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하고 쓰다: 북해도
남편에게 인생 영화가 있다면 2000년에 개봉한 ‘러브레터’다. 줄거리는 대충 이러하다. 중학생인지, 고등학교 동창생이었던, 후지이 이츠키라는 우연하게도 같은 이름을 가진 두 주인공이 티격태격하다 정이 들었는데, 남자 주인공의 전학으로 수 년간 소식을 모르고 지내다가, 남자 주인공이 사고로 죽고, 그의 약혼녀가 하늘나라로 보내려던 편지가 동명의 여주인공 앞으로 도착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약혼녀는 여주인공과 도플갱어처럼 똑같은 외모를 가졌으며, 학교 도서반 후배들이 뒤늦게 발견한, 도서반 선배인 두 주인공이 추억을 쌓았던 도서관의 수많은 책 뒤에는 여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한 ‘후지이 이츠키’가 도배되어 있었더라..는 그런 이야기.
사실 사운드트랙이 더해주는 감동이 없었다면, 이야기만 놓고 보면 좀 괴기스럽고 소름 돋는 이야기다. 아무리 주인공 취향이 대쪽같다 해도, 뺨에 점 하나 찍는 성의도 없이 똑 닮은 외모의 여자를 좋아하는 설정이라니. 언제 들춰볼 지도 모를 책 속에 짝사랑녀의 이름을 도배하다니. 멀쩡하게 생겼을 뿐 전형적인 일본 오타쿠가 아닌가.
고등학생 시절 이 영화에 큰 감명을 받은 남편은, 현실에서는 첫사랑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여자와 결혼을 했다. 첫사랑은 첫사랑일 뿐이듯, 이상형 역시 이상형일 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십 년이 흘러 마주한 북해도의 황홀한 설원만은, 어린 시절 가졌던 순백색 풍경에 대한 그의 환상을 충족시켜 주었다.
우리는 긴 여행 내내 렌터카에서 러브레터의 ost를 들었다. 조금 괴기스러운 첫사랑 이야기라도 상관 없었다. 정말이지 눈 내리는 풍경과 어울리는 음악이었기 때문이다. 이십 오 년 간을 모태 솔로로 지내며 지켜온 남편의 환상을 부숴버린 나로써는, 조금이나마 죄책감을 덜어낸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