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회사에는 사내 음악 밴드 동호회가 있다.
음악이 곧 인생인 부장님에 의해 조직된 밴드다. 멤버는 부장님과 차장님과 과장님과, 나다.
악기라고는 전혀 다룰 줄 모르는 내가 멤버로 합류하게 된 것은 ‘자발적’인 과정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밴드 제작자와의 원활한 소통의 실패’로 시작된 인연이라는 게 맞겠다.
제작자인 부장님은 모든 대화를 긍정적 메시지로 받아들이는 성향을 지니신 편이다.
처음은 멤버가 아닌, 밴드 매니저를 담당하라는 제안이 먼저였다.
밴드 구성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을 즘, 제작자이자 멤버인 부장님이 나를 부르셨다.
“유자씨, 우리 밴드가 앞으로 공연을 하려면 홍보, 영상 촬영, 일정 조율 등을 담당할 매니저가 필요합니다. 내 생각엔 유자씨가 매니저 역할을 해줬으면 하는데..” 부장님의 제안(이자 직장 내 보이지 않는 권력의 작용)이었다.
고백하건대, 사내 동호회 가입을 희망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음악 활동에 적극적 의지를 다지고 계신 직장 상사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할 수는 없었다.
“제가 요즘 바쁘기도 하고.. 바로 말씀드리기는 어려워서 한 번 고민해보겠습니다, 부장님”
이라는 답변을 남긴 채 ‘어떻게 적당히 거절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다음 날 아침, 회사 사무실에서 만난 선배들이 내게 물었다.
“유자씨, 밴드 매니저 하기로 했다면서요?”
“네? 제가요..? 전 처음 듣는데요..”
“부장님이 말씀하시던데요?”
이것이 서동요 기법(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이미 일어난 것처럼 말하는 기법)인가.
업무시간에도 직원들의 문의는 계속됐다.
- 유자씨, 밴드 매니저라고 해서 연락드려요. 업무보고에 필요한데 밴드명이 어떻게 되나요?
- 유자씨, 매니저한테 연락하면 된다고 해서요. 공연 플레이리스트가 어떻게 돼요?”
그렇게 난 공식적으로 밴드 매니저가 되었다.
그러나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우선, 밴드와 나의 음악 정체성은 너무나 달랐다. 밴드는 락/헤비메탈을 지향했고, 나의 음악 성향은 서정적인 멜로디였다. 매니저가 되는 운명까지 막을 순 없더라도, 최소한 나를 위한 장치를 마련할 결심은 필요했다. 부장님을 찾아갔다.
“부장님, 제가 매니저가 되려면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 공연 플레이리스트 선곡에 제 의견도 반영해주십시오. (음악적 견해 차이를 줄이기 위함이었다.)
둘째, 키보드 담당 멤버에게 틈틈이 키보드 치는 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취미 하나쯤이라도 남겨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이 정도 조건이 받아들여진다면, 매니저로 활동하는 것도 나름의 추억이 될 순 있겠다 싶었다.
다음 날 선배들은 내게 말했다.
“유자씨, 부장님한테 들었어요. 매니저가 아니라 멤버가 되고 싶다고 했다면서요? 상당히 적극적인데요?”
이렇게 해서 마치, 아침 식사로 샌드위치와 삼겹살을 동시에 먹는 것만큼이나 이질적인 밴드 연습생 생활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