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모내기하는 날에 먹던 ‘닭도리탕’
농부셨던 외할아버지는 대부분의 시간을 논과 밭에서 보내셨다. 하루만 쉬어도 티가 나는게 농사라고 하시던 할아버지에게는 쉬는 날도 없었다. 봄과 여름, 가을 사계절 동안 할아버지를 집에서 볼 수 있는 시간은 식사 때이거나 아예 집으로 돌아오신 저녁이었다.
그 넓은 논과 밭을 할아버지 혼자 해가 뜨기 전부터 질 무렵까지 도맡으셨다는 것이... 본인 스스로야 어떻게 생각하셨을지는 모르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면 마음이 아프다.
그저 적적해서, 혹은 젊어서부터 해왔던 일이라. 건강이 허락하는 한 농사를 계속 짓던 할아버지는 힘에 부쳐도 행여나 바쁜 자식들을 귀찮게 할까봐. 먼저 도와달라는 말은 하지 않으셨다. 미련할 정도로 성실하게 농사를 짓는 이유가 모두 자식들을 먹이기 위함이었음에도 말이다.
하지만 고집이 센 할아버지도 봄과 가을에는 어쩔 수 없었다. 피할 수 없는 ‘모내기’와 ‘추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는 나도 하루쯤 일손을 거들 수 있었다.(사실 거든다기보다는 사촌들과 논을 누비며 신나게 노느라 정신없었다.)
봄에는 온 식구들이 모여 모내기를 하고 점심으로 닭도리탕*을 먹었다. 가을에는 작은삼촌이 운전하는 콤바인을 타고 논을 질주했다. 논 한마지기를 돌고나면 몇 가마는 너끈히 채우는 벼처럼 내 기억 속에도 그때의 추억이 알알이 쌓여있다.
깊은 잔상을 남긴 건 매해 봄 모내기를 하며 외할아버지의 논에서 먹던 ‘닭도리탕’의 맛이다.
외할아버지가 논에서 아빠와 삼촌들, 이모부를 진두지휘하며 모내기를 하는 동안, 외할머니와 엄마, 이모는 부엌에서 새참과 점심을 준비했다. 외할머니는 고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배고픈 걸 용납할 수 없었다. 맛과 양은 기본이요, 기력도 채워줄 만큼 든든한 음식을 원했다.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시키는 메뉴는 몇 개 안됐고, 외할머니의 픽은 언제나 정해져있었다. ‘제육볶음’이나 ‘닭도리탕’이였다. 두 가지 음식은 고추장으로 매콤하게 볶거나 끓여 입맛을 돋궈주며 조금 식어도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특히 나는 외할머니의 ‘닭도리탕’을 좋아했다.
외할머니의 닭도리탕은 일반 레시피보다 물을 2~3배쯤 많이 잡는 것이 특징이다. 요리가 완성되면 주황색의 닭도리탕 국물에 밥을 말아 먹을 수 있을 정도다.
백숙을 고듯 푹- 끓여낸 닭도리탕 국물에서는 닭 뼈의 고소함과 진한 맛이 나고, 부드럽게 잘 익은 닭고기는 뼈를 발라 먹는 재미가 있었다. 포슬하게 으깨지는 감자에 국물을 살짝 끼얹어 먹는 것도 맛있다. 평소라면 익힌 당근은 쳐다보지도 않을 텐데, 닭도리탕의 매콤하고 짭짤한 양념이 베어든 당근에는 손이 간다. 어느새 배가 불러온다. 이제 남은 밥을 해치워야지. 감자를 조금 으깨 넣은 밥위에 닭도리탕 국물을 붓는다. 밥과 감자가 잘 어우러지게 말아 먹으면...정말 최고다.
닭도리탕으로 유명한 맛집들도 찾아가봤지만, 그때의 맛을 능가하는 집을 찾을 수는 없었다. 맛도 맛이지만 그 분위기를 다시 즐길 수 없기 때문이다. 때로는 그 날의 추억이 맛으로 기억될 때가 있다.
봄의 따뜻한 햇볕 속에 온 식구가 둘러 앉아 즐겁게 닭도리탕을 나눠 먹던 추억. 땀과 흙 범벅이 된 채 다음 일거리에 쫓기면서도 서로들 많이 먹으라며, 맛있게 먹으라며 웃으며 먹던 그날의 분위기. 잊을 수 없다.
다행인 것은 할머니의 맛을 따라하다 보니 제법 그 맛이 난다는 것이다. 내 쿠킹 클래스의 한 수강생은 원조 할머니 맛집 수준이라고 추켜세우기도 했다.
혹시나 싶어 그때 잡아 두었던 레시피를 올려본다. 맛이 궁금하신 분들은 한번 만들어보시라.
아래 레시피보다 물을 한 컵 정도 더 부어도 무방하다.(혹시나 싱겁다면 소금간으로 살짝만)
■재료
1) 주재료
닭볶음탕용 닭(1kg) 1/2마리, 감자(주먹사이즈) 1개, 파 1/2 대, 양파 1/2개, 당근 1/3개
2) 양념장
물 600ml ,고추장 듬뿍 2T(65g), 고춧가루 1/2T, 간장 2T, 청주 2T, 다진 마늘 1/2T
■ 레시피
1. 닭은 흐르는 물에 핏물을 씻어내며 헹구듯이 씻어준비한다.
☞ 불필요한 껍질이나 지방은 제거해주세요.
2. 냄비에 물을 반 이상 넉넉히 받아 끓이고, 물이 끓으면 닭을 넣어 3분정도 데친다.
☞ 닭은 하얗지만 질겨지지 않게 살짝 데친 후 찬물에 기름을 한번 씻어주세요.
3. 감자, 당근, 양파는 큼직한 깍둑 썰기로 대파는 어슷 썰어둔다.
4. 냄비에 물과 양념을 모두 풀고 양파, 감자, 닭을 넣고 중불에서 20분간 조리듯 익힌다.
5. 감자가 익으면 대파를 넣어 마무리한다.
*닭도리탕은 ‘닭볶음탕’의 일본식 표현으로 올바른 표현은 아니지만 외할머니의 표현을 살리고 싶어 그대로 살려서 표현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양해해주시기를 부탁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