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무게와 시선
모든 일이 그렇듯이 나에게도 한마디로 정리되지 않는 일이 여럿 있다. 하루의 기상일보만 봐도 온도가 변화무쌍하기도 하고, 맑다가도 시커먼 비구름이 가득해지며 굵은 빗줄기를 쏟아내기도 한다.
가끔 우리는 자신의 일은 복잡한 실타래를 풀지 못해 발을 동동거리기도 하지만, 남의 일은 너무 쉽게 한마디로 정의하고 싶어 한다. 저 학생이 학교폭력 가해학생이었다거나, 그 집이 이혼가정이었다느니, 혹은 고등학생 엄빠라고 불리는 젊은 부부라는 등등의 사실과 적당한 거짓을 섞어서 결과를 귀추하여 단죄하고 싶어 한다. 판단과 정죄는 너무나 쉽지만 용서는 어렵고 사랑은 무겁게 느껴진다.
Happy families are all alike;
every unhappy family is unhappy in its own way.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도입부 첫 문장에서,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만의 방식으로 불행하다.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다.
개인마다 바라보는 행복은 여러 가지일지라도 궁극적으로 행복은 매우 단순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인간이 가장 원하며 만족되는 부분은 획일화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행복은 매우 단순해질 수 있다.
하지만 불행은 여러 가지 이유로 개인사정과 환경과 주변 인물이 너무도 다양하고 복합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단정할 수 없는 것이다.
때때로 주변에서 혹은 매체에서, 나의 삶 속에서 불행을 바라보는 것이 왜 힘들고 또 무시하고 싶어 할까?
생각해 보면 행복을 추구하는 마음이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너무나도 강렬하게 행복과 성공과 명예와 영광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 기저에 인간의 탐욕과 욕망이 끊임없이 샘솟고 있기 때문이며, 권력과 권세가 자신에게 주어진 특권이 될수록 그 사람은 사람의 한계를 넘어서는 신과 같은 존재가 되고자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노력과 성공은 비례하는 고독과 고통과 애달픈 수고가 따르며 정직하고도 정당한 결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정신은 더 많이 더 높이, 더 간절히 놓지 못하는 정욕을 가지고 살아간다. 머리로는 일고 있는 것, 만족을 모르고 살아가는 삶은 추하다. 감사가 없어지면 더 이상 명예롭지 못하다.
공감의 시작점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정의하지 못하는 나의 고통은 내 앞에 크게
다가온 여러 일들을 진심으로 공감해 줄 사람을 찾는다면, 내 곁에 살아가는 생각나는 그들에게 내가 원하는 모습 똑같이 공감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 어렵고 힘겹다. 공감은 바로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그 관점에서부터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월한 감정이나 내가 너 보다 낫다 하는 마음이라면 공감이 아니라 가벼운 판단이 된다. 내 것이 아닌 고통이나 타인의 감정에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내어주고 들어주고 함께 흔들리는 선택은 자기를 잠시 내려두는 일이기때문이다.
지금의 평온한 상태를 흐리고 싶지 않아서 나 역시 상담이나 고민을 들어주는 일을 터부시 하기도 했다. 그렇게 하는 일이 나를 지키는 일이 되며 또 불필요한 감정낭비를 줄이는 일이라 믿고 싶었다.
공감은 여전히 어렵지만 삶 그 자체의 의미를 알아가고자 한다. 모두가 살아가는 것에 절실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가슴으로 공감하고 크고 작은 노력이 그 공동체 안에 녹아져 있다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함께하는 삶 그 자체가 행복이며 축복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공감을 하되 타인의 무게를 섣불리 재려 들어서는 안 된다. 공감을 원하는 사람도 그 무게를 또 다른 누군가에게 짐 지워서도 좋지 않다. 그저 그 시선을 잘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타인을 바라보는 나의 주관적인 시선을 평온하고 온전하게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중심을 잡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나의 시선을 지키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