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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선 Aug 25. 2023

어쩔 수 없어

체념과 한계

어느 날, 내가 아이에게 "어쩔 수 없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날 하루만도 몇 번은 한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한 말을 내가 듣고 깜짝 놀라는 일은 없었을 테니. 순간 아이에게 경계와 한계를 가르친다는 명목하에 포기를 가르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아이가 고집을 부리기를 포기하면 엄마가 편해진다.

아이가 자기 방식을 포기하면 엄마가 수월해진다.

나는 나도 모르게 내가 편하자고 아이가 내 말에 별 수없이 수긍하도록 "어쩔 수 없어"를 남발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어쩔 수 없다. 어쩔 도리가 없다. 별 수 없다. 방법이 없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은 지금 우리 부부가 서로에게 자주 하는 말이기도 하다. 치솟는 물가에 허덕이면서 중얼거리는 "어쩔 수 없지."는 갖고 싶은 것, 누리고 싶은 것을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할 때 건네는 체념이다. "내가 더 잘할 수는 없었을까?" 하는 나의 물음에 "어쩔 수 없지." 하는 남편의 대답은 위안의 말이 된다. 우리 부부의 "어쩔 수 없지"는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고 실망과 불안을 다독이는 말이다. 하지만 종종 남편이 자기도 어쩔 수 없다고 하면 이해는 하면서도 이상하게 서운할 때가 있다. 분명 아이도 그럴 것이다. 엄마를 이해는 하지만, 상황을 이해는 하지만, 서운한 것.


나는 어릴 때부터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많이 해왔다. 그것이 내가 나 자신에게 건네는 위로인 때가 있었다. 속 깊은 딸이고 싶어 대신해 주는 엄마 아빠의 변명이었던 때도 있었다.

엄마 아빠가 이혼했으니까 어쩔 수 없지.

아빠는 미국에 있으니까 너무 멀어서 그런 거야. 어쩔 수 없어.

네 남매를 키우는데 돈이 많이 들잖아. 어쩔 수 없겠지.

하지만 이 위로와 변명도 서러운 마음 앞에서는 힘을 잃었다.


언제부턴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은 나 자신에 긋는 한계선이 되었다. 뭔가 완벽하게 해내지 못할 것 같을 때, 무서울 때, 나는 변명의 꼬투리를 찾았다. 박사과정을 포기했을 때가 아마 대표적일 것이다. "돈이 없어. 박사 과정을 끝마쳐서 교수가 된다고 해도 빚에 허덕이게 될 거야. 어쩔 수 없네." 이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대해  나는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떠들어댈 수 있었다. 진정 "어쩔 수 없어"의 위대한 승리다.


내가 어떨 때 어쩔 수 없다는 말을 아이에게 하고 있는지 돌이켜 보았다.

아토피가 있는 아이는 과자를 많이 먹으면 안 된다는 걸 안다. 그래서 먹고 싶어서 물어볼 때도, "단 거 먹으면 안 되지?" 한다. 아이가 먼저 부정으로 물어보았으니, 다행히 나는 안 된다는 말을 하지 않고 긍정으로 대답할 수 있다. "응. 어쩔 수 없어. 의사 선생님이 먹으면 안 된다고 했지?" 응, 뒤에 숨은 (안 돼.) 엄마 대신 슬쩍 바꾸어 넣는 주어 "의사 선생님". 이렇게 보니 나는 좀 치사한 엄마다.

동생이 자기 장난감을 막 입에 넣고 있는 걸 보고 아이가 소리를 지르면, "그래서 엄마가 동생이 안 만졌으면 좋겠는 물건들은 위로 치워 두라고 했지? 아기는 어리니까 어쩔 수 없어." 방법을 알려주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동생을 이해해야 한다고 강요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도 내가 정말 어쩔 수 없을 때만 어쩔 수 없다고 하는 것 같기는 해서 살짝 안도했다. 하지만 여전히 어쩔 수 없다는 말이 가지고 있는 체념과 포기를 아이에게 자주 건네고 싶지는 않다. 이미 안 되는 걸 알면서 그래도 한 번 슬쩍 건네보는, 희망이 한 스푼 섞인 "안 되지?"라는 아이의 말버릇도 이미 충분히 마음 아프지 않은가.


어쩔 수 없다는 말 대신 건넬 수 있는 말이 무엇인지 고민해야겠다. 내가 조금만 더 의식하면, 더 긍정적인 말을 건네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하고 가능성을 열어줄 수도 있다. 아이가 고민하고 방법을 찾을 수 있게 살짝 대안을 제시해 줄 수도 있다. 한계를 설정해 주고 규칙을 따르도록 가르쳐야 하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지만, 그 선 긋기를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현명한 엄마가 되자고 오늘도 마음을 다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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