고 그중 친근한 진행자가 병렬식독서를 하는 나에게다른 책을 읽다가 다시 들면 내용을 어떻게 기억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다른 친구를 만나고 왔다고 이 친구를 몰라볼 수 있던가요?”
나에게 책은 친구다. 병렬식 독서로 여기저기 책이 흩어져있는 것은 곳곳에 친구를 배치해 둔 것이다.
집에는 종종 대여섯 권의 책이 곳곳에 있고, 거실에만 해도 서너 권이다.
생각과 손의 속도가 맞지 않기 시작한 나는 문장을 읽는 눈과 책장을 넘기는 손의 속도도 의심스러웁다.
내용을 마저 읽지 못한 채 일어나 다른 행동을 하거나 행간의 의미에 갸우뚱하는 나를 기다리지 않고 채근해 다음장으로 넘어가게 떠민다.
어느 날 마지막장을 덮으며 ‘다시 읽어야겠다’싶은 순간이 와 스스로 흠칫 놀라며 조용히 혼잣말을 읊조렸다. “이거 완전 주의력 결핍이네.”
다행히 주륵주륵 삐뚤빼뚤 그어둔 내 독서 흔적이 있어 속성으로 되짚기가 가능했으니, 그래 책은 역시 사야 해! 가져야 해!
어쩌면 자꾸 잊으니까 새로운 내용을 넣을 수 있는건지도 모른다. 특기인 병렬식 독서의 비결은 기억하지 않음에 있는것인지도…
사람과의 관계가 쉽지 않은 요즘 시대 많은 이들이 ‘시절인연’이라는 말을 쓰던데 책도 그런 것 같다. 손글씨는 안 예뻐지고 낮은 주의력을 장착하려는 내게 구박은 이제 접고 ‘시절책친구’ 선물하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