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나만의 작전이란 것은 특별한 것은 없었다. 내가 아쉬운 입장이니 싸우고 화내지 말고 상황을 풀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작전이라면 작전이었다. 기분 나쁘다고 그들하고 싸워봤자 이길 수도 없거니와, 설사 이긴다고 해도 내가 얻는 것이 없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접근했다.
첫 번째로, 화만 내는 PM에게는 ‘웃음’이라는 무기로 다가갔다. 그가 화를 낼 때마다 속은 쓰라렸지만 오히려 웃음으로 반응해 주었다. 나라고 좋아서 웃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당신이 아무리 화를 내도 나를 기죽일 수는 없고, 내가 해야 할 일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호를 주고 싶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바쁘니까 저리 가!”라고 그가 소리칠 때 웃으면서 되물었다. “그럼 언제 다시 올까요?”라고 살갑게 말이다. 지금 돌이켜보니 그런 상황에 웃고 있는 모습이 약간 섬뜩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의도를 그가 알아챘는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일이 여러 번 반복된 후 어느 날 그가 이렇게 물었다. “너는 내가 이렇게 화를 내는데도 웃음이 나오냐?”라고. 그래서 “그러게요~!”하며 다시 웃었다. 그 뒤로부터 차츰 그의 짜증은 사그라들었다. 어느 날 그는 “그래서 네가 필요한 게 뭐야?”라고 먼저 물어왔다. 그는 그렇게 협조적인 태도로 바뀌었다.
두 번째로, 바쁘다고 나를 피하는 영업지원팀원에게는 ‘공감’으로 다가갔다. 정말 바빠 보이니 시간을 많이 뺏지 않겠다고 양해를 구하고 아주 짧은 시간씩 몇 번에 걸쳐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를 하다 보니 그녀가 맡고 있는 일이 정말 많긴 많았다. 그런데 책임만 많을 뿐 그에 합당한 권한은 그닥 없어 보였다. 그녀에게 권한이 더 있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번 프로젝트 개선안 중 하나로 그녀에게 좀 더 권한을 주는 것을 제안하겠다고 그녀에게 말했다. 이 말에 그녀는 그간 쌓여있던 개인적인 불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많은 일을 하고 성과도 냈는데도, 본인이 순수 영국인이 아닌 인도계 영국인이라서 오랜 시간 진급을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힘들었겠다고 공감하며 그녀의 말을 그저 들어주었을 뿐인데 그녀는 마음을 완전히 열었다. 다른 일을 제치고 시간을 내서 인터뷰에 응하고 자료도 적극적으로 제출했다. 더 나아가 다른 동료들에게까지 나에게 협조하기를 당부해 주었다.
마지막으로 나와 말도 섞지 않는 회계팀장에게는 ‘MS Office’로 다가갔다. 칼퇴근을 하는 현지 직원들과 달리 회계팀장은 거의 매일 남아서 야근을 했다. 당시 나도 거의 매일 야근했기 때문에 조용한 사무실에 둘만 있을 때가 종종 있었다. 하지만 둘 사이에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어느 날 밤 용기 내서 그에게 다가가서 오늘도 야근을 하냐고 말을 걸었다. 역시나 그는 대답도 없이 컴퓨터 모니터만 보며 하던 일을 지속했다. 가만히 지켜보니 그는 모니터에 각종 수치가 적힌 엑셀(Exel) 프로그램을 띄워놓고는 모니터 한번 올려다 보고 책상 한번 내려다보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엑셀 프로그램의 각 셀에 적혀있는 수치를 보며 그것을 엑셀 안에서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책상의 계산기를 손으로 두드리며 아날로그로 셈을 하고 있었다. 대략 50대의 나이로 보이는 흰머리의 그는 엑셀의 함수 기능을 쓰고 있지 않았다. 그때 그에게는 엑셀 프로그램이 익숙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주 오래전 일이니, 당시 그의 세대에는 MS Office가 익숙하지 않았을 수 있다.)
달가워하지 않는 그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엑셀로 간단히 덧셈하는 법과 몇 가지 함수 기능을 알려주었다. 물론 그는 이것만으로 갑자기 차가운 태도를 바꾸지는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그 이후로 그와 대화는 시작할 수 있었다. 마침 그 당시 월드컵이 진행 중이었고 영국 축구의 자부심을 가진 그와 축구 이야기로 대화를 확장하며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다. 당신이 예상하는 바대로 결국 그의 협조도 얻어낼 수 있었다.
그 회사에 입사할 때 나를 면접 보고 뽑아주었던 인사팀장님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었다.
"싸워서 이길 수 없다면 친구가 되어라."
라고 말이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현지 직원들에게 접근한 방식이 이 말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직원들과의 관계는 싸워서 이기고 지는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친구까지는 아니어도 그들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 아니라 같은 편이라는 인식을 심어준 덕분에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었다.
프로젝트 종료 후 영업지원팀 그녀는 나의 개선안으로 말미암아 여러 권한을 부여받았다. 이듬해에는 매니저로 진급까지 하게 되었다. 프로젝트 마치고 귀국하는 나에게 그녀는 팀원들과 함께 조촐한 환송파티를 열어주었다. 그리고는 환송선물로 예쁜 목걸이까지 주었다. 이 목걸이는 나에게 단순히 예쁜 목걸이가 아니라, 굴욕과 어려움을 견뎌내며 얻어낸 소중한 트로피의 의미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