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날에 기억하는 아버지의 지혜
내가 7살쯤이었을 것이다.
무더운 어느 여름날, 엄마가 바다라도 보고 오자며 월미도에 가자고 했다. 그날은 가뜩이나 낮기온이 높은 날이었는데 에어컨도 없는 집에서 하릴없이 축 쳐져 시간을 보내기엔 엄마도 무료하셨었나 보다. 그 말에 난 어찌나 들뜨던지. 우리는 나갈 채비를 하고, 잠시 아빠가 일하시던 곳에 들렸다. 우리가 월미도에 갔다가 늦을지도 모르니, 혹시 먼저 퇴근하시면 저녁을 혼자 드셔야 될 거단 말을 전해드리기 위해서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당시엔 핸드폰도 삐삐도 없었다. 아빠가 한 번 일하기 시작하시면, 도무지 사무실 전화도 잘 받지 않으시기 때문에 직접 들른 것이었다.
아빠는 열심히 일하고 계셨다. 땀이 머리에 송골송골 맺혀계셨고, 온도 습도 모두 높은 곳에서도 그 집중력을 잃지 않고 계셨다. 살 사이 간격이 넓어 내 엄지손가락도 거뜬히 들어갈 법한 푸르뎅뎅한 고철 선풍기 하나로 더위를 이겨내고 계셨다. 그렇게 열중하던 차였어도 우리가 등장하자 입이 귀에 걸리시며 반겨주셨다. 어린 시절 내 세상의 전부였던 그 웃음이다.
"아들!"
우리는 여차저차해서 월미도에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아빠는 내 머리카락이 뒤엉길정도로 쓰담쓰담하시더니, 주머니 지갑에서 오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셨다. 그러곤, 엄마와 점심때 꼭 맛있는 거 (특별히 짜장면이라고 강조하셨다) 사 먹으라며 내 손에 꼭 쥐어주셨다. 90년대 초, 7살짜리 어린 남자에게 오천 원이 어떤 의미인 줄 아는가? 모르긴 해도 아마 난 그 돈으로 집도 사고 차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아빠로부터 돈을 받고 나와서, 우린 지하철을 탔다. 3호선 녹번역에서 출발했고, 종로3가역에서 인천행 지하철을 타고 갔던 것 같다. 에어컨 없던 90년대 지하철은 극기훈련의 장소로 안성맞춤이었다. 온갖 행상인들과 더위를 이겨내려고 연신 부채질하던 사람들, 그리고 삼삼오오 대화하던 여러 소리가 제각기 놀고 있었다. 나는 엄마 옆에서 얘기하다가 졸다가 바깥구경하다가 다시 지루해하다가 그렇게 어찌어찌 제물포까지 간 것 같다. (인천역이 다 가까웠을 텐데, 엄마는 왜 제물포에서 내리셨을까)
다시 월미도행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서 내린 바다는 생각보단 덜 파랬고, 생각보다는 좀 더 꿉꿉한 냄새도 났고, 생각보다는 그리 시원하지 않았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엄마와 바다가 보이는 길을 걸으며 솜사탕도 하나 사 먹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점심시간이 금방 다가온지라, 우리는 근처에서 뭘 좀 사 먹을까 두리번거렸다. 마침 출출하던 차에 신나기 그지없는 시간이었다. 더욱이 나에겐 아빠가 준 비장의 무기 오천 원이 있지 않은가. 주머니에 슬몃 손가락을 넣고 아까 아빠한테 받아 꼬깃 접어놓았던 돈을 찾아봤다. 그런데, 뭔가 헛헛하다. 손가락에 걸리는 게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분명 좀 전까지 그 고이 접힌 돈을 주머니 속에서 살살 굴려가며 손장난을 했었는데.
"어?"
"왜?"
내 목소리의 다급함을 눈치챘는지, 엄마의 눈초리가 날카롭게 내 목소리를 가르고 들어왔다.
"없어"
"뭐가?"
"돈이 없어.."
이미 내 목소리는 울먹거림으로 차고 있었다.
"돈이 없다니 무슨 말이야! 떨어뜨린 거야?"
엄마는 내 엉덩이를 팡팡 치며 물었다. 그런데, 그런 질문에 내가 알았으면 답을 했겠지. 도무지 그 돈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뒤져봐도 돈은 없었고, 잃어버린 것이 확실해 보였다. 방금까지 좋았던 엄마와의 시간은 180도 바뀌어서, 슬슬 눈치 보며 엄마를 좇는 형국이 되었다. 엄마는 한숨을 푹푹 쉬며 걸음을 내디뎠다. 뜨거운 눈물이 차올랐고, 주변에서 사람들이 웅성웅성했지만 벌거진 얼굴에 눈물로 가리어진 내 시야엔 오직 엄마의 발 뒤꿈치만 보였다.
