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섬, 두려움, 새로움, 그리고 넓어짐.
낯선 나라를 처음 갈 때, 특히 혼자 갈 때는 약간의 자유로움과 설레임도 있지만, 알 수 없는 두려움도 있다. 누구를 만나게 될지, 어떤 장소일지, 어떤 일을 겪게 될지. 거기서 오는 두려움이 새로움으로 바뀌고, 익숙해지면 그것은 넒어짐이 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고대부터 기하와 대수에 밝았던 이슬람 사람들이 아라비아 숫자 체계를 고안해 내고, 복잡한 양식의 건축물들을 아름답게 잘 만들어 냈다는 것을, 우리 나라 사람들은 잘 잊는 것 같다. 주로 서구인의 시각에서만 이슬람을 바라보다 보니, 무슬림들이 예전부터 얼마나 나름대로의 찬란한 문명을 이뤄냈는지를 간과하는 것 아닐까?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무슬림들이 존경하는 이븐 할둔과 같은 위대한 사상가, 역사가도 있는데..
우선 모로코에 처음 가서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건물이나 문양들의 정확한 대칭. 이란이나 터키에서도 그랬던 것 같다. 건축물들의 외형이나 내부 구조도 지나치리만큼 대칭에 집착하는 듯. 엄밀한 수학적 (기하학적) 대칭을 구현해 내어야 아름답다고 느꼈던 것일까? 고대의 이들이 지금 우리 동대문 DDP를 보면 과연 뭐라고 할까?
건물이나 가구에 새겨진 문양들 자체도 왜 그렇게 대칭을 좋아하는지. 참 신기했다.
그러나 자꾸 보다보니 또 그냥 그런가보다, 새롭지 않게 된다. 이러한 익숙해짐에, 지식과 정보가 뒷받침되지 못하면 그건 넓어짐이 아니라, 타성이 되어 버리는 것 아닐까? 신기함과 새로움을 알아채지 못하는 무감각으로.
몇 번 가보지는 않았지만, 모스크에 가보면 안뜰이 모두 타일로 되어 있고 아주 넓다. 왜일까? 아마도 이들의 제사(예배)때 쓰이는 희생제물들을 준비하는 곳이라서 그럴 것으로 생각한다. 바쳐질 동물들의 껍질을 벗기고, 각을 뜨고, 그 과정에서 계속 물을 흘리면서 작은 시내처럼 흘렀을 피를 씻어내야 하니까 한결같이 타일로 바닥을 만들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나는 예루살렘에는 가본 적이 없지만, 아마도 유대교 성전도 이런 공간이 있지 않을까? 두 종교만이 자신들의 신께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 같다. 유럽의 유서깊은 성당들 어디에도 이런 공간은 없었는데. 그런 상상은 두려움을 준다. 마치 내 모로코 친구들 (남성)이 직접 양이나 염소를 잡아 라마단 종료일을 준비하는 것을 보면, 이들에게는 닭도 못잡는 내게는 없는, 대담함과 어쩌면 잔혹함 (?), 아니면 종교적 열심이 있나 보다. 얘기를 들어보면, 목 어느 쯤에 심장이 있는지를 경험적으로 알고, 벤 후 손을 넣어 단번에 숨통을 끊는 것이 동물의 고통을 줄이는 Know-how라고 한다. 예전에 IS대원들이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인질로 잡힌 포로를 참수하는 것을 보면, 수십년 직접 양과 염소를 잡아 온 사람들이기에 어쩌면 그 행위가 오히려 고통을 단번에 끝내는 사악한 배려 (?)라고 생각하지 않았을지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그런 사실을 인지한 이후에는 특히 이슬람 국가에 출장을 갈때면 항상 내 SNS에 나의 현재 위치를 알 수 있는 포스팅을 하는 버릇이 생겼다. 주로 혼자 다니다보니 혹시라도 무슨 일 생기면 동료나 가족이 나를 찾을 수 있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비로소 광야와 사막을 다니면서부터 성경에서 언급되는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라는 말이 항상 척박하고 황량하기조차 한 환경에 사는 이들에게는 얼마나 달콤한 위로와 희망이 되는 말이었을지를 이해하게 됐다. 나도 열심히, 잘, 살다가 나의 목자되신 분께로 돌아가는 꿈을 꾼다.
베르베르족의 글자 중 한글 자모와 비슷해 보이는 것들이 몇 개 있다. 그 곳 친구에게 물어보니 이 역시도 그들이 아주 오래전부터 써 온 글자라고 한다. 이들이 우리 세종대왕님 것을 베꼈나? 알 수는 없지만 흥미로운 일이다.
이제는 새로움보다는 익숙함이 편한 나이가 되었다. 그러나, 필요하다면 다시 또 새로움을 두려움이 아니라 넓어짐으로 만들 수 있는 그런 경륜이 내게도 쌓이길 스스로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