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 겉절이를 담갔다. 그냥 이렇게 말하면 열 글자도 안 되는 간단한 일이다. 그런데 그 과정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시작은 아들이었다. 요새 바빠서 겉절이를 담그지 못해 김장김치만 먹었는데, 아들이 겉절이가 먹고 싶다고 했다. 남편도 말은 안 하지만 푹 익은 김장김치에는 손을 대지 않는 눈치였다. 가족들 모두가 겉절이를 원하고 있었다.
그런데 겉절이 담그기는 좀 귀찮은 일이었다. 살림 척척하는 살림꾼에게야 겉절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테다. 그러나 게으르고 손이 느리며 솜씨 없는 나에게 겉절이는 꽤 도전적인 일이다. 그래서 가족들이 원하는 줄 알면서도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차였다.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생각되어 배추도 살 겸 장 보러 큰 마트에 갔다. 그런데 명절 직전이라 그런지 자그마한 알배추 한 개가 무려 6천 원이나 하였다. 평소의 거의 두 배 가격이었다. 순간 마음에 갈등이 일었다.
'세상에. 작은 배추가 이렇게 비싸다니! 이건 겉절이를 담그지 말라는 하늘의 뜻이야.'
'아니야. 아들이 엄마가 만든 겉절이가 먹고 싶다고 했잖아.'
갈등 끝에 배추를 달랑 한 포기만 사들고 집에 왔다. 하지만 그날은 이미 장 보느라 지쳐서 배추를 쳐다보기도 싫었다. 고대로 냉장고에 박아놨다.
다음날 겉절이를 하려고 알배추를 꺼냈다. 그런데 하루 지나면서 배추가 더 쪼그라든 것처럼, 마트에서 볼 때보다 배추는 더 작아 보였다. 꼴랑 이 작은 배추 하나로 겉절이 하겠다고 품을 들여가며 양념을 만들려니 그 노력이 아까웠다. 배추가 한 포기던, 두 포기던 양념 만드는 노력은 똑같으니, 지금 나가서 알배추 한 포기를 더 사와야겠다 싶었다.
장바구니를 들고 동네 작은 청과가게로 나섰다. 가게에 들어서니 상태가 좋아 보이는 배추가 있었다. 그런데 얼마냐고 물어보니 가격이 무려 만원!!! 깜짝 놀라는 나에게 가게 사장님이 말했다.
"명절 전이라 가격은 좀 나가지만 배추가 알도 크고 상태가 굉장히 좋아요. 원래 세 포기씩 한 망으로 삼만삼천 원에 팔아야 하는데 그냥 한 포기만 만원에 가져가세요."
인심 좋은 사장님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에서는 이런 목소리가 커져갔다.
'헐. 배추가 만원이라니 말도 안 돼. 집에 있는 알배추도 겉절이 담그기엔 너무 작으니, 그냥 겉절이 하지 말고 좀 참았다가 명절에 시댁 가서 어머님 김치 얻어다가 먹자.'
그래서 죄송하다고 인사하고 가게를 그냥 나왔다. 그런데 배추가 비싸서 속상한게 아니라 오히려 마음이 후련했다. 하기 싫은 일을 합법적으로(?) 안 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긴 기분이랄까.
그렇게 가벼운 발걸음이 되어, 나온 김에 도서관이나 들르자 하고 발길을 돌리는데 도서관 근처에 전에 보지 못했던 또다른 청과가게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할머니가 운영하는 허름한 가게였는데, 바로 문밖에 알배추가 수북이 쌓여있었다. 보나 마나 저기도 비싸겠지 싶었지만 그래도 양심상 물어나 보자 싶어 가게로 향했다.
"사장님, 이 알배추 얼마예요?"
"이거? 삼천 원~!"
헉. 귀를 의심했다. 여긴 왜 이렇게 싼 거지? 싼 배추를 찾아서 기쁜게 아니라 그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왜 이렇게 싸요? 이거 중국산이에요?"
"아니야. 국산이야. 여기 박스에 생산자 이름이 써있잖아."
국산임을 확인하며 실망감이 몰려왔다. 이렇게 좋은 상태의 알배추가 싸기까지 하니 안 살 수가 없잖아. 꼼짝없이 겉절이를 할 수밖에 없겠구나.
싼 가격에 낙담하며 배추 하나를 들고 지갑을 열었다. 삼천 원밖에 안 하니 카드로 결제하긴 죄송하고, 현금으로 드려야겠다 싶었다. 그런데 아뿔싸! 지갑 안에 천 원짜리 만 원짜리가 하나도 없고 오만 원짜리 지폐만 한 장 덜렁 들어있었다. 다시 마음속 두 목소리가 시작되었다.
'아니야. 그래도 이 가격이면 안 살 이유가 없잖아. 오만 원짜리 내밀기가 죄송하면 다른 채소도 좀 더 집어서 사면되지.'
지갑을 쳐다보며 잠시 이런 갈등을 하고 있는데, 마치 나의 마음을 읽은 듯한 할머니 사장님께서 불쑥 한마디 하셨다.
"오만 원짜리도 거슬러 줄 수 있어~~"
상황은 깔끔히 정리되었다. 더 이상 도망칠 명분이 없었다. 할머니 전대에서 꺼낸 꼬깃한 거스름돈을 받고 배추 한 포기를 덜렁덜렁 들고 나왔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세상을 살면서, 귀찮아서 하기 싫은 일이지만 하고 나면 보람과 기쁨이 있는 일들이 많다는 것을... 겉절이 담그기가 그렇고, 비 오는 날 욕실 청소하기도 그렇고, 피곤한 날 운동하기도 그렇고...
하면 좋다는 것은 머리로 이미 다 알고 있다. 심지어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하라고 권하고 격려한다. 아들도, 마트 직원도, 첫 번째 청과가게 사장님도, 두 번째 야채가게 할머니도, 수많은 책들도, 세상 사람들도 모두 나에게 겉절이를 담그라고, 청소하고 청결하게 살라고, 운동하고 건강하게 살라고, 권하고 격려한다. 굳이 힘들게 하지 말고 그냥 편하게 살라고 권하는 건 단 한 사람 뿐이다. 바로 나 자신.
그런데 그 단 한 사람, 나와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해 청소를 미루고, 운동을 건너뛰고, 겉절이를 회피하려 한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싸움은 17:1로 맞붙는 싸움이 아니라, 나 한 명과의 싸움이리라. 그 한 명만 이겨내면 삶은 더 윤택하고 보람있고 건강해질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렇게 세상 가장 어려운 싸움을 이기고 나서 싱싱한 겉절이라는 상패를 얻어낸 하루의 단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