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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원 Jan 18. 2019

필름 한 롤만큼의 시간 감각

간만에 필름 스캔을 맡겼다. 지난 11월부터의 시간이 36장에 담겨있었다. 한 롤을 다 쓰면 사진관에 필름을 맡기러 가는 길에 새 필름통을 뜯어서 바꿔 넣는다. 그런 식으로 꽤나 꾸준히, 내키는 대로 찍는다.


중학교 때 무슨 생각이었는지 중고 필름 카메라를 찾아봤었다. 고심 끝에 샀던 첫 카메라는 미놀타 x-700이었는데, 아마 찾고 찾다 그걸로 찍은 사진 느낌들이 막연히 좋아서 샀던 걸로 기억한다.


나름 자동 모드가 있었던 것 같은데, 필름 한 롤을 다 써도 가지고 싶은 사진은 2-3장이 나올까 말까 했다. 주머니에 들어갈 크기도 아니어서 주섬주섬 그 무거운 카메라를 꺼내어 들고 어설프게 초점링을 돌려서 맞추려다 보면 내가 찍고 싶은 장면은 이미 지나가고 없었다. 미러리스를 사서 쓸 때도, 디지털인 것만 차이지 휴대성이 떨어지니 잘 안들고 다니게 됐고 잘 안들고 다니니 많이 찍을 일도 없었다.


그래도 필름 특유의, 설명하기 어려운 그 느낌이 여전히 좋아서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필름 카메라를 들고 돌아다니곤 했었다. 어쨌거나 나는 계속 필름 카메라를 쓰긴 쓰겠구나- 싶으니 이참에 오래 잘 쓸 걸 장만하자는 생각으로 첫 월급으로는 자동 필름 카메라라는 신문물(구문물인가...)을 셀프 선물했다. 외투 주머니에도 들어갈 크기에, 반셔터만 누르면 필요한 모든 걸 알아서 세팅해주는 똑똑한 친구. 사자마자 들고 동유럽 여행을 떠났는데, 계속 가지고 다니며 찍기도 편하고 다녀와서 뽑아보니 사진을 건지는 확률도 매우 높아져서 여즉 잘 쓰고 있다. 휴대성이 이렇게 중요한 것이었다니.


단기간에 그렇게 많은 필름을 쓴 것은 그 여행이 처음이었다. 하루에 한 롤씩. 느지막이 일어나서 골목골목을 쏘다니다 36장을 다 찍을 때쯤 숙소로 돌아왔다. 씻고 침대에 걸터앉아서 카메라에서 필름을 꺼내 필름통에 넣었는데, 그러고 나면 뭔가 그날 하루의 시간이 그 통에 담겨있는 것 같았다. 핸드폰 카메라에서 주우욱 이어지는 갤러리를 볼 때나, 이제는 128GB씩도 들어가는 디지털카메라의 메모리카드를 꺼내서 보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자, 이게 오늘 하루야.'


내일 쓸 필름을 끼우기 위해 다 쓴 필름을 꺼내고, 그날의 날짜를 필름통에 적어두는 밤마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여행의  하루하루를 잘라내서 동그란 통에 넣어두는 그런 느낌이.


동유럽에서의 순간들

그때 이후론 여행을 가서도 그만큼씩 찍은 적은 없지만, 그래도 어디든 갈 일이 있으면 필름 카메라를 챙겨서 나선다. 그냥 기억해두고 싶은 것, 다시 보고 싶은 풍경, 친구의 웃는 얼굴, 놀리고 싶은 얼굴, 언젠가 꼭 꺼내어 보고 싶어질 순간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틈날 때마다 카메라를 꺼내 담아둔다. 한 롤을 다 쓰면 필름 단위로 폴더를 만들고, 스캔받은 파일을 옮긴다. 그렇게 하다 보니 '필름 한 롤을 다 쓰기까지의 시간'이 일종의 단위 감각이 되는 때가 있었다.


36장을 다 찍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물론 앉은 자리에서 셔터 36번만 누르면 되는 일이기도 하지만, 디지털과 다르게 정말 물리적인 필름 한 칸을 써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 생각만큼 셔터를 막 누르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까 보통 필름 카메라를 꺼내서 찍는 것은 내가 그 순간을 담아두고 싶은 순간으로 생각한다는 것인데, 그런 순간들이 듬성듬성 있을수록 한 롤을 다 쓰기까지의 시간은 길어진다. 보통 3주에서 3달 정도까지 동안 한 롤을 쓰는데, 필름을 끼워두고 2달이 넘어가고 있다는 것은 아마도 내 일상이 퍽퍽해지기 시작했다는 신호. 그리고 그런 기준치를 설정해두는 건 꽤나 도움이 되는 일이다. (카메라를 까먹고 두고 오는 날들도 많으니 백 퍼센트 그런 것만은 또 아니지만..) 꼭 어디 여행을 가지 않더라도, 그냥 일상을 보내는 단위로 생각했을 때에도.


2018년의 일상

필름이 이래저래 귀찮은 건 사실인데, 그렇게 필름 단위로 일상을 세는 게 좋아서 계속 찍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카메라의 필름 카운트가 올라가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며 안되겠다 재밌는 일을 다시 찾아봐야지- 하기도 하고, 뽑아온 사진을 보면서 한두 달 전의 일부터 오늘까지를 자연스레 떠올리기도 하고, 친구에게 보내주며 얘기를 꺼내기도 하고. 사람마다 다른 일상의 단위가 있겠지만, 나한테는 이게 꽤나 잘 맞는 단위인 것 같다. 아마도 앞으로 꽤 오랫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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