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되, 여전히 전진해야 할 때.
어제까지는 그렇게까지 춥지는 않았는데, 오늘부터는 매서운 바람이 불면서 기온이 급강하했다. 정확히 1년 전인 2024년 12월 3일밤에는 이렇게까지는 춥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건 그때보다 내 마음이 더 추워져서일까? 그때는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지금 당장 계엄을 막아야만 한다는 단순한 생각뿐이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났는데, 오히려 내 마음은 더 무겁고, 복잡해진 것 같다.
방송에서, 신문에서, 1년을 돌아보면서 여러가지 기획기사들을 쏟아내고 있는 것은 전체 국민들에게 다시 한 번 경각심을 환기시키는 측면에서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계엄이라는 수단을 동원해서 내란을 획책한 숨어있는 세력들에 대한 발본색원 (拔本塞源)과 합당한 처벌을 통해서, 재발을 근본적으로 막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직도 제대로 된 법적 처벌은 진전이 더디고, 오히려 이 과정에서 법적 판단이 언제나 일반 국민들의 상식에 부합하지는 않는다는 아픈 사실이 확인이 되고, 오히려 "법기술자"들에 의해 극단으로 치우친 선동이 여전히 일부의 사람들을 잠식하고 있는 것이 명백해졌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된다면, 우리 사회는 그간 반세기 넘게 숱한 희생과 노력을 통해 우리 모두가 쌓아올린 민주주의 시스템과 국가적 성취들을 계엄을 통해 한순간에 무너뜨리고, 소수 극단적인 권력집단의 사적 이익을 위해 국가 전체를 복속시키려고 했던 일단의 무리들을 용인하는 꼴이 되지 않을까? 그것은, 언젠가는 다시 또 이러한 비극을 초래하는 불씨와 뇌관이 되지 않을까? 이런 걱정이, 작년 이날 밤 보다 1년이 지난 오늘밤이 내게는 더 추운 이유이다.
언젠가 집회 현장에서 커다란 깃발을 혼자서 힘겹게 받치고 선 한 젊은이를 보았다. 그 깃발에는 "국민이 주인이다" 라고 씌여 있었다.
동의한다. 국민이 주인인 나라, 민주주의 (民主主義). 늘 우리는 이말을 입에 달고 살아왔지만, 정작 주인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제대로 이해하고 행사해왔는지 나는 회의한다. (부연하자면, 나는 국민(國民) 이라는 말보다, 시민(市民,Citizenship)이라는 말을 더 좋아한다. '황국신민(皇國臣民)'의 줄임말로 알고 있는 국민이라는 단어가 주는, 국가의 이념과 지향에 무비판적으로 동화되어 복종하는 느낌보다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야말로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입니다." 라는 투박하지만 한없이 뜨겁고 순수했던 어느 경상도 남자분의 말에 깊이 공감하기 때문에...)
평시에 계엄이 공포되었고, 계엄포고문의 내용을 실시간으로 방송으로 다 보고 듣고도, 그 위법성에 대해서 판단이 필요했다는 식의 변명을 늘어놓는 일부 국회의원들과 고위 공직자들, 정작 법을 잘 아는 그들의 모습에서, 그리고 그들을 여전히 지지하는 일부 국민들의 모습에서 나는 여전히 우리 사회가 갈길이 멀다는 뼈저린 자각을 확인할 수 밖에 없다.
사실, 백성 민(民)의 한자 어원은 눈(目)을 칼(刀)로 찔린 이들이라는 해석을 읽은 적이 있다. 전쟁에서 포로로 잡히거나, 빼앗은 나라의 백성들을 노예로 삼거나 저항력을 상실하기 위해 한 쪽 눈을 찔렀던데서 유래한 단어라는 해석은 끔찍하지만, 내게는 매우 그럴 듯 했다. 소위 백가지 성씨 (百姓)들의 사람들은 다 통칭해서 '민'(民)으로 불리웠지만, 왕족/귀족이나 고관들은 '인(人)'으로 불리지 않았던가. 그래서 정말 "모든" 사람들을 지칭할 때는 소위 "인민 (人民)"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던가.그렇다면, 지금 우리 사회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사람들은 정작 자신이 "民"으로 취급받으면서도 제대로 된 두 눈으로, 자신만의 명철한 시각을 갖고 사회와 역사를 바라보고 있는지 나 자신부터 돌아보게 된다. '정치人', '언론人' 혹은 '법조人' 들이 이야기하는 것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기만 하다가 결국은 그냥 백성 民으로만 남게 되는 일은 없어야 하니까. 민주주의가 정말 '중우(衆愚)정치'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그 경상도 남자분의 말씀처럼,대다수 시민들이 "깨어서, 함께 하는 힘"을 가질 때, 가능한 것이 아닐까?
1년이 지나는 과정에서, 여러가지 희생과 고통들이 따르고 있지만, 그것은 우리가 따갑게 맞아야 할 독한 예방주사일 뿐이다. 그 주사를 이겨내면 비로소 면역이 획득되는 예방주사가 되겠지만, 이겨내지 못한다면, 그 주사액속에 있던 병균에 의해 정말 병에 걸리고 말것이다. (중앙일보 2025년 12월 3일자 인터뷰 기사 링크 참조: [단독] 계엄의 밤, 軍차량 막은 회사원·707 맞선 대학생 "화합의 길 가야" | 중앙일보 (joongang.co.kr))
오래 전 군 복무 시절, 한쪽 눈을 철사에 찔려서 부상을 입었던 나야말로 진정한 백성(民) 아닐까? ^^ (브런치의 관련 글, 군대생활 에피소드 1-(1) (brunch.co.kr)) 그러나, 다행히 나는 부상에서 회복되었고, 여전히 두 눈으로, 제대로 균형잡힌 시력과 시각으로 나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려고 분투하는 중이다. 참고로, 내 이름의 '민'은 백성 民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가을하늘 민'(旻)이다.
우리는 1년 전을 회고하면서, 동시에 후대들의 100년을 바라보면서, 잘못을 바로잡고, 시스템을 비가역적으로 개선하고, 모두가 아니 대다수가 동의할 수 있는 제대로 된 민주주의의 전범(典範)을 확립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직은 갈길이 멀다. 하지만, 아무리 추워도 우리에게는 은박담요를 두른 "키세스단"이 있고, 화려한 응원봉과 K-pop으로 신명나게 놀면서도 할일을 하는 우리 민족 특유의 근성과 끈기가 있다고 믿는다. 한편으로 우려했던 젊은 세대들이 오히려 내 나이때의 사람들보다 더 정확히 상황을 보면서도 더 즐겁게, 덜 무겁게 행동을 함께 해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작년 오늘보다 훨씬 춥기는 하지만, 나도 마음만은 덜 무겁게 하려고 노력중이다. 바로 1년전 오늘, 국회앞으로 나처럼 달려갔던 수많은 동료시민이자 이웃들에게 감사하며, 이런 의미있는 기록 수집을 해 온 뉴스토마토 K-평화연구원에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