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덕질이 반가운 이유
핸드폰을 스크롤링하는 아내의 얼굴이 연신 싱글벙글이다. 뭐, 심지어 헤벌쭉할 때도 있다. 지인과 통화를 할 때면 까르르거리면서 어머 어머 하기 일쑤다. 뭐가 그리 좋은지 한참 동안 핸드폰을 보며 혼자 웃고 있을 때가 많다. 그러다 지난 주말에는 갑자기 런닝맨을 봐야 한단다. 분명 런닝맨을 끊은 지 2년쯤 된 거 같은데. 그리고 오늘은 꼭 유퀴즈를 봐야 한단다.
아내가 드라마에 빠졌다. 선재 업고 튀어.
정확히 말하면, 거기에 나오는 남자주인공의 역할을 소화하는 배우 변우석에게 빠졌다고 할 수 있다. 런닝맨도 유퀴즈도 다 이 배우를 보기 위해서다. 아내는 요즘 소위 말하는 덕질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누가 그러던데. 덕질은 물량공세가 진리라고. 그래서인지 이러저러한 아내의 희망사항이 많아지고 있다. 곧 서울 팬미팅이 있는데 다녀오고 싶다고. 온라인에서 굿즈도 사고 싶은데 배송을 어떻게 받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저기 여보, 우리는 말이야 애틀랜타에 살고 있어.
수학 과학 철학을 사랑하는 나로서는, 마구 신이 나서 나한테 드라마의 줄거리를 설명해 주는 아내에게 표정하나 바뀌지 않은 채 입꼬리만 기계적으로 올린 채로 맞장구 쳐주는 것만으로 최대의 에너지를 쓰게 된다. 아 그렇다고 아내가 나의 그런 심드렁한 맞장구를 반긴다는 건 아니다. 가끔씩 못마땅한 표정으로 귀엽게 흘겨보며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갈 뿐. 암튼 줄거리는 현대 과학이론에 매우 위배되는 내용이라고 한다. 여주인공이 타임슬립을 한다고. 오케이, 난 일단 여기서 패스. 이토록 드라마 내용 자체에는 무관심한 나지만, (아내한테는 지대한 관심이 있으므로) 아내가 저리 좋아하면서 삶의 활력 같은 걸 얻는 걸 보면 이 드라마와 변우석 배우에게 새삼 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우리 부부는 삶의 극단적인 재미를 찾는 스타일이 아니다. 다이내믹한 부분이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아내는 늘 만나는 사람, 늘 돌아다니는 반경, 늘 하던 일을 반복적으로 하고 있다. 외부에서건 집안에서건. 나의 삶이 아내의 그것보다 더 무미건조한 건 당연지사이다. 비단 우리의 삶이 미국에서의 삶이라서 단조로운 건 아닐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늘 똑같이 길을 굴러가는 돌처럼 살고 있지 않을까. 직장을 다니던 육아를 하던, 둘 다 하던 말이다. 때론 좋은 취미를 발견하거나 일부러 새로운 도전을 하거나 해서 둥글기만 한 삶의 루틴에 자국을 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우리 부부에게 그런 건 잘 맞지 않았다. 그래서 아주 우연히, 그냥저냥 흘러가는 중에, 아주 재밌는 것을 찾아내면 너무 반갑다. 억지로 쓰고 싶지 않던 에너지를 써서 찾아낸 것이 아닌, 정말이지 우연히 선물처럼 다가온 순간이니까. 우리와 같은 삶 속에서 어떤 무언가가 순간이 아닌 조금은 지속적으로 웃음을 주고 활력을 줄 수 있다면 그건 잠깐 꼭 손에 쥐고 있어도 될만한 행복 아닐까.
어린 시절 매우 무더운 여름날, 소나기가 내릴 때 피하거나 우산을 쓰지 않고 그냥 맞곤 했던 기억이 있다. 나중에 엄마한테 혼날 걸 뻔히 아는데도 어깻죽지를 때려대는 소낙비를 맞으며 친구들과 골목길을 뛰어다니면 그게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골목 끝 모퉁이를 드리프트 하듯 달릴 때면 무더위는 이미 잊은 지 오래다. 헉헉 거리며 손을 무릎에 짚은 채로 친구의 얼굴을 보며 배시시 웃다가 깔깔 뒤집어지면 옆에 지나가던 어르신들이 재미난 녀석들이라며 한 마디씩 건네시거나 아이스크림이라도 사주시곤 했다. 햇살이 다시 구름사이를 비집고 들어오기 전에 희뿌연 습기 머금은 동네어귀가 참 아름다웠던 때다.
애틀랜타의 여름은 길다. 또 다른 무료하고도 반복되는 일상이 우리 앞을 기다리고 있다. 마침 이때 아내에게 소나기가 온 것이다. 아내가 흠뻑 그 소나기를 맞았으면 좋겠다. 좀 더 즐기고, 좀 더 웃고, 뭐 좀 더 헤벌쭉해도 된다. 난 그렇게 아내의 덕질을 조금은 더 지켜봐 줄 참이다. (어감이 좀 이상하지만) 필요하면, 아이스크림과도 같은 굿즈도 몰래 사줘 볼까.
그래, 좋잖아. 누군가의 덕질과 그 안에 피어나는 행복이라는 게. 선재를 업고 튀든지 말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