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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밤 Sep 22. 2020

파리에 가다, 오빠 찬스로.

덕분이야. 되는 일은 없어도 복 있는 인생.

아주 어릴 적부터 쭉, 다섯 살이나 많은 오빠는 나의 보호자였고 친구였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사진 속의 시간 속에도 오빠는, 포대기에 싸인 갓난쟁이, 나를 안고, 장난기가 가득한 표정으로 히죽, 웃고 있다.


우리는 집 안에만 있어도 하루종일 그렇게 재미가 있었다. 온 집안이 물바다가 되도록 치열한 물총싸움을 하기도 하고, 지금 생각하면 아찔할 만큼 불장난도 숱하게 했다. 종이 비행기에 불을 붙여 날렸다가, 놀이터 화단에 떨어진 불씨를 찾아 물뿌리개를 들고 정신없이 뛰었던 위험 천만한 기억도 있다.


집 안에서 공 놀이를 하다가 어항만 두 번을 깨 먹었는데, 아끼던 물고기들도 다 죽을 것 같고 엄마한테 제대로 혼도 날 것 같고.. 허옇게 질려 엉엉 우는 내 앞에서, 퍼덕거리는 고기들을 주워 욕조에 모아 두고는 걱정 말라며, 쏜살같이 자전거를 달려 어항을 사서 돌아오던 오빠는, 얼마나 어른 같고 멋져 보였던지.


그러니까 오빠는ㅡ이미 고학년이던 초등학교 등굣길ㅡ코흘리개를 창피해하지 않고 교실에 데려다 줄 수 있었던, 태생적으로 마음 착한 어린이였다. 중학생. 한창 사춘기에 접어들었을 그 시절에도, 친구들이 놀러 오면 어떻게든 같이 끼어보려는 귀찮은 어린이를 꽤 자주 놀이에 끼워 주는 보기 드문 소년이었다. 수능을 앞둬 한창 예민할 고3. 엄마 몰래 기어이 방으로 숨어드는 철부지 방해꾼을 쫒아내지도 못하는 맘 약한 수험생이었고, 대학생이 되어 무려 여자친구가 생겼음에도 기꺼이 나를 소개해 주고, 가끔은 함께 밥도 먹게 해 주었던 의리의 사나이였다.

잡동사니 가득한 서랍에, 백 원짜리 동전이 잔뜩 굴러다니던 오빠. 몰래 가져다 쓰는 걸 알면서도, 매번 눈감아준 오빠.

슬램덩크 만화에 푹 빠져 있던 초딩 시절, 정말 갖고 싶었지만 그저 희망사항일 뿐이었던, 만 원이 훌쩍 넘는 고가의 브로마이드. 생일 날 잠겨진 방문 한 가운데 붙어 있던 카드와 봉투 속 열쇠.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가자, 인버터 스탠드 조명을 받으며 짠 하고 벽에 걸려 있던 브로마이드. 세상을 다 가진 듯 했었다. 어린 내 눈에 그토록 부유해 보였던, 하지만 단 한 번도 인색하지 않았던 나의 든든한 뒷배, 오빠.


엄마가 집을 비우면 살 찐다고 못 먹게 했던 양념 통닭을 시켜 주던 오빠. 예정보다 앞당긴 귀가로 치킨을 맞닥뜨린 엄마의 불벼락같은 호통에, 놀라 닭다리를 툭 떨어트리던 나를ㅡ물론 살은 쪘지만! 먹고 싶은 건 먹어야 한다고ㅡ꿋꿋이 변호해 주던 오빠.

그런 오빠가 집을 떠난 이후로 편 들어줄 사람도 없이 엄마에게 더욱, 자주 혼쭐이 나게 된 서러운 고딩. 무작정 자취방을 찾아가 질질 짜는 나에게 짜장면을 사주고, 부지런히 휴지를 뽑아주고, 똥차였지만 드라이브도 시켜주곤 했던 영원한 내 편, 오빠.

성인이 되어 대학로에서 함께 먹었던 맛나분식 떡볶이와 최신유행 레드망고 아이스크림. 심야영화로 아이언 맨을 보고, 박효신 콘서트도 가고, 쇼핑도 하고 술도 마시고 노래방도 다녔던 친구같고 애인같던 오빠.

동생 미국 간다고. 공항까지 배웅하며 군대 보내는 것처럼 울었던 오빠. "그때의 너도 이곳에서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렇게 부러워하던 도시에 아주 한참 뒤에야 떠날 수 있었음에도, 잊지 않고 나에게 예쁜 엽서를 보내준 오빠. 무려 출국장 면세점에서부터 동행했을 내 인생 첫 명품 가방을 한 달 내내, 늘어가는 짐 속에 떠메고 다녀준 다정한 오빠.

이십 대 초반, 쓰레기같은 남자친구를 못 잊어 끌려다닐 적에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씩씩대며 찾아가 주었던 오빠. (비록 험한 말 한 마디 못 하고 돌아왔지만.)

지금의 남편과, 아빠가 염려하시던 결혼을 밀어붙일 때에는 누구보다 내 편이, 우리의 편이 되어준 오빠. 셀 수도 전부 기억할 수도 없는, 무수하고 빼곡한 날들 속의 고마움.

첫 임용고사를 치르러 가던 날, 나도 안 간 새벽기도를 다녀온 오빠. 비에 젖은 올림픽대로를 달려, 꽤 먼 시험장까지 나를 데려다 주었던 유난스런 나의 보호자, 오빠.

그리고 수 년이 흘러, 아줌마가 되고 아이 엄마가 되어 다시금 수험과 낙방을 겪고 있던 나에게 오랜만에 걸려온 전화 한 통.

 

고생 많았다며. 뜬금없이 유럽에 다녀오라던 오빠. 크게 부자도 아니면서, 나와 남편의 몫까지 무려 두 장의 비행기 티켓을 끊어준 오빠. 엄마 아빠에게 우리 부부의 여행을 위해 주원이를 봐주실 수 있느냐는 부탁마저 대신해 준 오빠.

파리를 안 가봤으면 파리부터 가야 한다고, (어차피 아무데도 못 가본..) 우리를 파리로 보내버린 허세스런 오빠. 맛도 모르고 멋도 모르는 우리에게, 미슐랭 스타 식당까지 예약해 준 미식가 오빠.

사실 정말 고마웠는데. 쑥쓰러워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그 여행이 우리에게 얼마나 귀한 여행이었는지. 인사도 제대로 못한 것 같아. 정작 나는 오빠가 힘들 때, 짜장면도 못 사주고 밥도 술도 못 사준 것 같아. 미안해.


되는 일 없는 내 인생. 그래도 나라서 좋아. 다행이야, 오빠가 내 오빠라서. 언제나 좋았어. 나는 이미, 복 있는 인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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