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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먼트 May 30. 2024

치명적인 척이라도 하고 싶었어

정체성 일탈 도모하기

지난 월요일 (5월 27일) 은 미국의 공휴일 중 하나인 메모리얼 데이였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했던 모든 이를 기리는, 미국판 현충일이라고 할 수 있다. 덕분에 나도 그날만큼은 일을 좀 쉬면서 느긋하게 가족들과 오전부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오전 중에는 조금 늘어져있다가 아이들의 공부를 좀 봐주고 나니 시간이 빠르게 흘러 곧 점심시간이 되었다. 점심 이후에는 각종 마트투어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내는 외출 준비에 분주했고, 점심 준비는 자연스레 내 담당이 되었다. 메뉴는 떡국. 마침 집에 남아있던 사골육수와 떡을 준비하고 파를 다듬었다. 그런데 칼질을 하는데 음악이 없으면 안 되지 않은가. 칼질은 리듬이 생명이니까. 그래서 블루투스로 태블릿과 스피커를 연결하고 유튜브에서 내가 요새 자주 듣는 음악을 틀었다.


난 요새 블랙슈트가 어울리는 클래식하고 치명적인 남자의 이미지에 빠져있다. 영화 속 과묵하지만 철두철미하고 지적이고 모든 것을 아우르는 그런 멋진 빌런들이 있지 않은가. 분위기로 모든 것을 대변하는 빌런들. 걸음걸이 하나하나가 세련되고 아우라가 있는, 고독하고 어두운 방 안 책상 앞에서 떡을 괴고 앉아 생각에 잠겨있는. 물론 이미지는 이미지일 뿐 현실의 나완 거리가 많이 멀다. 그래서 대신 그런 영화나 드라마의 OST나 배경음악 등을 모아놓은 플레이리스트를 종종 듣는다. 혹 그런 느낌 아시는지. 저녁에 석양 보면서 운전할 때 이런 노래 들으면, 난 이미 홍콩 밤거리를 수놓는 암흑가의 보스다. (아, 내 차종은 경차다.) 운동할 때 이런 노래를 들으며 달리고 있으면, 난 이미 스파이양성소에서 다음 미션을 기다리며 체력관리 중인 비밀요원이다. 이왕이면 영국 쪽 특수요원. 쓰리피스 슈트가 기본 복장인 요원말이다. 요리할 때 이런 음악을 들으면서 칼질하면, 이건 이제 더 이상 식칼이 아니다. 적국의 심장을 겨눌 수 있는, 특수부대 침입조의 칼날이다. 암튼, 음 그런 거다.


얼추 화장을 마친 아내가 다가왔다. 떡국은 거의 다 완성을 했고 이제 세팅만 하면 되었다. 주방을 둘러보던 아내가 스피커와 연결된 태블릿 화면을 보며 물었다. 

  "아니 여보, 이게 무슨 노래야? 플레이리스트 제목이 이게 뭐야? [나 지금 동천파 보스임. 그렇게 됐다] 이게 뭐야?"

  "흠, 치명적인 남자에게 어울리는 노래들을 모아놓은 거야"

  "우하하하하하하하하하"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아내의 호방한 웃음이 터졌다. 기분 탓일까. 더 빨랐을 수도 있다. 저렇게 폭소해도 되는 건가 싶었다. 그 웃음에 내가 덧씌워놓은 치명적인 남자의 이미지가 와장창 깨지고, 다시 후줄그레 목 늘어난 티셔츠와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는 보통의 한국 남자가 가스레인지 앞에 국자를 들고 서있었다. 아내는 별 다른 말 없이 발걸음을 돌려 다른 데로 갔다. '아니 여보 그렇게 가면 어떡해? 여보, 내 말 좀 들어봐. 남편에게 그렇게 치명적인 부분이 없는 거야?' 차마 입 밖으로 뱉을 수 없었다. 떡국이나 뜨자.