엄마는 대충 아무 식당에나 들어가려고 하는 듯했다. 메뉴가 무언 지는 몰랐으나 애초에 우리가 먹으려던 것보다 좋을 리 없었다. 아빠가 준 돈으로 짜장면을 사 먹고, 엄마가 조금만 보태면 탕수육도 가능했을 텐데. 흐느끼면서도 그런 생각에만 머리가 잘 돌아가고 있었다. 억울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뭔지 모를 감정에 식사를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아직까지도 그 메뉴가 뭔지 기억이 안나는 거 보면 어지간히 충격이 컸던 거 같다.
오후를 대충 보내고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월미도에서 나왔다. 별로 흥겹지도 않았고 대충 여기저기 걷다가 나와서 다시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왔다. 오는 길에 엄마는 별로 말이 없었다. 내 유년시절 엄마는 척박한 환경에서 동전 한 닙조차 허투루 쓰는 법이 없던 분이었다. 늘 절약을 강조하셨고, 전등이 꺼져있는지, 수도꼭지가 잘 잠겨있는지 늘 확인하는 습관을 갖고 계셨다. 그런데, 철없는 막내아들이 당시로서는 큰 오천 원을 월미도 땅바닥인지 파도엔지 버리고 왔으니 속히 많이 상하셨을 법했다.
집에 돌아왔는데, 아빠는 우리가 일찍 돌아와 의외라며 같이 저녁을 먹자고 하셨다. 엄마는 저녁 생각이 없다며 방으로 들어가셨고, 나와 아빠는 함께 식탁에 앉아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창 이야기 중에, 다시 돈을 잃어버린 대목에 닿자 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방에서 우리 얘기를 듣고 있었는지, 엄마의 사자후가 들렸다.
"아니, 뭘 잘했다고 울어!"
아빠는 조용히 젓가락을 내려놓으시고는 나에게 내 방으로 가자는 손 짓을 하셨다. 우리는 방에 들어가 방문을 살금 닫았다.
"OO야, 오늘 속상했겠다, 그렇지? 그런데, 그럼 이렇게 해보자. 네가 그 돈을 떨어뜨렸다면, 우리, 누군가 진짜 꼭 필요한 사람이 그 돈을 가져갈 수 있게 기도하는 게 어떨까? 만약 누가 너 돈을 훔친 거라면, 7살짜리 아이의 주머니를 훔쳐갈 만큼 급한 사람이 훔쳐간 거 아닐까? 우리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해 주는 게 어떨까? 그 사람의 상황이 조금 더 나아질 수 있게. 오늘 우리 OO가 너무 좋은 일을 한 거네 그러면. 누군가를 도와주고 온 거네. 멋있는데?"
어안이 벙벙했다.
아빠는 늘 그렇게 상황의 좋은 면을 생각해서 나를 다독일 줄 아는 분이셨다. 그리고 이때가 아빠의 그런 지혜로움을 내 인생에서 처음 깨달은 날이 아닌 가 싶다. 나의 망가져버린 하루는, 누군가를 (매우 매우 매우 아주 매우 간접적으로) 도와준 보람 있는 날이 되었다. 벌거진 눈의 속상했던 아이의 눈은, 왠지 모를 안도와 이해 못 할 뿌듯함으로 반짝거리게 되었다.
미국은 6월 셋째 주 일요일이 아버지의 날로 제정되어 있다. 금년 아버지의 날을 맞이하여 교회에서 전할 메시지를 고민하다가 문득 이 추억거리가 떠올라서 한편에 적어놓았다.
언젠가 아내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자기야, 자기가 보기에 난 똑똑한 거 같아 아님 지혜로운 거 같아?"
"자기? 자기 똑똑하지!"
내가 기대한 답변이 아니었다는 걸 내 아내는 아는지. (아마 지금도 모를 듯하다.) 그 시점 내 아내가 본 나는, 내가 떠올린 아빠의 모습처럼 지혜로운 가장의 모습은 아니었나 보다. 내 아들도 7살쯤이었을 거 같은데 말이다. 내 나름 억세고 거칠게 20대 후반과 30대를 보내왔다고 생각했는데도 내 경험치와 연륜은 아직 하루를 망치고 돌아왔던 어린 아들의 시야를 바꿔준 내 아버지만큼의 지혜를 솟아나게는 못하나 보다 싶다.
그런데, 가끔 아내가 말한다.
"여보, 우리 애들이 자기 아들들 아니랄까 봐 자기 말투를 쓸 때가 있어."
"뭐라고?"
"'그럼 이렇게 해보자'라고 말이야. 특히 당신 큰 아들 녀석이. 그거 완전 자기 말투잖아."
그랬나.
그랬나 보다. 나도 모르는 새. 그렇게 흘러갔나 보다.
날 닮아가나 보다 기특했었는데, 사실 더 멀리서부터 온 거였구나.
한국에 들어갈 일이 생기면, 오랜만에 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용돈을 드리며 (오천 원 아니다) 이 이야기를 해드려야겠다 싶다. 삶의 이러저러 고충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버릇처럼 툭 현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시지 않을까.
"그럼 이렇게 해보자"라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