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할 때 비로소 가능한 것들
우리가 개발팀에 공식적으로 자동화를 요청할 수 있는 업무는 연 200시간 내지, 300시간 정도 절감이 가능한 과제여야 했다. 회사에서도 돈을 들여 개발팀을 고용하고 라이센스 비용을 투입했기 때문에, 투자 대비 확실한 ROI가 나와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기준 시간에 못 미치는 자동화 과제는 채택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과제들 속에도 개개인이 겪는 명확한 불편함이 있는데, 이것들도 자동화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바람이 있었다.
그 무렵 나 혼자 자동화에 성공하면서, 다른 직원들도 스스로 배워서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실제로 개인들이 겪는 불편함은 간단한 자동화로 충분히 해결 가능한 것들이었다.
자동화 프로젝트를 관리하면서 알게 됐던 또 하나의 사실은, 자동화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었다. 자동화를 하면 분명 더 편해지는데도, 이미 자기 방식에 익숙해져 있어서 굳이 바꾸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업무 자동화가 단지 기능이나 시간을 절약하는 기능을 넘어서, 조직이 비효율을 해결하고 더 본질적인 일에 집중하도록 이끄는 변화의 도구라고 믿었다.
보다 조직적인 움직임이 필요했다.
우리 회사에는 '사내 학습 동아리'라는 내부 프로그램이 있다. 자발적으로 구성된 동아리에 회사가 회의 시간과 활동비를 지원해주는 시스템이었다. 스포츠나 취미 중심의 동아리가 많았지만, 나는 업무 개선을 목표로 동아리를 만들기로 했다.
우선 내가 속해있는 구매팀원 중에서 자기 업무를 어떤 방식으로든 개선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모았다. 2022년 3월, 14명 정도가 모여 동아리가 만들어졌다.
일명 <업무 개선 학습동아리>
업무 개선 아이디어가 있으면 공유하고, 자동화를 배우고 싶은 사람은 내가 독학했던 커리큘럼을 함께 나누었다. 매달 1,2개씩 업무 개선 과제를 선정해 실행했고, 성과를 발표할 수 있는 자리도 만들어달라고 요청했다. 동아리 구성원 뿐 아니라 조직 전체에 이 문화가 퍼질 수 있게 고안해 낸 방식이었다.
"상무님, 저희 동아리의 ㅇㅇ님이 이 업무를 자동화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보고서도 만들었습니다.
성과를 보고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주십쇼"
그렇게 매달 업무 개선 결과를 작성해서 성과 보고를 올렸다. 실제 그 성과를 만든 구성원의 이름과 함께. 동아리 활동 보고서도 계속해서 제출했고, 나중에는 뉴스레터를 만들어서 뿌리기도 했다. 이런 기록들이 쌓이며 성공 사례들이 계속 생겨났고, 우리 구성원들은 심리적 보상감을 얻으며 계속해나갈 수 있는 동력을 얻었다.
대표적인 사례 세 가지를 소개하자면,
첫째, 동아리에서 시작된 과제가 개발팀의 정식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개발 예산을 담당하는 팀과 협의하는데 성공했다. 이제는 동아리원들이 직접 개발한 자동화도 전문 개발자들이 리뷰하고 완결성 있게 다듬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둘째는 동아리원 중 한명이 직접 개발한 것인데, 이것도 히트를 쳤다. ERP 시스템에서 한번 조회하는데 20분 넘게 걸리는 업무가 있는데, 조회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ERP를 활용하는 게 어려웠다.
그 업무를 자동화했다. 직원들이 퇴근한 사이 컴퓨터가 밤새 조회를 완료하고, 출근해서 자리에 앉으면 결과를 바로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모두가 힘들어했던 그 업무가 정말 단순한 자동화 하나로 해결이 됐다.
셋째, 나는 신입사원을 위한 온보딩 채널을 만들었다. 구매 업무는 프로세스가 굉장히 많았는데, 신입사원 교육에 대한 체계가 부족해서 사수가 있음에도 하나하나 알려주고 케어하는 게 어려웠다.
나는 그때쯤 실 프로세스 전체를 꿰고 있었기 때문에 이걸 교과서처럼 매뉴얼을 만들어 신입사원들이 언제든 들어가서 보고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는 채널을 만들었다.
내가 신입사원 때 겪었던 고충에 감정이입(?)을 좀 하면서 했더니 기깔나게 만들어졌다. 그 채널을 통해 실시간 Q&A도 가능했는데, 재밌는 건 우리 본부의 거의 모든 신입생들이 그 채널을 이용했다는 점이다. 나중에는 나와 전혀 다른 본부, 다른 실의 신입사원들까지 나한테 프로세스를 물어봤다.
우리는 연말에 열린 전사 학습동아리 콘테스트에서 2등을 수상했다.
전 직원들의 투표와 평가표에 기반에 따른 심사를 거친 결과였다.
물론 도중에 포기하고 동아리를 떠난 사람들들도 있었다. 자동화는 장기레이스다. 개발하다 보면 예상치 못한 변수나 문제들이 튀어나오기 때문에, 엉덩이로 앉아서 계속 파고드는 지루한 시간들이 계속될 때가 있다.
그런 과정을 견디고 끝까지 완성한 사람도 있었고, 내 영역이 아닌 것 같다며 포기한 사람도 있었다. 그분들이 포기한 프로젝트는 내가 나머지를 맡아서 개발을 이어갔다.
나 혼자 편하자고 시작했던 자동화가, 사람들과 함께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생각하지 못한 기쁨을 느꼈다. 나는 처음으로 조직을 변화시키는 즐거움을 맛봤다.
그러던 어느 날 감사팀에서 연락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