마흔 가까이 살다 보니, 이제 나의 정체성은 쉽사리 바뀌어질 수 없을 만큼 고착되었다. 늘 비슷한 삶의 굴레뿐만 아니라, 같은 말투, 같은 행동, 같은 차림새를 반복하며 날이 갈수록 더욱 단단해진 나의 정체성을 발견하게 된다. 비단 외형에서 드러나는 것뿐만 아니라, 성격 또한 굳은 돌이 되어 버렸다. 한 번 뿌리박은 인생철학도 외골수처럼 변하지를 않는다. 유연하지도 않기에 날이 갈수록 정체성은 더욱 단단해진다. 좋게 평가하면 확고하게 살아가고 있다. 혹자는 이렇게 분명한 정체성을 좋아라 할지도 모르겠다. 자기 계발을 강조하는 많은 강사들이 "여러분 자신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하세요"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이러한 확고한 정체성에도 분명 장점은 있는 것일 테다. 나 역시 나의 정체성이 가진 장점을 바탕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내가 나다워야 살아남는 세상이고, 내가 나다우려면 분명한 정체성이 필요한 세상이니까. 


10대 때 꿈꿨던 특별한 나와는 작별한 지 오래고, 20대 때 꿈꿨던 비전 있는 청년상도 다음세대에게 넘겨준 지 오래다. 30대 후반을 달려가는 지금, 나에게 행여 있었을 비범함이나 특별함을 재차 갈망해도 삶의 여건이 허락 치를 않는다. 당면한 과제의 무게가 무거운 까닭이다. 가끔, 과거에 치기 어린 마음에 썼던 일기장이나 노트들을 보면 엄습하는 낯부끄러움에 몸부림친다. 문득문득 생각나면 이불을 뻥뻥 차는 거다. 그래도 그 치기가 그리운 거다. 무엇이든 도전해보고 싶었고 무엇이든 씹어먹을 수 있을 것 같았던 그 치기 말이다. 세상아 덤벼라 외치던 시기의 내가 내뱉었던 치기다. 지금의 나와는 매우 달랐던 시절이다. 물론 거울 속 현재의 나를 보며 뭐 이게 나 자신인 걸 어때라고 하면서 살아갈 수도 있다. 딱히 내가 밟아왔던 과거를 부정하지도 않고, 그 과거의 결과로 만들어진 현재의 나를 덜 사랑하지도 않는다. 또, 매일 그렇게 살아왔는데 하루 더 그렇게 산다고 해서 내 삶이 어떻게 변하는 건 아니니까. 


그러나 가끔은 지금의 내가 아닌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을 때도 있다. 정체성의 일탈을 꿈꾸는 것이다. 적어도 다른 방향을 택해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하루하루 쫓기듯 살다 보면 그런 선택지 또한 자주 주어지지 않는다. 선택지가 주어진다 한들 선택할만한 것을 선택하고, 합리적인 것을 선택하고, 늘 옵션 A를 선택하다 보니 보통의 보통에 의한 보통을 위한 삶을 살게 된다. 그러하기에, 잠시 노래의 힘을 빌려서 망상 속에서나마 'Everything Black'이 어울릴만한 남자가 되어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정체성 일탈의 일환이다. 그렇다고 진짜 암흑가의 두목이 되고 싶다는 게 아니다. 스파이나 특수부대원이 되고 싶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피는 무섭다.) 그저 잠시 지금의 내가 아닌 다른 나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치명적인 척이라도 하다 보면, 이제는 글로만 남은 치기가 다시 살아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난 이 거대한 세상의 아주 작은 한 조각이라는 생각.


그럼에도 내 마음속 한편에 남아있는, 여전히 나는 이 거대한 세상의 한 톱니바퀴를 움직일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 


늘 위의 두 생각이 맹렬히 싸우지만, 난 후자에 조금 더 마음을 기울여 본다. 단지 그 생각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내 발걸음과 삶의 태도에도 반영할 수 있게 난 오늘도 치명적인 척해본다. 치명적인 척. 후줄근한 옷이 아니라, 멀끔하게 옷을 입고 구두를 신고 끈을 조인다. 괜스레 눈 주변을 조이고 가방을 낚아챈다. 즐겨찾기에 추가해 놓은 노래를 들으며 더 당당히 문 밖을 나서본다. 비트에 맞춰 차 안에 몸을 싣고, 아주 조금은 폼나게 차문을 닫고 뭐 대단한 거라도 하는 듯 열쇠를 휘리릭 돌려 시동을 건다. 심호흡 한 번 하고 액셀러레이터 페달을 밟는다. 작고 소중한 내 차가 가냘프게 으르렁한다. 소리 좋다. 이제 출발. 어제와는 아주 조금 다른 오늘을 살아보자. 내 안의 톱니바퀴를 굴리다 보면, 세상의 톱니바퀴도 언젠가 움직이겠지. 계속 척하다 보면 척이 아닌 날이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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