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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밤 Sep 22. 2020

시 할머님을 보내드리며

불효 막심한 손주 며느리가

십 년이 더 되었다. 남편과 막 연애를 시작했을 무렵, 얼마 전 고관절 수술을 받으신 할머니가 본가에 올라와 계시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당신에게는 할머니가 있구나, 나에게는 이미 계시지 않는 할머니가.

불편해진 걸음걸이 외에는 여전히 매우 건강하시다는 말에는 신기해하고 또 부러워하며, 그 할머니가 내 할머니도 될 인연인 줄도 모른 채, 잡수실 떡을 사서 들려 보낸 날이 있었다.


그리고 몇 년 뒤, 결혼식을 몇 주 앞둔 주말 나는 남편의 할머니이자 나의 시 할머님이 될 그 분을 처음으로, 만나 뵈었다. 제대로 예절을 갖추어야 한다는 엄마의 성화로 한복에 두루마기까지 차려입고서 말이다. 할머니가 살고 계신 문곡리 시골집을 시작으로 아버님의 외가이자 할머니의 친정ㅡ마을을 여전히 지키고 계신ㅡ어연리의 어르신들과 수원의 작은할아버님 댁까지. 한 끼 내어달라는 숟가락만 들지 않았을 뿐 그날 하루 얼마나 많은 집 대문을 두드렸는지 모른다.


우리의 결혼이 그리 중한 일도 아니실진대. 바쁘신 어른들께 굳이 시간을 청하여 결혼식에 와 주십사 일일이 말씀을 올리는 일이라니. 우리 아버님께서는 지나치게 예의를 차리시는구나. 조금은 그렇게 생각했었다.

추운 겨울에 한복 두루마기를 입혀 보낸 우리 엄마는 또 어떻고. 명절도 아니요 그 댁 며느리도 아니요. 속고쟁이에 두루마기까지 갖춰 입은 이 여인은 누구란 말인가. 처녀귀신이란 말인가. 심지어 아파트에 사시는 수원 할아버지. 어린 손자, 손녀들까지 함께 있는 그 댁에 정말이지 TPO 중 단 한 가지도 맞추지 못한 과한 복장의 조카며느리가 되어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현관문을 들어설 때에는 속으로 얼마나 엄마를 원망했던지 모른다.


그렇게 다소 뜬금없었던 방문, 몹시 지나치게 과장되었던 복장을 의외로 마음에 꼭 들어하셨던 분은 할머니셨다. 연두색 저고리에 붉은 색 치마. 새색시스러운 한복이 곱다고. 할머니는 몇 번이나 말씀하셨다. 비록 다른 많은 사람들을 생뚱하게 했을지언정, 그 날의 한복은 할머니를 만족시킨 착장이었다.


결혼식을 올린 해 시할아버님의 제사와 주원이가 태어난 해의 추석 명절, 할머니를 뵈었다. 할머니는 맨발이었던 아기에게 양말을 신겨야 한다는 말씀만을 수없이 반복하셨다. 고관절 수술의 후유증으로 치매를 앓고 계셨고, 그 해를 마지막으로 무려 장손인 남편과 손부인 나는 이후로는 어머님, 아버님을 따라 할머니를 한 번 찾아뵙는 일도 없었다. 갓 낳아 보여드렸던 그 어린아이가 키 큰 일곱 살이 된, 그 긴 시간동안 말이다. 아이가 자라나는 생명력만큼이나 할머니 생의 불꽃도 부지런히 타고 있으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지난 가을, 남편의 사촌동생이 결혼식을 올렸고 평택의 예식장에 들른 후에는 가까운 문곡리 시골집에, 다같이 할머니를 뵈러 갈 계획이었다. 할머니가 알아보실 수는 없더라도 돌아가시기 전, 증손주를 한 번 더 보여 드리는 것이 도리이리라,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날 어머님을 모시고, 함께 출발한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아이는 까닭 없이 갑작스런 고열과 복통을 일으켰고 이미 한참 떠난 길 위에서 차를 돌린 나와 아이는 성모병원 응급실 앞에 내리고 말았다. 그렇게 결혼식은 물론이고, 할머니를 찾아뵈려던 일도 다음으로 미루어졌다.


올 여름. 구십 삼 세의 생신을 지나신 할머니가 이제는 오래 버티지 못하실 것 같다는 부모님의 말씀을 듣고도 어째서였을까. 아이와 꼭 한 번은 다시 찾아뵈려던 마음은 마음 뿐. 당장에 이번 주말은, 이 다음 주말은 아니었다. 바쁘지도 않은 일정을 핑계로, 코로나를 핑계로. 곧, 언젠가를 기약할 뿐이었다. 그리고 지난 주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칠 년 전 그 날. 어연리 어느 댁 벽에 걸려 있던 오래된 흑백사진 속에서 조금 더 젊고, 훨씬 더 어린 시절의 할머니 얼굴을 발견했을 때, 나는 왠지 묘한 기분이었다. 이미 팔십을 훌쩍 넘긴,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아오신 검고 쪼글쪼글한 피부의 시골 할머니에게도 빛나던 젊은 시절이 있었으리라고는 상상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처음부터 할머니는 할머니인 채, 엄마는 늘 엄마였던 줄로만, 그리고 내 인생은 영원히 꿈 많은 청춘일 것만 같았던 새파랗게 철 모르던 젊음이었다.


