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의 기록 #4
밥도 세끼 다 챙겨먹으니
저는 걱정 말고 엄마,
힘들어도 조금만 기다려요
Mama don't worry
2015년 겨울, 네 번째 임용시험에 그 어느때보다 맥없는 성적으로 떨어진 뒤, 이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다만, 뭐라도 되어야, 반드시 뭐든 되어야지만 가족 모두가 함께 희생한 긴 시간에 매듭을 지을 수 있을 것 같은 비장함만은 남아 있었다. 몇 달 남지 않았지만, 이듬해 6월에 있을 서울시 9급 교육행정직에 도전해보기로 마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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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범대를 졸업하고도 다른 진로를 택한 동기들은 더러 있었지만, 대부분 적성의 문제이거나, 능력치가 남아 더 근사한 도전을 하는 경우였다. 그에 비해 나의 레이스는, 이미 순위권 밖 꼴찌의 달리기 같았다. 그래도 끝까지 달려야 했다. 열등감을 느낄 여유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더 이상 부모님과 가족들을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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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나는 친정에, 옷가지 몇 벌만으로 옷장 반 쪽, 방 한 칸에 더부살이하던 중이었다. 어린 아이를 네 시까지 어린이집에 두는 것도 마음 아픈 일이었지만, 젊은 부모에게도 쉽지 않은 육아를 은퇴하신 부모님께 의탁한다는 것이 무엇보다 부끄럽고 괴로웠다. 부모님께 안겨 드린 육아의 수고로움, 그것만큼은.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평생 어찌 갚아드려야 할 지 모를 막막한 은혜로, 결코 씻어지지 않는 커다란 죄스러움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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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자만으로도 쉽지 않을 엄마의 고된 살림을 덜어드리기 위해 남편은 부러 주말에만 처가에 오기 시작했고, 반길 사람 없는 빈 집에 들어가기가 쓸쓸해 늦게까지 마다 않고 일을 했다. 일을 열심히 하니 일은 점점 많아졌다. 일을 많이 하니 평판이 좋았을 것이고,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 지,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모르나 덕분에 과장으로 빠른 승진도 하게 되었다.
갓 돌을 지난 아이는 목동에서도, 일산 시댁에서도 어린이집에 다녔고 기특하게도 매번 잘 적응해 주었다. 하지만 감기를 달고 지냈고, 늘 코를 흘렸으며, 자주 아팠다.
생활에 필요한 돈을 버는 떳떳한 엄마도, 일을 하며 자아를 실현하는 멋진 엄마도 무엇도 아니었기에 아이가 아플 때마다 내 중심은 세차게 흔들렸고 공부를 시작한 결심이라치면 수 천번도 더 후회했다. 돌아갈 수 있을 만큼 왔을 때 돌아갔어야 했다고. 후회하고, 또 후회하면서도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는. 어딘가에 깃발을 꽃아야만 이 산을 내려갈 수 있다고 믿으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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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도 내 부모님도 내 남편도, 모두가 괜찮아 보이는 날이야말로 비로소 나에게 다행한 날이었지만, 엄마와 아내, 시집간 딸이 했어야 할 역할을 조각 조각 나누어 가진 채 모두가 만족하는, 모두가 행복한 나날이 이어지기는 쉽지 않았다. 거의 매일 울었고 대체로 불행했다. 공부도 생활도 힘들 것이 없었다. 나 혼자라면. 혼자라면. 하지만 혼자가 아니라서. 너무 미안해서. 너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너무나 미안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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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가족의 수고로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아이를 떠올릴 때, 사무치는 마음에 위로가 되어 주던 노래 Mama don't worry. 제목 그대로 베껴 적어 매일 머리맡에 붙여 두었던 포스트잇. 철 없는 엄마의 늦깎이 수험은 그렇게, 하루 하루 더 비장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