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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믐 May 18. 2023

느리지만 확실히 변하는 5가지 방법 #2. 무계획

계획 속 무계획, 온몸의 감각을 일깨워요.




 무계획 이라니 참으로 우스운 소리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무계획은 단지 '흘러가는 대로 살자'라는 태평스러운 뜻이 아니다. 반복적인 일상에서 우연히 발생하는 선물 같은 순간들을 의도적으로 만들자는 뜻이다. 음악 활동을 하던 시절은 워낙 삶 자체가 들쑥날쑥했기에 굳이 재미를 주지 않아도 매일이 다이나믹했다. (예술은 감정의 영역에서 만들어지는 창조적 활동이다 보니) 20대 후반 현실의 폭풍이 선명하게 몰아닥치며 안정적인 환경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고, 그 후 변화를 도모하고 새로운 삶을 이어나가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악기를 잡고 띵가띵가 거리던 배짱이 근성을 벗어날 수 없었다. 무한 반복의 일상을 이어나가기엔 어딘가 지루하다. 나는 이대로 지루한 사람이 될 것인가. 이 끝은 어디인가? 내가 마땅히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일이 뜻하지 아니하게 저절로 이루어져 공교롭게,


'우연'이라는 단어는 낭만적으로 들린다. 일상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우연은 우리의 존재와 그 작은 움직임으로부터 발생한다. 마치 곱게 입을 모으고 있던 꽃 봉오리가 밤새 그 누구도 모르게 만개하듯이. 나는 영화 속에서나 일어날 법한 우연한 사건들을 지루한 일상 속에서 만들어 내고 싶었다. 가만히 누워있는 것보다 분주한 것을 좋아한다. 의도적인 우연을 만들기로 했다. 무작정 집을 나서서 어디로든 향하는 것이다.


일단 밖으로!

주 6일 9시간 근무, 일요일 휴무. 브레이크 타임은 하루에 두 시간. 그 두 시간 동안은 재활을 위한 운동을 한다. 1인 자영업을 한다는 것은 자유로워 보이지만 실은 자유가 고갈된 상태이다. 이런 환경에서 '우연'이라는 말이 상당히 절실했다. 그나마 이 무료한 일상에 손길을 건네준 것은 다름 아닌 책이었다. 독서 만이 유일한 친구였다. 내가 겪지 못한(않은) 일 들을 마음껏 상상하며 여행할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책은 정보와 지혜, 깨달음을 얻기에 충분했지만 어느 새부터 사람 냄새가 그리웠다. 어떤 영화를 보든 사람 대 사람, 우연한 만남을 시작으로 사건이, 사랑이,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우연히 들어간 허름한 책방에서 만난 할아버지, 홀린 듯 이끌려 집어든 책 속 누군가 붙여놓은 포스트-잇, 여행 중 한적한 바다 앞에서 만난 이방인과의 대화. 이 모든 순간들은 나의 발걸음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나는 유일한 휴무일인 일요일마다 무작정 책을 들고 집을 나섰다. 목적지는 없었다. 무작정 걷거나, 일단 차에 타고 지도를 켜본다. 조촐한 이 동네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길 바라며 움직인다. 그러다 보면 뜻하지 않은 일들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 우연한 일들로부터 색다른 경험과 깨달음을 수확한다.



발길이 닿이는 곳, 그곳만의 향(香)을 따라 사유를
#1

 뜨거운 햇볕 아래 목이 마른 갈증보다 더욱 메마른 내면에는 사막이 있다. 황량한 사막은 야생화를 피워낼 큰 비 기다린다.  의도적인 무계획, 누군가와의 만남에서 어떤 희열을 느낀 것은 작년 초여름이었다. 네이비 색의 리넨 원피스에 샌들을 신었다. 발등 위로 여름의 빛이 한 겹 덮이고, 선크림을 바르지 않은 탓에 살갗이 따가웠지만 그래도 걸어보기로 했다. 파스텔 톤의 벽화가 가득 채워진 마을 내 99개의 계단을 눈앞에 두고 태양을 이길 자신이 없어서 머뭇거렸다. 숨을 몰아내며 고개를 돌리니 계단 옆 안락한 공간이 하나 있다. 미지근하게 살랑이는 시폰 커튼은 유혹의 손짓을 한다.

타이핑이 가능한 수동 타자기들, 오랜 연식에도 불구하고 제 역할을 해내는 선풍기, 허름하지만 튼튼해 보이는 필름 카메라들로 이루어진 공간. 다정하고도 아늑한 공간은 타자기의 주인과 닮았다. 자신만의 고유한 향(香)을 가진 이들은 단단하다. 그들은 단단하고도 부드러운 향을 피워낸다.

가족, 친구, 연인과 같은 익숙한 관계에서 벗어나 초면의 타인과 나누는 대화는 때로 낯선 신선함과 새로운 깨달음을 주기도 한다. 그리고 적절한 거리, 적당한 온도로 오가는 대화에서 더없이 솔직해지기도 한다. 어쩌면 '나'라는 사람을 처음부터 다시 각색할 수 있어서인가?


