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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에나 Nov 29. 2019

내 나이 서른 둘, 편의점 알바가 내 직업이라니.

#1. 대찬 야망의 끝, 편순이





 나도 내 나이 서른둘에 직업이 시골 편의점 알바생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물론 내가 이곳에 오게 된 데에는 나의 야망이 큰 작용을 했다.


 본디 나의 원대한 꿈은 ‘광고 카피라이터’였다. 하지만 언제나 현실의 벽은 너무 높고, 가고 싶던 회사의 세미 인턴쉽 최종 면접에서 떨어진 뒤 지레 겁먹고 포기해버렸다.

 다음으로 꿈꾼 직업은 '드라마 작가'였다. 여의도의 방송작가 교육원 연수반까지 수강했으나 창작의 고통은 스물여섯이 견디기에 너무나 무거운 것이었다. 스스로를 쓸모없이 똥만 싸는 기계라 치부하며 기나긴 우울증에 걸려 이대로는 죽겠다싶어 이 길도 접었다.


 드라마 대신 비드라마반 수업을 듣고 EBS의 토크 프로그램 막내작가로 본격적인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타고난 것이 인복이라 비교적 유순하고 따뜻한 메인작가님, 순둥이 서브언니의 인도를 따라가던 찰나, 프로그램은 종영되었고 SBS의 아침정보 프로그램의 막내로 갈아탔다.

 박봉에 편성표를 다른 프로덕션과 아이템 비딩으로 받아오는 것이 불안정했지만 몇 년 만 빡쎄게 구르면 서브 달고 메인 작가까지 보장되었겠지만... 죽기 전에 못 이룬 꿈이 생각나 귀신이 될까봐 난 마지막으로 광고인이 되 보겠다며 그곳을 뛰쳐나왔다.



 사실 광고인은 개뿔. 편입을 하며 얻게 된 공황장애가 밤샘작업과 스트레스로 나날이 심해졌고, 방송계에 잔재해 있는 꼰대문화의 피해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창밖을 보면 자연스레 뛰어내리면 어떨까?를 생각하는 나를 발견하고 뛰쳐나오길 잘했다 생각했다.  그 후 다양한 알바를 하며 1년 여간 공황장애 및 우울증을 치료했다.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을 찾자, 난 다시 나의 업을 찾기 위한 여정을 시작했다.






 이번 종목은 요리였다. 대학교 원서를 쓸 때, 곧 죽어도 광고홍보학과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진즉에 나의 요리 재능을 알아본 엄마는 조리학과로의 진학을 권유했다. 사실 권유라기보다는 “너 좋다는 광고홍보학과 가서 장학금 못 타기만 해봐. 아주 죽을 줄 알아.”라는 협박이었다.

 결국 오랜 시간을 돌아 엄마 말대로 난 다시 조리대 앞에 섰다. 양식 조리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등록한 요리학원에서 나의 열정과 재능을 알아본 부원장 선생님이 근처 마트의 문화센터 요리 강사 자리를 추천해줬고, 난 자격증도 없이 그 기회를 거머쥐었다.


 재수 없게 들리겠지만, 난 감각이 좋은 편이다. 내가 맡을 수업의 타깃 층과 그들이 원하는 니즈를 정확히 파악해서 기획한 수업이 제대로 먹혔다. 난 요리를 가르치면서 분위기를 팔았다. 문화센터의 요리수업은 다양한 목적의 수강생이 존재한다는 걸 잘 캐치했다. 요리를 배우기 위한 수강생과 문화센터를 즐기러온 수강생 모두를 아우르고 싶었다. 사람들은 요리를 배우러왔지만, 요리를 배우면서 요리하는 행위의 즐거움을 느끼러 온 것이었다. 그런 그들이 마음껏 요리를 즐길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줬다.


 요리 초보들이 따라하기 쉬운 난이도의 트렌디한 메뉴와 저녁을 해결   있도록 밥을 제공했다. 다양한 음악을 준비해서 배경음악으로 깔았고, SNS 예쁘게 자랑할  있도록  수업마다 음식에 맞춘 식기와 커트러리, 테이블보를 준비해갔다.맛이 보장된 레시피는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줄줄이 폐강되었다는 이전 강의와 달리 내 수업은 당연히 성공할 수밖에 없었다. 6명의 아담한 수업에서 25명의 대규모 수업이 되고도 대기자가 늘 꽉차있었다. 반년 정도 인기에 취해 혼신의 힘을 다해 스스로를 갈고있었다. 문득 자신감이 바닥을 쳤다. 내가 사기를 치고 있다는 기분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쿡방이 뜨기 시작하면서 전공자도 아닌 내가 요리를 가르친다는 것이 무면허운전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강의 도중 양식과 한식 조리사 자격증은 땄지만, 그럴싸한 요리학교의 학위도 유명레스토랑에서의 경력도 없는 나 자신에게 위축되었다. 수강생의 단순한 질문도 ‘지금 나를 못 믿고 떠보려고 저런 질문을 하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예민해져갔다.


 그 시점 행운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농림부 주최의 셰프 양성 프로그램에 선발되었다. 수준 높은 교육진과 프로그램에 겉멋만 들고, 눈이 한껏 높아진 나는 문화센터를 박차고나왔다. 이때다 싶어서 학자금 대출까지 받아 셰프 양성 프로그램을 진행한 대학교의 요리전공 대학원에 진학했다. 매일 1등으로 등교하던 모습을 좋게 봐준 덕택에 장학조교로 뽑혀 대학원 부설 연구소의 조교로 일하게 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네들의 분위기에 곰탱이는 도무지 적응할 수 없었다. 뭐든 열심히 하는 게 좋은 거라는 생각에 바쁘게 움직이던 나에게 ‘쌤, 그렇게 열심히 한다고 교수님이 논문에 이름 안 써줘요.’라거나 나를 챙겨주는 듯하면서도 결국 그들만의 울타리를 만들고 나를 격리시키는 모습에 상처받고 한 학기만 겨우 마무리한 채 휴학계를 냈다.





