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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앤온리 Feb 18. 2023

경단녀(경력단절녀)의 재취업 첫 출근 일기

 

‘경력단절’ 경력자. 이는 나를 나타내는 표현 중 하나이다. 경력단절을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겪었으니, 경력단절에 있어서 만큼은 누구한테도 뒤처지지 않는 경력자다. 처음에는 결혼 후 바로 유학생인 남편 따라 미국에 가느라 경력단절이 되었다. 이후 미국에서 대학원까지 다녔으나, 졸업 후 육아에 전념하느라 취업을 포기하고 경력단절이 되었다. 그렇게 3년 동안 아이들만 키우다가 남편의 공부가 끝난 뒤 남편도 나도 한국에 취업이 되어 귀국하였다. 귀국 당시 둘째가 생후 3개월인 어린 아기였지만 앞뒤 가릴 것 없었다. 그것이 앞으로 나에게 찾아올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만 들었기 때문에 그 취업 기회를 포기할 수 없었다.


첫 출근 하던 날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 며칠 전에 미리 집과 회사 간 출퇴근 길을 운전하며 왔다 갔다 해보았다. 그 때부터 설렘이 솟아났다. 첫 출근 당일 회사 캠퍼스(그 회사는 회사 부지를 ‘캠퍼스’라고 불렀다.)로 진입하면서부터는 그간 잊고 있었던 직장 생활의 즐거움이 온몸에 가득 찼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혈관들이 짜릿했다. 동시에 낯선 환경에 진입하는 새로운 도전에 대한 두려움도 다가왔다. 오랜 기간 먼 타국에서 외로운 전업주부로 살면서 자존감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수년 간 좁디좁은 육아세계에 고립되어 있었는데, 과연 회사에서 잘 해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두려움이 생긴 것이다.  예전에 가지고 있던 경력은 모두 리셋되고 다시 신입사원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그것도 나이는 엄청 많고 센스는 떨어지는 신입사원.


두려움을 안고 회사 건물에 들어가 인사팀 직원의 안내를 받아 소속 팀의 사무실로 걸어갔다. 이동하면서 처음 느낀 것은 '이곳은 살아있다’는 느낌이었다. 바삐 걸어가는 사람들, 전화 통화하는 사람들, 동료와 이야기 나누는 사람들. 미국에서 살던 육아 세계가 흑백세계였다면 이 회사 안은 여러 색깔이 가득 찬 생기있는 세계였다.


팀에 도착했을 때 팀원들이 환히 웃으며 반겨주었다. 내가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어안이 벙벙했다. 나이 많은 경단녀에게 팀원들이 텃세를 부릴 것이라 생각했던 걱정은 기우였다.


팀장님은 나를 데리고 옆 팀들에 인사를 다녔다. 다른 팀 사람들도 반갑게 환영 인사를 건넸다. 어떤 분이 환영선물로 아무것도 줄 것이 없다고 하며, 손에 쥐고 던 귤을 건네주었다. 귤에 남아있던 그분의 온기가 나에게 전해져 조금씩 긴장을 녹여주었다. 인사를 마치고 돌아와 내 책상에 가보니,  ‘입사를 환영합니다.’라는 문구의 리본이 달린 산세베리아 화분이 수줍게 놓여있었다. 그 수줍은 모습이 마치 나의 모습 같아 친근하게 느껴졌다. 이 화분은 그 후 수년간 그 자리에서 직장생활의 희로애락을 같이 했다.


직장생활을 오랜만에 시작하자, 마치 지구에 처음 온 외계인인 것처럼 하나씩 다시 적응해 나가야 했다. 전업주부에서 직장인으로, 해외 동포에서 한국인으로 전환하면서 새로 배우고 터득할 것이 많았다. 오랫동안 편한 옷만 입었기에 출근할 옷이 마땅치 않았다. 모유수유하는 아기를 키우느라 쇼핑 다닐 시간도 없었다. 그래서 결혼 전 입던 옷을 입고 갔다. 집에서 혼자 거울로 보았을 때는 괜찮아 보였다. 그러나 막상 회사에 가니 내 복장이 너무나 촌스럽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은 뒤 눈이 뜨여 자신들의 알몸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 것처럼 나도 눈이 번쩍 뜨인 것이다. 바로 인터넷으로 옷쇼핑을 했다.


팀원들이 자꾸 카톡 어쩌고 하는 얘기를 했다. 그게 뭐냐고 용기 내서 물어봤다. 그걸 모르냐고 다들 눈들이 동그래진다. 바로 검색해서 카카오톡을 깔았다. 오전 내내 바빴던 팀장님이 점심식사 후 양치하고 자리로 돌아오길래 치카치카하고 오시냐고 인사를 건넸다. 팀장님은 웃으면서 ‘치카치카’는 아니고 ‘양치’하고 왔다고 말한다. 그 즉시 유아용 용어가 아닌 성인용 용어를 패치했다.


업무에 적응하는 것보다는 새로운 환경과 문화에 적응하는 것이 더 낯설고 어려웠다. 하지만 기분 좋고 짜릿한 낯설음이었다. 그중 제일 좋았던 것은 사람들이 내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이었다. ‘누구 엄마’나 ‘누구의 아내’가 아닌 이름으로 불려지는 것이 너무나 좋았다. 그간 잊고 살았던 나 자신을 찾은 것 같았다. 잘 할 수 있을까 싶었던 두려움은, 자꾸 불리는 이름을 들으며 사라져 갔다. 회사에 가면 이름이 붙어있는 책상, 나만의 자리가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아침 출근길이 너무나 행복했다. 그 회사에서 수년간 일하면서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단 하루도 출근하기 싫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렇게 꿈같이 시작했던 직장생활은 이후로도 8년 넘게 지속되었다.


그러나 근무 9년을 채우지 못하고 또다시 육아를 위해 회사를 퇴사할 수밖에 없었다. 양가 부모님께서는 아이들을 봐주실 형편이 안되었다. 가사도우미 겸 아이들 챙겨주는 사람을 여러 명 고용했었으나, 도둑질, 아동학대, 사이비 종교 전도 등의 이유로 다 내보내야만 했다. 그렇게 10여명을 겪고 나니 아이들도 정서적으로 지쳐서 이제 다른 사람이 우리 집에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사정사정했다. 그러나 일도 많고 출장도 많았던 나의 업무는 가사/육아를 도와주는 사람 없이는 지속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결국 아이들을 위해, 부득이하게 사랑하던 회사퇴사하고 전업주부로 돌아갔다.


한국에 귀국해서 그 회사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할 때, 그때는 그것이 내 커리어의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 인생 100세 시대에 들어서면서 평생직장이란 개념은 희미해지고, 사람은 최소 2~3개의 ‘직장’이 아닌 ‘직업’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 따라서 이제 경력단절은 꼭 피해야 할 일도, 부끄러워할 일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는 재취업 첫날의 기억처럼 짜릿하고 설레는 새 기회는 그 이후에도 몇 번 더 찾아왔다. 그 뒤 이야기도 궁금하다고? 그 이야기들은 좀 더 기다려보시길. 왜냐하면 나는 경단녀일 뿐만 아니라 이단녀(이야기 단절녀)이므로. 후훗.








그림출처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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