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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원 Jan 29. 2019

가족이 아닌 누군가와 같이 산다는 것

부모님 집이 아닌 은행집에 산 지 이제 2년 차다. 아니지 월세살이라 딱히 은행집이라고 하기에도 좀 애매하니, 집주인에게 연락할 일이 생길 때마다 '주인님이라고 할 순 없잖아... 뭐라고 시작하지...'라고 고민하다 결국은 호칭을 생략하고 지극히 사회적인 어투로 메시지를 쓰는 ‘세입자’가 된 지 2년 차라고 해야 더 정확하겠다.


공부하던 곳을 오가기 위해 매일같이 3시간이 넘는 시간을 길에 뿌리고 다니던 나는 곧이어 출퇴근에도 그만큼의 시간을 길에 뿌려야 하는 직장인이 되었다. 더 이상 인구밀도 200%의 2호선에 짜부된 채로 시간과 체력을 쓰고 싶지 않아 나와서 살기로 결심한 것이 2년도 전의 일이다. 혼자 독립해서 살 요량으로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는데, 회사 앞에 혼자 살 곳을 보니 가격대가 만만치 않았다. 막상 가보면 정말 방 한 칸일 뿐인데, 대체 이 가격들의 합리성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것일까. 같은 의문-분노-을 마침 같은 시기에 주변에 방을 구하고 있던 친구와 한숨 쉬며 얘기하게 되었는데, 계속 얘기하다 보니 그럼 집 같이 구해볼래? 까지 흘러가게 되었다.


같이 구했을 때의 장점이 꽤나 명확했다. 월세 부담이 덜했고, 방 두 개인 곳을 구할 생각이었으니 월세살이더라도 좀 더 '집'다운 집에 살 수 있었다. 고시원, 원룸에서도 조금씩 살아봤지만 내 방문을 열었을 때 바로 바깥세상이 나오는 것과, 방문을 열어도 아직 집인 것은 아주 큰 차이다. 그리고 같이 공부하며 지내봤던 경험상 서로의 성향이 크게 부딪칠 일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이 따로니 생활패턴 자체를 맞춰야 하는 불편은 없을 것이었다. 같이도 보고, 사이사이 각자 혼자 살 옵션도 알아보긴 했지만 집의 크기나 월세 부담 면을 같이 따져봤을 때, 같이 구하는 옵션이 훨씬 생활의 질이 높아 보였다.


그렇게 우리는 친구에서 공동명의자가 되었다.



친구랑 같이 살 거라고 하니 주변에선 하나같이 걱정의 일화들을 꺼내들기 바빴다. 다시 생각해봐라, 그 친구랑 다시 안 볼 수도 있다, 어디의 누가 친구랑 같이 살았었는데 아주 대판 싸우고 원수가 됐다더라... 그 모든 일화를 뒤로하고 입주일이 되었다. 이사 한바탕 하고, 짜장면도 챙겨서 먹고, 그 주 주말에는 이케아에 가서 독립의 로망을 차에 실어 왔다. 책꽂이, 거실 스탠드, 의자... 그리고 그 책꽂이 수평 맞춰 조립하는 데에 그날의 남은 에너지를 모두 썼다. 이케아에서 덜어낸 가격은 내가 노동력으로 채워내야 하는 거였구나. 조립하면서 받은 스트레스를 가라앉힐 용도로 냉장고에 채워뒀던 맥주를 꺼내 짠-하고 마셨더니 아주 꿀맛이었다. 책꽂이 조립을 한 다음에는 스탠드 포장을 뜯었는데, 스탠드 갓의 주름을 일일이 접어서 틀을 끼워 넣다가 또 열이 뻗쳐서 다 조립하고는 "와 씨 이거 맥주각이다!!"하며 또 핑계 삼아 짠을 외쳤다.


그 뒤로도 한동안은 무슨 일만 있다 하면 "맥주각이다!!"하며 부지런히 같이 맥주를 비웠다. 요즘 들어서는 거의 마시지 않지만 그때 한창 마셨던 맥주병뚜껑들은 여전히 식탁 옆 선반에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가족이 아닌 누군가와 가구를 조립하고 있는 것도, 집에서 잠옷을 입고 친구와 짠을 하고 있는 것도, 그러고 나서도 친구도 나도 어디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도 모두 이상하던 날들이었다.



바보같고 재밌는 일들이 많았다. 부엌에 둘 물건의 컬러 코드를 맞춰야 한다며 전기포트의 색을 무엇으로 골라야 하냐같은 쓸데없지만 아주 중요했던 고민을 같이 하기도 했고(덕분에 부엌의 물건들은 블랙&실버로 아주 잘 맞춰져 있다), 같이 밥을 먹으며 쓰레기통을 좀 더 큰 걸로 살까-하던 중에 갑자기 꽂혀서 쓸데없이 비싼, 센서로 뚜껑이 열리는 쓰레기통을 사기도 했다. 그 쓰레기통은 삐그덕거리며 한 템포씩 느리게 열리고, 건전지가 떨어지면 굳게 닫혀 쓰레기를 버릴 수 없어 작년피셜 우리 집의 멍충이 타이틀을 차지하고 있다. 언젠가는 브이로그를 찍어두자며 밥을 하는 데 한 명이 다른 한 명이 밥하는 걸 찍기도 했다. 물론 한 세 개쯤 찍고 관뒀지만, 가끔 돌려보면 나름 재밌다.


