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밥 말고 국빵
비가 오는 흐린 날 옆동네 블라리쿰(Blaricum)에 점심을 먹으러 갔습니다. 네덜란드의 성북동이라 할만큼 비싼 동네로 유명하지만 막상 가보면 한적하고 가게들도 아기자기한 마을입니다. 비가 오지 않으면 더 예쁘구요.
이 동네의 오래된 식당 중 한 곳인 무크 스파이크스트라(Cafe Moeke Spijkstra)는 100년도 전에 식당이 딸린 숙소, 주막 같은 곳이었다네요. 지금은 식당이자 술집이고 매일 저녁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당일특선 메뉴를 먹을 수 있더군요. 이 곳에서 점심을 먹어보기로 합니다.
1902년 부터 시작했다니 유서 깊습니다. 주막하면 객인에게 숙소이자 따듯한 음식으로 허기를 채우고 낯선이와 말도 섞는 장소가 떠오르고요. 식당 이름의 무크는 ‘어머니’를 뜻하는 무더의 오래된 말이라니, 어쩐지 제 머릿속에는 바쁘게 움직이며 손님들과 잡담하는 주모의 모습도 떠오릅니다.
네덜란드의 주모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음식 잘하고 맘 따듯해서 “엄마”라 불리는 주모는 푸근한 모습 아닐까요. 무크스파이크스트라의 스파이크스트라는 성이랍니다. 그럼 우리식으로 번역한다면 “스엄마네” 식당이네요.
하지만 2023년의 현실은 “주모”는 커녕 주방 시작도 전에 온 밥 손님이 마음에 안 드는지 툴툴 거리는 웨이터입니다. 기대와는 다르게 실망할 것 같았어요.
하지만 뭔지도 모르고 그냥 시킨 식사가 나오자 불만이 싹 가셨습니다. 푸짐해보이고, 따뜻해보여 스산하고 추운 날에 딱이더군요.
제가 시킨 건 오슨하스푼쳬스 (Ossenhaaspuntjes)입니다. 자투리 고깃국 정도로 번역해 봅니다.
소고기와 그레이비(고기를 익힐 때 나온 육즙에 밀가루을 풀어 넣은 소스)라고 하기엔 양도 많고 묽은 국 같은 소스. 그리고 우리나라 흰쌀밥처럼 여기 사람들에게 ‘밥심’을 주는 흰 빵.
샌드위치나 빵 한 조각이 점심식사인 네덜란드 식습관을 생각하면, 무려 누군가 요리한 ‘고깃국’인 이런 구성은 특별합니다.
테이블을 꽉 채우는 요리가 벌써 맛있어 보이네요. 남편이 남은 빵은 그래이비를 닦아 (?) 먹으면 좋겠다니 역시 이런 보드랍고 흰 식빵이 국물 찍는 ‘스폰지’로는 제격이죠.
먹다보니 국밥처럼 밥을 국에 말아먹는 듯 빵을 국에 말아먹게 됩니다.
국물이 아무리 묽어도 버터 맛 진한 소고기 그레이비라 속이 시원해진다거나 후후 불며 뜨거운 맛에 먹지는 않죠. 그래서 국밥과 비교할 수는 없어도 고소하고 진한 맛에 추운 날 맘을 땃땃하게 해줍니다.
그런만큼 국밥 같은 게 아닐까하네요. 빵이랑 먹으니 국빵인가요. 주막이며 주모를 떠올려서 국밥이 생각난지도 모르겠습니다.
옛날 네덜란드가 가난했던 시절 특별한 날, 어머니가 해주는 그런 음식일 것 같네요. 소울푸드로 제격입니다.
한 그릇 싹 비우니 비 때문에 우중충해졌던 마음도 홀가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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