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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밤 Sep 22. 2020

설원에서의 노천욕

여행하고 쓰다: 북해도

리조트 안에 파도 풀장이 있다기에 별 기대없이 들렀던 곳이다. 쌓인 눈 가운데 갇혀 있는 듯한, 온실처럼 투명한 유리로 지어진 수영장이었다. 풍경을 즐기려면 낮에 왔어야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도 풀 치고는 붐비지 않고, 시시할 만큼 물결도 잔잔하다. 심지어 조용하기까지 하다.

늦은 시간이라 수영은 하지 않고 목욕만 하기로 한다. 그렇게 찾은 노천탕. 수영장에 딸린 작은 목욕탕 쯤으로 생각했는데,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기억 중 하나로 남았다. 목욕 시설은 평범하고, 실내 사우나는 규모가 작았다. 노천탕에만 한 시간을 앉아 있었다.


밝은 조명 없이, 달빛만이 흰 눈의 세상을 비추는 풍경. 숨을 멈추고 바라본다. 비록 발가벗었지만, 당장 몇 걸음만 벗어나면 아무도 없는 저 너른 설원에 두 발을 딛을 수 있을 것 같다. 안전하고 따뜻한 물 속에 반 쯤 몸을 담그고, 아득한 검은 밤, 겨울 숲을 바라본다. 내리는 눈을 느끼고 싶어, 부러 처마가 끝나는 지점에 가 앉는다. 드러난 뺨 위로, 어깨 위로, 차갑게 내린 눈송이가 뜨겁게 녹는다.


멀게 보이는 빽빽한 침엽수림, 밤의 적막함, 바람 소리, 영하의 찬 공기. 노천욕이라면 환장해온 나이지만, 이 날만큼은 단지 어허 시원하다든지, 경치 좋다. 의 느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매섭게 추운 겨울의 자연을, 따뜻한 실내에서 그림처럼 바라보거나, 두꺼운 옷과 머플러, 장갑으로 무장한 채 나서는 대신 원초적인 모습으로, 두렵고, 떨려오는 경외함으로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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