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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앤온리 Mar 07. 2023

메탄, 에탄, 프로판도 모르면서 화학회사에서 일한다면?

 - 직장에서 도전적인 업무를 맡게 되었을 때

메탄, 에탄, 프로판, 부탄의 차이점을 알고 있는가? 알고 있다면 축하한다! 당신은 이과 출신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불행히도 문과 출신인 나는 화학의 기본 지식인 이 네 가지가 어찌 다른지도 모른 채 화학연구소에 입사했다.


우리 팀은 CTO(Chief Technology Officer) 보좌 팀으로서, 연구소에서 진행하는 연구내용을 관리하고 보고하는 팀이었다. 이런 보고 관련 업무는 보고 일시를 정하고 연구팀에 보고서 작성을 요청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보고서가 취합되면 내용을 검토하고 필요시 보충자료를 추가로 요청한다. 이중 가장 중요한 업무는 CTO의 지시에 따른 보고서 내용 수정 작업이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이 업무가 별 것 아니라고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화학연구소의 보고서는 한글로만 적혀있는 것이 아니다. 보고서의 상당 부분이 알파벳으로 된 각종 전문용어들로 채워져 있다. 설상가상으로 추상미술 작품처럼 보이는 복잡한 분자구조 그림들이 난무한다. 이러한 보고서 내용 중에서 만약 CTO께서 수정을 지시하면 지체 없이 제깍 해당 부분을 찾아서 수정해야 한다. 그것도 대형스크린에 보고서를 띄워 수정작업이 실시간으로 보이도록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CTO 앞에서 식은 땀 흘리며 보고서를 실시간 수정해야 하는 이 업무는 외줄타기 서커스보다 더 어려워 보였다. 


이렇듯 중요하고도 어려운 업무는 당연히 아무나 담당할 수 없었으리라. 그래서 화학 관련 전공자이며 연구원으로 일한 경험이 있는 팀원인 서과장이 혼자 도맡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청천벽력 같은 일이 일어났으니! 서과장이 팀 이동 발령이 나서 전혀 다른 부서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그는 본인 후임으로서 그 업무를 담당할 팀 내 다른 팀원을 추천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보고 업무는 다른 팀원들이 보기에도 쉬운 업무가 아니었기에 다들 긴장 속에서 누가 후임자가 될지를 궁금해했다. 그러던 어느 날, 화학 관련 문외한이라 방심하고 있는 나를 서과장이 조용히 불렀다. 그리고는 이 업무를 맡아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앞서 말했듯이 어려운 업무여서 피하고 싶었다. 게다가 야근과 주말근무도 많은 업무라서 피하고 싶었다. 어린 아기를 키우고 있는 워킹맘으로서 야근과 주말특근은 여러모로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며칠간 고민을 한 뒤, 왜 내가 이 일을 맡으면 안 되는지를 한 장의 보고서로 정리했다. (보고서 작성을 못하겠다는 보고서를 쓰다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얼마나 화학에 대해 무지한지, 워킹맘에게 야근과 주말 근무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등 구차한 변명을 그럴싸한 말투로 포장한 보고서였다. 그리고는 서과장에게 1:1 면담을 요청했다. 빈 회의실에 앉아 준비한 보고서를 내밀며, 내가 후임자로서 얼마나 부적합한지를 결연하게 설명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제가 임대리님을 보면 가끔씩 화가 나요. 그 좋은 머리를 가지고도 이렇게 일을 안하려고만 한다는 것 때문에요. 저한테 그 머리가 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열심히 일하고 좋은 성과를 냈을 거예요!!”


그리고서 그는 회의실 의자를 박차고 나갔다. 순간 그게 무슨 소리인가 하며, 멍하니 그가 떠난 회의실 문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최선을 다해서 일하고 있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잠도 부족하고 체력도 약한 워킹맘으로서 가능한 모든 에너지와 역량을 다 끌어 쓰며 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나에게 일을 안 하려고만 한다고 말하다니. 참으로 억울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의 잠재력을 믿어준 서과장에게 오히려 고마워해도 모자랄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냥 '그가 나를 미워하나보다'라는 생각만 했다.  


그래서 그 보고업무는 어떻게 되었냐고? 눈물겨운(?)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 업무는 나에게 떨어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나에게 ‘떨어졌었다.’ 왜냐하면 내가 잠시 맡아서 하다가 다른 팀원에게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그렇게 겁내며 열정 없이 맡았던 업무가 다른 팀원에게 넘어간 이유는 더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이 갈 터이다. 


그런데 잠시 내손을 ‘스쳐 지나간’ 그 업무를 몇 년 뒤 다시 맡게 되었다. 그때는 두말 않고 그 업무를 맡았다. 왜냐하면 아이도 많이 컸으며, 당시 팀 전체가 위기에 처해 있어서 다른 팀원에게 떠넘길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보고업무 다시 맡게 되었을 때는 질문하고 배워가며 열심히 일했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는 생각으로 그냥 닥치고 일했다. 그런데 그렇게 업무를 하다 보니 생각보다 어렵지 않음을 깨달았다. 더 나아가 화학지식과 연구내용들에 대해 알게 되면서 배움의 기쁨도 생겼다. 연구내용을 알게 되니 회사가 전체적으로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보는 눈도 생겼다. 이 과정에서 스스로 성장하고 있다고 느꼈고, 팀과  회사에 더 큰 기여를 하게 되었다는 보람도 있었다. 이렇게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업무를, 과거엔 왜 그렇게 겁내고 피하려 했는지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그 업무를 처음 맡았을 당시에도 만약 앞뒤 가리지 않고 그냥 묵묵히 열심히 했다면 아마 충분히 잘 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걸 알기에 서과장이 그 일을 제안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두려움에 눈이 멀어 스스로 안된다고만 생각했기 때문에 제대로 해보지도 않고 포기해 버렸다. 마치 100미터 달리기 선수에게 500미터 출전 기회가 왔을 때, 제대로 달려보지도 않고 겁내며 출발선에 주저앉은 것과 같았다. 원래 할 수 있었던 100미터도 채 달려보지도 않고 말이다. 


이 경험을 계기로, 어떤 새로운 일을 맡게 되더라도 해보기도 전에 못하겠다고 도망치지는 않기로 했다. 최선을 다해서 달려보기 전에는, 그것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나도 다른 사람도 모르는 법이다. 만약 당신에게 무시무시하고 힘겨워 보이는 챌린지가 온다면 예전의 나처럼 시도조차 않은 채 겁내고 물러서지는 마라. 어쩌면 그 챌린지는 당신도 몰랐던 당신의 잠재력을 발견하는 값진 기회가 될 수도 있다. 100미터 달리기 선수라고 생각했던 당신이, 실은 훌륭한 마라톤 선수가 될 수 있음을 확인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메탄, 에탄, 프로판의 차이점을 알고싶어서 이 글을 읽기 시작한 분들께는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전하며 이만 총총.







*100% 실화를 바탕으로 쓴 글이지만 인물들의 이름과 직급은 가명임을 밝힙니다.

그림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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