[필자] "(...) 그래서 사실 아직도 방황하고 있어요."

[공방 주인] "방황이 나쁜 것만은 아니에요. 계속 무언가 찾고 있다는 건 좋은 거예요."


간단명료한 관계에서 나오는 간단한 해답은 오히려 개운함을 느끼게 한다. 이리저리 얽히지 않는다. 보다 객관적이다. 서울-통영을 오가며 활동하시는 공방의 주인은 서울행 버스를 타기 전, 다급히 소원 팔찌를 하나 만들어 주셨다. 그리고 낙엽을 지르밟을 때쯤, 조금은 단단한 사람이 되어 다시 그곳에 방문했다. 지갑에 넣어 다니는 한 시인의 문구를 타자기로 입력하고 책갈피를 만들었다. 여전히 그 공방의 타자기는 작동 중이다.


#2

동네 어딘가 예술가들이 모이는 마을이 있다. 화가, 시인, 작가, 음악가, 포토그래퍼. 그들이 만들어낸 작은 공간들은 무척이나 뚜렷하게 각자의 향을 지니고 있다. 그들이 피워내는 향은 어딘가 모르게 포근하다. 그 향에 서서히 스며든다. 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포토그래퍼였던 한 카페 사장님은 재즈를 좋아하신다. 손님들의 대화 소리로 가득 찼던 시간대 홀로 책을 들고 방문했다. 음악이 대화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다가 어느새 손님들이 모두 빠져나가 고요해졌다. 그때 사장님은 Autumn Leaves를 틀어놓고 물 먹은 듯 몽롱한 일렉기타를 연주한다. 나는 읽던 책을 덮고 2층에서 난간을 쓸며 내려갔다.


[필자] "사장님, 저도 같이 연주해도 될까요?"
[카페 사장님] "Eb key로 루프 돌려줄래요?"


소개는 필요 없었다. 연주를 통해 첫 대화를 나누었다.


[카페 사장님] "전공자의 터치는 확실히 다르네요. 서울에서 왜 내려온 거죠?"

[필자]  "예술로 살아남기 쉽지 않더라고요."

[카페 사장님] "흠 혹시 재능 기부를 많이 했다던가.. 그러면 쉽게 지치지. 무튼 종종 와요."


언어가 아닌 연주를 통해 나누는 대화의 형태가 가진 아름다움이 있다.

언어로 만드는 어색한 기류를 불편해하지 않아도 된다. 억지로 묻고 답하지 않아도 된다.

각자의 연주에서 전달되는 무언의 서사가 있다. 말하지 않았지만 온통 이해받는 느낌.

'아 정말 그러셨군요'

몸과 마음 카페

시크한 사장님과의 연주로 마무리 지은 그 하루는 선물 같았다. 무대가 아닌 주방으로 들어가 냄비를 달그락 거리다 다시 건반을 누르니 마음속 먹먹함이 올라왔지만, 짓눌리던 부담감에서 해방되어서인지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한 연주를 했다. 오후 5시쯤 카페 사장님 부부는 영업 마감을 준비하고 나는 다음을 기약했다. 한층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카페를 나서려고 보니 비가 내린다. 가녀리게 흩날리는 비 마저 산뜻했던 어느 하루였다.



나의 시선에서 발견으로. 온몸의 감각을 일깨워요.


결론적으로 전달하고 싶은 것은 SNS, Youtube 같은 온라인 플랫폼에서 일방적으로 소비를 당하는 콘텐츠에서 잠시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반복되는 일상에서 지루함을 느낀다. 그런 일상 속 자극적인 콘텐츠들을 소비하며 시간을 허비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실제로 내 모든 감각을 사용할 수 있는 경험을 만드는 것이다. 계획적이어도 좋고, 즉흥적이어도 좋다.

나의 경우, 무한반복의 자영업 시스템 속 내가 행복을 위해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것은 뭘까? 그런 것들 중에 내게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것은 무엇일까?를 곰곰이 생각했다.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니 나는 이런 일상 속 낯선 여행에서 발견한 무엇, 낯선 타자와의 만남에서 이루어지는 감각적인 즐거움과 새로운 깨달음에서 행복을 얻는다는 것이다. 사람과 사물. 어떤 것이든 나의 시선을 어디에 두며, 그 시선에서 어떤 것을 발견하느냐에 달렸다. 그래서 이제는 계획 속 무계획을 적당히 배치하여 의도적으로 일상에 영감을 불어넣는다. 행복을 찾는 나만의 방법을 하나 발견한 것이다.


무언가 잘난 듯 이런 글을 쓰는 것 같아 보이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여전히 자리를 못 잡은 어리숙한 한량일 뿐이다. 이렇게 글을 쓰는 이유는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과도 같다. 그저 의식의 성장을 위해 노력할 뿐이다.

여행 투어 버스

우짜든지

팔팔하게

다시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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