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놈은 사라졌지만 나는 계속 무너졌다.
슬프면 울고
지치면 멈추고
힘들면 말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그 마음이 이토록 간절해질 줄은 몰랐다.
예전의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럴 수 없었다.
슬픔은 사치였고
지치는 건 게으름 같았고
힘들다고 말하는 건 민폐 같았다.
그래서 참았다.
감정도 고통도 말도.
아무 일 없던 사람처럼 그렇게 살았다.
그놈이 내 삶을 망가뜨린 뒤부터는 더 그랬다.
그놈은 나를 해쳤다.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살아갔다.
그 후 나는 무너진 채 입을 닫았다.
조용히 하면 없던 일이 될 줄 알았다.
말하지 못한 고통은
내 안에서 커졌고
결국 감정을 삼키고 삼켜
감정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웃었다.
하지만 웃음 뒤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밥도 먹고 일도 하고 대화도 했지만
그 모든 일에 나는 없었다.
감정은 기능이 되었고
몸은 껍데기처럼 움직였다.
2016년, 그날 이후 나는 멈춰 있었다.
정말로 사라지고 싶다고 생각한 밤이 있었다.
이대로 조용히 사라지면
누구도 모를 것 같다는 생각.
사라진다는 건 죽음보다 덜 무서운 말이었다.
그만큼 고통도 감정도 무뎌져 있었다.
그때부터 몸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숨이 가빠지고
머리가 아프고
밤이면 자꾸만 깨고
눈물이 이유 없이 고였다.
감정은 죽은 줄 알았는데
몸이 계속 울고 있었다.
내가 모른 척한 동안
내 안의 고통은
몸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던 거다.
나는 끝내
그놈의 이름을 꺼냈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무서웠고 부끄러웠고
그 사람이 아닌 내가 더 잘못한 것 같다는 착각이
나를 수없이 막아섰다.
하지만 결국
공권력의 손을 잡았다.
이제는 안다.
멈춰야 했던 건 내가 아니라, 그놈이었다.
난 피해자고 넌 가해자다.
그건
내가 나에게 해준
첫 번째 보호였다.
그렇게 입을 열었는데도
상처는 끝나지 않았다.
그놈은 사라졌지만
그놈이 만든 공포는
내 안에서 계속 살아 있었다.
남자들이 다가오기만 해도
몸이 먼저 굳고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고
소스라치듯 도망갔다.
그 누구도 나를 때리지 않았지만
늘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 누구도 나를 해치지 않았지만
늘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웃고 있었지만
몸은 매일 ‘지금도 위험하다’고
비명을 질렀다.
결국 몸이 먼저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