시간은 흐르고, 무섭기만 했던 내 엄마는 내 아이의 인자한 할머니가 되고, '엄마'라는 호칭은 마치 처음부터 내 것이었던 것처럼, 나에게 너무나 익숙한 것이 되어 있는 사이, 할머니도 늘 그곳에 머물러 계신 것이 아니라는 걸 여전히 모르고 있던 이른 날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코로나가 폭발적인 확산 기로에 있던 주말이었다. 아이를 장례식장에 데리고 갈 수가 없어 가까운 친정의 부모님께 무려 2박 3일을, 부탁드려야만 했었다. 엄마는 불과 하루 전 제법 큰 잇몸 시술을 받고 채 상처도 아물지 않은 때였다.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아이는 역시나, 걱정할 것도 없이 할머니, 할아버지와 신나는 시간을 보냈고 엄마도 다행히, 분명 피곤하고 수고스러우셨겠지만, 훌쩍 커버린 손주와 모처럼 함께 잠에 들고 눈을 뜨며 기억에 남을 만한 시간을 보내신 것 같았다.


'할머니..'


목동에 두고 온 주원이를 떠올리며 나의 할머니가, 남편의 할머니가. 우리에게 얼마나 가까운 존재였는지를 생각했다. 우리가 태어났을 때 부모님 만큼이나 기뻐해 주셨던. 우리를 먹이고 씻기고 기꺼이 돌보아 주셨던.




칠 년 전 인사를 드렸던 수원의 작은 할머니, 할아버님께서는 아흔에 가까운 연세에도 불구하고 삼 일 내내 손님 없는 장례식장을 함께 지켜 주셨다. 초등학생이었던 손주 둘을 거뜬히 돌보시던 내 기억과는 달리, 불과 몇 년 만에 몸도 무척 마르셨고 기운을 잃으신 모습이셨다. 그 날, 내내 곁에서 책을 읽고 있었던 그 똘똘한 어린아이가 올해 벌써 대학생이 되었다는 깜짝 놀랄 소식도 전해들었다.

아이는 금세 어른이, 정정하던 어른께서는 어느덧 노인이 되어가는 것. 그 누구도 막지 못하는 것이 바로 시간이고 세월인 것을. 이제는 나도 느낄 수 있었다.


칠 년 전. 지금껏 무리한 요구라고는 한 번도 하신 적 없는 아버님께서 집안의 모든 어른들을 찾아뵙기를 부탁하신 그 뜻을 이제는 알 것도 같았다.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내어 드릴 시간이 많지 않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을 내어 얼굴을 뵙고, 인사를 드리는 그 어렵지 않은 일조차 맘껏 하지 못하고 후회하는 것이 흔한 삶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어른들은 우리를 기억하지 못하실지라도, 우리가 그 분들을 알고 기억하기를. 어른들이 세상을 떠나고, 한 세대가 끝이 난 뒤에도, 우리들이 그분들의 얼굴과 이야기를 기억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일 것이다.


할머니의 영정 앞에서 삼 일을 머물면서도 나는 사실 크게 슬프지는 않았다. 천수를 누리신 구십 삼 세의 연세와, 고통 없이 노환으로 돌아가셨다는 사실만으로도 감히, 축복이시리라는 생각이었다. 대신 나는 그 영정 앞에 죄송스러웠고, 부끄러웠고, 너무나 뒤늦은 후회를 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결국 한 번을 더 찾아뵙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이제 다시는 증조할머니를 만날 수 없게 된 아이에게 아빠의 '할머니'를, 자신의 뿌리를, 기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못한 것이 뒤늦게, 너무나도 미안하고 후회스러웠다.


할머니는 어린 시절을 보낸 어연리, 시집을 와 평생을 사셨던 문곡리, 그 중간쯤 자리 잡은 시민공원 납골당의 가장 볕이 잘 드는 자리에서, 영면에 드셨다.

화장터로 떠나기 전, 할머니의 관을 실은 운구차는 문곡리 시골집과 동네 어귀를 한 바퀴, 천천히 돌아갔고 우리가 탄 전세 버스는 좁은 시골길에 들어서지 못한 채 운구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할머니를 보내드리고 돌아오는 길 남편과 나는 우리 차를 타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할머니의 시골집에 다시 들렀다. 나와는 아무런 추억도 없는 그 집에서 나는 부지런히 사진을 찍고, 아버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새겨 들었다. 그 이야기는, 언젠가 내가 내 아이에게 들려주어야 할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평택시 문곡 3리. 초가지붕을 얹어 시작했던 이 집터가 바로 네 할아버지가 농사를 도와 소를 치시고 네 아빠가 방학마다 내려와 지내던 곳이라고. 너의 증조할머니께서는 어연리 소씨름 대회에서만 몇 관왕을 차지한 장사 집안에서 시집오신, 아주 건강하고 대장부 같으셨던 할머니셨다고. 내 아이에게, 그리고 내 아이의 아이에게. 오래 오래 구전되어야 할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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