 내가 다시 돌아간 곳은 지난 영광에 찾은 문화센터였지만, 문화센터 수입만으로 타지 생활을 유지하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 일요일도 없이 문화센터 수업 두 개와 홈 쿠킹 클래스, 알바 세 개를 하며 지냈다. 자가용 없이 1시간 거리의 문화센터에 수업 재료가 잔뜩 든 트렁크를 끌고 버스를 갈아타거나 택시를 이용해 챙겨가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서서히 지쳐갔다.


“시에나. 내가 제일 속상한 게 뭔지 알아? 너는 이 어리고 한창 좋을 나이에, 일요일도 없이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놀거나 연애를 하는 것도 아니라는 거야. 정말 속상해. 답답하고.”


“시에나. 나랑 수현이 저번에 만났을 때 우리가 무슨 얘기 했는지 아냐? 너는 잘하는 게 너무 많아서 그래서 더 고생하는 것 같다고. 차라리 우리처럼 평범하면 빨리 포기하고 평범하게 살 텐데.. 오히려 재주가 너를 힘들게 하는 것 같다고.. 그런 얘기했어. 난 니가 이렇게 힘들어하는 거 보면 마음이 너무 아프다. 나이도 점점 드는데, 이제 결정해야 하지 않을까?”


 친언니와 동아리의 절친에게 들은 팩폭으로 철의 여인은 무너지고 말았다. 사실 이렇게 하면서까지 겨우겨우 버티는 의미가 있을 까? 싶던 순간은 이미 오래 전이었을지도 모른다. 의문은 의심이 되었고 나는 그대로 넋다운 되었다.


 완전히 지쳐버린 나는 독일과 프랑스로 한 달간의 휴식 여행을 다녀온 뒤, 타지 생활을 친언니에게 잠시 맡겨둔 채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으로 돌아와 시간대비 고소득의 휴게소 알바를 하며 타지생활과 여행을 위해 진 빚을 청산했다.


 조금씩 여유가 생기자 유럽에서 돌아오던 길에 멋진 핀에어 승무원 언니의 자태를 못 잊고 외항사 승무원을 꿈꾸게 되었다. 노예생활 같은 휴게소는 탈출했지만, 승무원 준비를 하며 돈은 벌어야하는 법.  





 그렇게 나는 이 시골 촌구석의 편의점 알바생이 된 것이다. 현재 승무원 준비는 집어치웠다. 대신 좋은 기회를 잡아 글을 다시 쓰게 되었고, 주중 아침 6시에 편의점에 출근 한 뒤 가게 문을 열며 일하고 있다. 부지런히 일하고 오후 2시가 되면 퇴근한 뒤 틈틈히 글을 쓰는 지금의 생활을 사랑하게 되었다. 언제나 이상을 높게 잡아 환상 속에 개고생하는 삶이었는데, 지금은 적당한 이상과 현실 사이를 유영하며 지내는 중이다. (물론 이 모든 안정의 중심에는 가족들과 남자친구, 친구들이 주는 전폭적인 지지의 힘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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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짧게 쓰려던 서론이 본의 아니게 너무 길어졌다. 내 진로는 아직도 망망대해를 항해중이며, ‘포기하지 않는 한, 인생 한방은 반드시 있다!’의 살아있는 증거가 되어 여러 사람에게 용기가 되고 싶다. 현재의 목표는 계속 안정적으로 일하며, 글을 꾸준히 쓰는 작가가 되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글을 한 번쯤 써보고 싶다. 아직 남은 인생은 기니까 남은 인생에 한번 베팅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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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사실  망설임 끝에 업로드한 글이었어요. 브런치에 연재를 하시는 수많은 작가님들의 전문적이고 멋있어보이는 직업들 사이에서 편의점에서 일한다는 건 조금 부끄럽게 느껴졌기때문입니다. 게다가 편의점알바생이라는 저의 신분(아니 21세기에 이런 근대적 단어를 쓰는 건 좀 웃기지만)으로 인해, 제가 써온 글이나 앞으로 쓸 글에 대해 씌워질지 모를 편견이 두렵기도 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구독취소를 하실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용기도 없었구요.

그럼에도 과감하게 업로드를 한 이유는 '담담히 나의 지나온 실패와 발디디고 있는 현재를 인정하는 것'. 2019년 제가 실행해야할 마지막 퀘스트였기 때문입니다. 에라 모르겠다. 하는 마음으로 업로드를 했습니다. 이렇게 별거 아닌 일을...그토록 겁내다니. 이제 저의 독자분들을 속이는 마음이 조금은 가셨습니다.

얼마남지 않은 2019년 잘 마무리하고 다가오는 2020년을 즐겁게 맞이합시다!   2019/12/2



+ 다음 편 예고)


 아무도 자기 사주를 버릴 수 없다지만. 난 너무 많은 것을 갖고 태어났다. 일복에 인복에 역마살까지. 그나마 다행인 것은 몇 달 전 ‘일복 타고난 놈은 성격 좋은 놈 아래서 일해야 한다.’는 지혜를 몸소 깨우친 것이다. 다행히 우리 사장님은 사람이 참 좋다.

다음 편에서는 우리 사장님에 대해서 소개해볼까 한다. 그럼 모두들 즐거운 주말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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