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하고 쓰다: 인도
어릴 적 '인도로 간 또또'라는 동화를 읽었다. 한국의 평범한 초딩 또또가 그림 유학을 떠나는 엄마를 따라 인도에 정착하며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또또의 진짜 이름은 준,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준의 엄마 선덕, 준과 선덕의 예수님 같은 친구 쟝, 그리고 낯선 땅 외로운 또또의 밥통 속에서 태어난 나나.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가득한 이 책을 늘 끌어안고 지냈다. 나이를 먹으며 더 이상 꺼내 읽지 않게 된 후에도, 누렇게 바랜 책을 신줏단지 모시듯 늘 책꽃이 맨 아래, 첫 칸에 꽃아 두었다. 그리고 그 때부터 간직해온 '인도'라는 나라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을, 스물 둘이 되던 해에 비로소 해소할 수 있었다.
2주간의 워크캠프와 3주간의 배낭여행. 지금 생각해 보면 다치거나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온 것만도 다행일 만큼 우여곡절 많았던 여행이다. 출국을 앞두고 다리를 크게 다쳐 몇 주간 기브스를 했고 신나게 곪은 상처는 다 아물지도 않았던 때다. 어렵게 도착한 뉴델리 공항에서는 택시를 타자마자 사기를 당해 얼마 가져가지도 않은 돈의 대부분을 잃었다. 덕분에 남은 일정 내내 배고픈 성인 둘이서 묽은 카레 한 그릇으로 식사를 때우곤 했는데, 비쩍 말랐지만 그릇까지 씹어삼킬 먹성을 가진 동행을 배려하려 기꺼이 한 두 숟갈 뜨고는 배가 부른 척 메소드 연기를 했다.
인도로 떠날 때 우리는 서로 알게 된 지 반 년 밖에 되지 않은 데면한 사이였다. 가장 친한 친구와 떠나도 싸우고 돌아오는 게 여행이라 했던가.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산전수전을 겪어내며 우리는 그저, 서로가 애틋하고 각별해질 뿐이었다.
자이푸르, 탈수증을 일으킬 듯한 더위에 천금같이 귀한 물 한 병을 구해 번갈아 가며 정신없이, 타는 목구멍에 불을 끄듯 들이 붓던 기억. 아그라, 인도 여행은 사절이라도 그 새벽의 신비로운 풍경만은 죽기 전에 다시 한 번은 더 보고 싶을 만큼. 아름다웠던, 타지 마 할. 동양인이 예의바르게 사리를 갖춰 입고 왔다는 이유로 열광하는 인도 사람들에 둘러싸여, 셀럽이 된 듯 같은 자리에서 사진을 백 장 쯤은 찍어주었다. 바라나시, 그토록 궁금했던 갠지스 강가에 도착하기도 전에 뜨듯한 소 똥을 쪼리 신은 맨발로 즈려밟고 시작. 말라 비틀어진 탄두리 치킨마저 아무런 인상을 남기지 못한 노잼과 공해의 도시, 뉴델리.
고아,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물 대포를 얻어맞는 듯 무섭게 퍼붓던 소나기. 휴양지라는 말에 한국에서 수영복까지 챙겨갔건만, 건기 우기도 모르고 찾아간 해변에서 돌멩이 구경만 실컷 한 게 전부. 홍해가 갈라지듯 여행객을 구경하는 동네 청년들의, 얼굴을 용접할 기세로 쏘아대는 진한 레이저 눈빛에 오싹하던 차에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리듯 190은 족히 되어 보이는 건장한 체격의, 한국말을 쓰는 형제를 발견했고, 살아 나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무턱대고 한국말을 들이대며 친한 척을 한 덕분에 머무는 내내 안전하게 다닐 수 있었다. 남달리 우애 좋던 부산 형제. 가는 곳마다 우체국을 들러 한국의 여자친구에게 손엽서를 부치던 순정남 둘째 오라버니. 모두 잘 계시겠지요?
피차 사심이라고는 1도 없는 담백한 일행이었지만, 둔해 빠진 내가 쪼리를 신고 해변의 암벽에서 열 번쯤 연속 자빠지자ㅡ옛다 하는 심정으로ㅡ스포츠 샌달을 벗어 주셨고, 헤어지던 날에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역까지 우리의 무거운 배낭을 대신 매어 배웅해 주시기도 했다. 저녁이면 넷이서 피자에 맥주를, 타향에서 한국말로 떠는 수다에 감격하며, 아름다운 동포애를 꽃 피웠던 고아의 추억.
첸나이, 워크캠프 시작. 화장실 지을 벽돌을 옮기다 창고에서 코브라가 나와 다 같이 기절할 뻔했던 일. 통근 버스가 끊겨버린 저녁, 히치하이킹(?)한 화물트럭 뒷칸에 스물 댓 명이 콩나물 시루처럼 서서, 덜덜대는 비포장 도로를 달려 숙소로 돌아왔던 일. 사기꾼과 협잡꾼, 느끼한 청년들이 넘쳐나 당황스러웠던 인도 땅에서 만난 순수하고 예쁜 아이들. 그 아이들에게 아주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 돌아왔기를 바라며. 뭄바이. 집에 갈 날만을 꿈꾸며 남은 경비를 탕진해 맘껏 밥도 사먹고 방 다운 방에서 잠을 청하자 비로소 여행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던 도시.
20키로쯤 되는 배낭을 메고 걷고 오르고 달리던 날들. 제 시간에 오는 법이 없던, 이재민 수용소 같던 기차역 대기실. 문은 장식일 뿐, 열려 있으나 닫히지는 않는다. 주렁주렁 사람을 매단 채 달리는 버스. 지붕 위에도 좌석은 없으나 사람은 탄다. 언제 누가 떨어져 다쳐도 이상하지 않을 극한체험 인도 버스. 밥 먹다 쥐에 놀라자 쥐도 우리의 친구라며 호탕하게 웃던 식당 지배인. 쥐는 양반, 드글거리는 바퀴떼를 목격한 뒤 슬리퍼칸을 끊어 놓고도 예닐곱 시간을 엉덩이만 걸친 채 졸다 내리던 밤 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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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속인 또또를 원망하며 편안한 고국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린 건 사실이지만, 모든 여행이 그러하듯 나쁜 순간만 있지는 않았다. 즐거워서든 허탈해서든 정말 많이 웃었고 강제 채식과 강행군으로 한 달만에 몹시 날씬해졌다.
네 개에 천 원 하던 길거리 망고는 그 어디에서 먹어본 망고와도 다른 부드러운 단 맛이 났고 백 원이면 마실 수 있는 가마솥(?) 짜이 역시 뭘 넣었는지는 모르나 스타벅스 차이 티 라떼보다 쌉쌀하고 개운한 뒷맛이 좋았다. 숨을 멈추고 바라볼 만큼, 아름다웠던 타지마할의 아침을 볼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여행이었다.
엉터리로 두른 사리에 정성스레 옷 매무새를 고쳐 주시던 할머니, 낯선 외국인을 반겨 주던 아이들의 웃는 얼굴도 사진 속에, 마음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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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무엇보다 이 여행은 우리 둘의 것이었다. 기대했던 인도 땅에는 숱하게 실망했어도 너와의 여행만은, 하루 하루가 즐겁고 소중했었어. 잊지 않으려 기록해. 십 삼년만에 인도 지도를 펴고 사진을 꺼내 봤어. 기억을 더듬거렸어. 너에겐 얼마나 남아 있을까? 평생 우리 둘만 간직할, 그 여름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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