지난 크리스마스에는 친구가 ‘방에서 향 자주 뿌리는 것 같길래-’ 하며 교보문고 향 룸 스프레이를 선물로 주어서 한참을 웃었다. 스프레이 소리를 들은 걸까, 쌓여가는 내 방의 책을 본 걸까, 아니면 뿌려두던 향을 맡은 걸까, 어느 쪽이든 내가 말하지 않은 내 개인 공간에서의 취향을 알고 받은 선물은 거의 처음이었던 것 같아서 묘했다. 덤으로 같이 받은 양말도.



생활시간대가 달랐던 것이 아마 큰 문제없이 같이 사는 데에 도움이 많이 되었을 것이다. 아침잠에 허우적거리는 나에 비해, 친구는 내 기준으로 무척 아침형 인간이다. 내가 첫 번째 알람을 무시하고 다시 이불을 끌어당길 때쯤이면 아침을 해 먹거나, 부지런히 나갈 준비를 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방문 너머에서 들린다. 내가 다시 정신을 차릴 때엔 이미 나가고 없다. 아마 워낙에 사는 시간대가 달라서 문제가 생길 일이 적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씻어야 하는 데 화장실을 이미 쓰고 있네! 같은 상황은 애초에 사는 시간대가 달라 같이 사는 동안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한참 동안 매일같이 야근을 하던 때에는 늦게 퇴근하고 집에 오면 친구는 이미 자고 있었지만, 맥주각을 외치며 조립했던 거실 스탠드는 켜져 있었다. 둘 다 하얀 형광등이 싫다며 주황색으로 맞춰서 산 조명이었다. 친구는 일찍 자러 방에 들어가면서 불을 끄면서도 그 스탠드 하나는 켜두곤 했는데, 그게 나한테는 꽤나 안심이 됐다. 어두운 밤에, 깜깜한 집에 들어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그렇게 다른 시간을 살며 지내다가도 종종 시간이 맞을 때면 자체 외식을 가기도 하고, 거실에서 각자 할 일을 하기도 하고, 밤늦게까지 얘기하다 자는 날도 있었다. 어떨 땐 가깝게, 어떨 땐 조금 거리가 있게, 어떻게든 누군가와 같이 살고 있다는 것은 항상 느낄 수 있었다.



사람 사이의 거리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아마 나에게 적절한 거리와 친구에게 적절한 거리는 다를 것이다. 그래도 비슷한 정도의 거리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같이 살아도 괜찮겠다 싶었다. 어쩌면 누군가가 보기에는 같이 살고 있는 것에 비해 아주 살가운 관계는 아닐지도 모르겠다. 집에 있더라도 개인적인 시간을 어찌 보내는지는 굳이 묻지 않아서 같이 살고 있어도 거실에서 뭔가 드러나게 할 때가 아니라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는 때가 많다. 늦은 밤 켜져 있던 스탠드가 주던 안심만큼을 나는 친구에게 주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모르겠지만, 그래도 같이 사는 사람에게 기대하는 거리감이 크게 어긋나지는 않았다고, 그래서 무탈하게 때때로 재밌게 지낼 수 있었다고 생각해본다.


가족으로 오래 살았더라도 구성원마다 기대하는 거리가 다를 것이고, 마찬가지로 친한 사이라고 해서 서로에게 기대하는 거리가 항상 같은 것도 아니다. 다만 계속해서 잘 지낼 수 있는 사람과는 대체로 이 거리감이 애초에 비슷한 편이거나, 비슷하지 않더라도 서로가 오해하지 않을 수 있는 거리가 어느 정도인지 편하게 얘기하며 다시 맞춰나갈 수 있었다. 일화를 겪으며 눈치껏 조금씩 맞추든, 아예 터놓고 이야기해서 맞추든. 이 정도 거리에 내가 있어도 될까? 나는 이 정도 거리를 기대했어서 서운했어, 내가 너무 가까이/멀리 있어서 서운하게 했구나 미안해 같은 이야기들과 함께.


그렇게 거리를 맞춰 나가며 같이 지내는 것은 어쩌면 이전의 내가 가장 못하던 일이고, 지금의 내가 서툴게나마 하려고 하는 일이자, 조금씩이라도 나아지고 싶은 일.

거리를 재는 것이 어려웠고, 맞추어 다듬어나가는 것은 더 어려웠다. 이럴 바엔 동떨어져서 뭐든 혼자 어떻게든 하는 것이 어른인가 싶을 때도 있었다. 이제는 적어도 그게 답이 아니라는 것은 알겠다.


남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나는 이따금 겨우 특별해지곤 했다. 세계에 오직 나만 있다면 고유성이랄지 유일함이랄지 그런 말들은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우리의 존재는 타인과 맺는 관계에 의해 끊임없이 새롭게 구성되는데, 그건 축복일까 저주일까?

<일간 이슬아>


아마 80살 할머니가 되어도 고민은 이어지겠지만 그래도 조금씩조금씩 배워서 그쯤에는 멋지게 같이 지낼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 아니 사실 조금은 더 일찍, 할머니까진 되기 전에.




제일 먼저 '잘 사는 방법을 알기 위한 근본 원리'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명제 1-1 : 자립은 많은 사람에게 의존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립은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오해합니다. 물론 나 자신도 오랫동안 그렇게 믿어 왔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그것이 틀렸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무엇이든지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려고 하고 주위 사람들이 도와주지 않는다고 화를 내면 미숙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곤란을 겪을 때 도움을 청하지 않는 것 또한 미숙의 반영입니다. (...) 자립한 사람은 혼자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가 곤란하면 언제든지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고 그러한 인간관계를 잘 관리하는 사람을 가리킨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단단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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