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덮었다. 읽던 책을 방금 막 다 읽고 끝낸 참이다. 책은 신경숙 작가의 ‘아버지에게 갔었어’였다. 사실 이 책을 읽고 싶어서 펼치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일 때문에 누군가에게 이 책을 추천해야 하게 되었는데, 읽어보지도 않고 추천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싶었다. 그래서 숙제하는 마음으로, 그냥 후딱 읽어보자는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읽으면서 점점 나는 소설 속 아버지의 과거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리고 내 아버지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의 많은 부분을 숨기고 살아온 소설 속 아버지. 그러한 아버지의 과거에 대해 그동안 알려고 하지 않았던 주인공. 과연 나는 우리 아빠의 과거에 대해, 한 인간으로서의 그의 삶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고 얼마나 알려고 했었는가.
어렸을 때 아빠에게 월남전 참전했던 이야기를 해달라고 했던 기억이 있다. 맞다. 우리 아버지는 월남전 참전 용사였다. 참전 용사였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어릴 때 나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아빠는 지금도 “내가 누구냐. 월남 참전 용사 아니냐.”하며 자랑스러워하신다. 그래서 그때 이야기가 궁금해서 여쭈었지만 아빠는 자세히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통신병이었다던가, 총알이 스치고 간 적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은 기억이 있지만 그 외의 이야기는 하지 않으셨다.
이 책속의 아버지도 과거의 이야기를 자식들에게 꺼내놓지 않는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는 몰라도 과거의 힘든 기억 때문에 밤마다 수면장애를 겪는다. 몇 십 년이 흘러도 과거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소설 속의 아버지를 보며 우리 아빠를 생각해 보았다. 어쩌면 우리 아빠도 월남전 때의 기억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다시 떠올려 이야기하기 싫으셨던 것이 아닐까 싶다.
소설 속 아버지는 한국 전쟁과 유신 정권 등의 한국의 힘든 상황을 모두 겪은 세대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를 따르는 여섯 남매와 아내가 있었고 평생 그를 돌봐준 누나가 있었으며 그 외에도 그를 도와주는 여러 사람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외로운 인생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서 우리 아빠를 생각하니 참으로 외로운 인생이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빠는 애기였을 때 친엄마를 잃었고 친형제라고는 친형 한 명밖에 없었으나 오래전 병으로 돌아가셨다. 새엄마와 세 명의 이복동생들을 돌보느라 안 해본 일이 없고, 월남전 참전하면서 벌은 돈도 모두 아빠 자신이 아닌 부모, 형제들을 위해 써버렸다. 결혼해서 자식을 낳았지만 자식이라곤 나를 포함해 딸 둘 뿐이고 둘 다 술 좋아하는 아빠와 같이 술 한잔 기울이는 일이 없었다. 오히려 매일 술을 먹는 아빠의 모습을 싫어했을 따름이다. 그런데 아빠가 외로웠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술이 아빠의 외로움을 달래는 유일한 친구가 아니었을까 싶어 마음이 짠해진다.
원래 신경숙 작가의 작품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다.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그 일이 아니더라도 실은 오래전에 그녀의 작품에서 손을 떼었었다. 그녀의 작품은 너무 우울하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그녀의 작품을 읽고 나면 마음이 가라앉고 우울해지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더 이상 읽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엄마를 부탁해’와 ‘아버지에게 갔었어’를 연달아 읽고 나서 새로이 깨달았다. 내가 그녀의 작품을 읽고 우울했던 이유를. 그것은 그녀의 생생한 묘사와 섬세한 감정 표현이 내 안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건드리고 가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글은, 내면에 꼭꼭 숨겨둔 깨질 것 같은 연약함에까지 기어코 파고들었다. 그래서 어렵게 유지해 온 잔잔한 마음속 호수에 파동을 일으켜 평화를 깨트리고 마음을 어지럽혔다. 이에 그녀의 작품을 손에 들기 두려웠던 것이다. 실은 이것이 그녀가 훌륭한 작가인 이유였을텐데 말이다.
책의 마지막에 ‘작가의 말’ 부분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삶의 고통들과 일생을 대면하면서도 매번 자신의 자리를 지켜낸 익명의 아버지들의 시간들이 불러내졌기를 바라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듯한 이 허름한 아버지는 처음 보는 아버지이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가 아버지를 개별자로 생각하는 일에 인색해서 그의 내밀한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하지 않았으니까요.”
마치 나에게 하는 이야기 같았다. 이번에도 신경숙 작가는 내 마음속 깊은 곳을 헤집어놓는데 성공했다. 그녀의 바람대로 익명의 아버지들의 한 명인 나의 아버지가 불러내졌다. 우리 아빠를 한 명의 개별자로 생각하는 일에 인색했던 내가 이번 어버이날을 앞두고 그의 내밀한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책을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